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

1999년과 2000년은 단순히 해가 바뀐다는 의미를 넘어서 천년의 시작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엄청나게 다른 의미였다. 새 천년의 시작, 밀레니엄의 전환점에서 지구촌은 새로운 기대와 전망으로 출렁거렸다. 실질적으로도 2천년의 시작은 혁명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이라는 낯선 환경으로 접어든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가장 많이 거론된 단어가 ‘디지털’이었고, 생경한 이 단어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디지털이 무엇인지, 그것이 가져다줄 일상의 변화는 무엇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동시대를 가장 예민하게 반영하기 마련인 예술 분야에서도 디지털의 등장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로였다. 월간 「사진예술」의 두 번째 10년은 바로 이 시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의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와 맞물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월간 「사진예술」 20주년 기념식 VIP 케이크 커팅
사진 왼쪽부터 고 김한용 선생, 뉴욕대 프라이어 교수, 이명동 초대발행인, 원로 사진가 정범태 선생, 한정식 교수, 김녕만 2대 발행인



 

월간 「사진예술」 20주년 행사 ‘「사진예술」 표지 전시회’

 
「사진예술」의 편집 디자인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기술적 방법의 변화만이 아니라 마인드의 변화를 가져왔다. 아날로그 방식일 때는 사진가들이 잡지에 실릴 원고를 프린트된 사진으로 갖고 오거나 슬라이드 필름을 들고 찾아오고, 필진들은 원고지에 쓴 글을 우편으로 보내거나 직접 갖고 오거나 기자들이 원고를 받으러 다녔다. 즉, 대부분의 콘텐츠들이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면서 생성되었다. 편집과 인쇄 과정도 마찬가지여서 활자를 대지에 따다 붙였고 인쇄소 직원들이 편집된 대지를 받으러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복잡하고 불편하며, 일의 속도가 나지 않는 이러한 아날로그 방식은 매킨토시 컴퓨터의 등장과 인터넷의 발달로 불과 몇 년 사이에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디지털 시대에 진입하면서 일의 속도와 편리함은 증진되었지만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 사고의 변화가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사진 분야에서도 그러했다. 우선 변화를 거부하는 측에서는 “디지털 사진이 사진인가?”라며 필름으로 촬영하고 암실 작업을 거치는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했고, 새로운 문명의 이기(利器)를 빠르게 습득하는 측에서는 도도한 새로운 물결에 대응하지 못하는 무지라고 말했다.


그런 와중에 본지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초대 발행인인 이명동 선생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변화를 꾀할 후임으로 「동아일보」 후배 사진기자인 김녕만에게 발행인의 배턴을 넘긴 것이다. 2001년 3월 2일, 김녕만 2대 발행인의 취임식이 열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이명동 선생의 결단에 맞추어 김녕만 발행인이 취임하면서 「사진예술」은 본격적으로 디지털 환경에 접어들었다. 잡지 제작 자체도 디지털 방식으로 완전히 전환하였거니와 사진가들에게도 ‘디지털’이 기술적이고 방법론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진표현으로 새로운 영역을 창조해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제시했다. 그와 더불어 인터넷 환경으로 점점 좁아지는 지구촌에서 세계적인 사진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음을 기사화 하면서 국내 작가들을 독려하였다.
 

디지털 섹션을 신설하여 디지털 마인드 전파
 



2001년 5월호 디지털 사진 강좌

 

2001년 5월호에 “디지털 사진강좌”를 처음으로 연재하면서 디지털 관련 기사들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사실 90년대 중반부터 디지털카메라가 발매되기 시작했으나 카메라의 기술적 수준이 필름 카메라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터다. 그러나 2천년에 접어들면서 디지털카메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고 유저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대세를 형성할 기세였다.


 

2002년 5월호 디지털 섹션, 디지털 사진 노하우

 
 
이런 흐름을 읽은 본지는 2001년 8월호부터는 아예 디지털 섹션을 따로 구성하여 그 섹션 안에 세분화 한 서너 개의 디지털 사진 관련 기사를 매달 연재했다. 2001년 5월호에 처음으로 디지털 사진강좌를 연재한 김종태는 서라벌예대 사진과를 졸업하고 사진가로 활동하다가 1993년에 미국으로 이민, 뉴욕에서 활동하면서 당시로써는 첨단인 “디지털 암실”에 대한 강의를 실었다. 


 


2001년 8월호 아남 니콘 디지털카메라



2001년 9월호 한국후지필름 