김명운 사진집 「자태(姿態) | 강원의 소나무」

40,000 원

상품 정보

총 상품금액 : 0원
김명운 사진 자태(姿態)에 대하여

정주하 (사진가, 前 백제예술대학교 사진과 교수)

잘 알려진 것처럼, 사진은 ‘탄생/발명’ 된 이 후 인간의 시-지각 활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사진의 내부에 탑재된, 대상을 그대로 찍어내는 방식의 구조 때문일 터이다. 사진이 만들어지는 시작은 당연히 카메라 작동인데, 이 ‘사진/카메라’에 근간을 이루는 몇 가지 요소 중 셔터스피드와 조리개가 있다. 전자는 속도를 제어하는 장치이고, 후자는 빛의 양과 초점을 관장한다. 카메라옵스큐라(Cameraobscura)를 가지고 인류 최초로 사진을 찍은 프랑스인 발명가 니세포르 니옙스(Joseph Nicéphore Nicépce 1765~1833)는 자그마치 8시간의 노출을 주어 한 장의 사진을 만들었다. (사진 1) 1826/7년의 일이다. 이 후 사진이 대중 앞에 보편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의 대용으로 혹은 못 보았던 것을 볼 수 있는 장치로서 사진을 사용하였다. 이 인류 최초의 발명품인 ‘사진-술(Photography)’을 대중들에게 이해시키고자 애썼던 프랑수와 아라고(Dominique François Jean Arago, 1786~1853)는 프랑스 의회에서 이 사진술을 소개하면서 “이제 우리는 달의 한 단면을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으며, 미국 사진가 루이스 러더퍼드(Rutherfurd, Lewis. M 1816~1892)는 1865년 자신이 제작한 망원렌즈에 카메라를 장착하여 정말로 달을 명확하게 찍어내었다. (사진 2) 인류가 이처럼 사진에 몰입하면서 얻어낸 미시와 거시의 세계는 모두 호기심과 그리움을 대행해주는 역할이었다. 그림(Picture)이 보는 것과 상상하는 것의 결합이라면, 사진은 오로지 보는 것을 그댈 옮길 뿐이니, 사진가의 고난은, ‘있으나 볼 수 없는 것’을 찾아 나서면서 시작되어, 그것을 ‘증명’해 주면서 끝이 난다. 따라서 사진의 의미란, 그 대상 앞에 ‘다가가 서는’ 작가의 행위 태도와 이를 가능케 하는 선험적인 의지의 합과 동등하다. 무엇을 볼 것인가를 계상하고, 어떤 것을 가져다 증명 해 보일 것인가의 태도가 곧 사진가의 의식이자 의지일 터이다. 따라서 사진은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 1921~1971))의 말처럼 “사진가가 그렇게 보여주어야 비로소 사람들이 그런 장면이 있음을 알 수 있을 때” 제 생명을 얻는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매우 각별하다. 단지 아름답거나 그 쓰임새가 도탑고 활발해서만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기상을 이야기할 때, 혹은 흘러간 역사 속 고난을 단적으로 비유할 때 쓰일 만큼 가깝고도 정신적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의 산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소나무다.

김명운도 지금 소나무에 천착해 있다.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산을 오르면서 그가 ‘발견/발명’ 해낸 소재는 소나무와 ‘돌/바위’ 이다. 그가 수직으로 고난의 산행을 감내하면서 찾아가는 곳은 우리가 아는 기상 푸른 우람한 소나무 곁이 아니다. 태초에 용암이 솟구쳐 오르면서 형성된 드높은 바위와 그 바위를 뚫고 오른 또 다른 바위가 만들어 낸 기묘한 형상의 산 정상에서 만나는 애끓는 자태의 소나무다. 그는 그곳에서 생명 기원(紀元)의 정점을 향한 꿈을 꾼다. 나무와 돌은 자연이기도 하려니와 지정학적 환경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이곳의 나무와 먼 이국의 나무가 다른 이유이며, 이곳의 돌과 저곳 돌의 성분이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모습도 다르고 풍파를 견디며 가꾸어온 자태 역시 나무와 돌은 ‘장소-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장소를 대변하고 나아가 그 의미를 확성(擴聲)한다. 이 특별한 장소에 작가가 다가가는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소나무와 바위를 만난다. 때로는 자신의 몸에 밧줄을 묶고 돌벽에 매달려 허공을 포함한 대상에 다가가면서 카메라 앵글의 수평과 수직을 고민한다. 과거에도 많은 사진가가 진기한 풍광이나 장면을 촬영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거나 고난을 자처하였다. 심지어 전쟁터를 누비며 목숨을 건 촬영을 하기도 한다. 사진이 가진 숙명 즉 그 앞에 서야 비로소 ‘작업/촬영’ 이 가능하기 때문일 터이다. 김명운 역시 그러하다. 산을 오르고 바위를 타면서 그 앞에 서고자 기(氣)를 쓰고 있다.

나무는 본디 땅에서 기원하여 하늘을 향한다. 즉 수직으로 위를 향해 자라면서 자연의 중력을 거스르고, 자라난 잎이 본체를 떠나 땅에 이르러 뿌리에 닿으면 다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다. 그러나 작가가 다가간 소나무는 탄생과 자람에 가로도 세로도 없다. 그저 틈 있는 어느 곳에 씨앗을 머금고 해를 향해 가지를 뻗는다. 거기에 바람과 비와 건조한 공기는 수평의 바위틈에서 수직의 상승을 허락하지 않는다. 온 자연이 그런 것처럼 곡선의 각(角)만이 가지에 스며들 뿐이다. 그곳 소나무의 생장은 때로 바위를 비집고 밖으로 품어 함께 한 몸이 되기도 한다. (사진 3) 이처럼 기이한 자태의 형상에 김명운의 시선이 머문 것이다.

김명운의 이번 작업은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장면이 아니다. 그것은 풍경이면서 정물인 어떤 ‘사건’의 한 단면이다. 그가 만난 장면은, 만남으로 인한 결과라기보다, 그 장면에까지 다가가는 과정이며 그것이 바로 그의 사진(寫眞)이라 할 수 있겠다. 이미 그의 의식 속에 정착해 있는 소나무의 자태는 일회적 경험이 만들어 낸 형상이 아니다. 그 역시 초기 사진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상을 찾아 나서면서 확인하고 결정해 의식 속에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만나기를 반복하고 숙고하면서 대상이 ‘이미 그러함’에 자신의 미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러니까 찾아낸 대상이 함유한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앵글을 형성하였다. 그런 연유로 그의 소나무는 작고, 기묘하며, 바위와 함께한다. 바위는 새로운 기표(記標)다. 보통 사진가는 자신이 찾아낸 대상을 강조하기 위해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할 터인데, 김명운은 소나무를 바위와 병치시키고, 그 바위와 함께 소나무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사진 4)

이 작업을 김명운은 산을 오르는 ‘과(過)/도(道)’ 정(程)에서 이루어내었다. 그가 험한 산의 정상을 향해 오르면서 희망한 것은, 찾아가 만날 소나무와 바위와 먼 산의 음영이 잘 어우러지도록 구성하는 것도 있겠지만, 작가 자신에게 더욱 간절했던 것은 ‘그것/대상’ 이 ‘사라지지/파괴되지’ 않는 것이며, 그 기묘한 형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기원을 탐색하는 것이다. (사진 5) 따라서 그의 사진에는 드라마틱한 기술적 솜씨가 배제되어있다. 높고 험한 산을 올라 ‘기/특’ 이한 대상을 채집하는 작업에는 유혹이 뒤따른다. 기왕에 오른 산이자 다시 오기 어려운 곳이기에 더 다양한 작업을 한 번에 더 많이 수행하려는 욕심 말이다. 하지만 김명운의 작업은 대상이 ‘이미 그런 것’에 주안점이 있으며, 그 형상이 자연스레 기호가 되어 역사적 혹은 민족적 의미를 갖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병치(倂置)된 두 대상을 ‘병치-혼융’ 해서 말이다. 이제 우리 관람자는 그의 ‘시선/작업’이 뿜어내는 고고한 분위기를 품어가며, 문득 다른 방식으로 상상해야 함을 고민해야 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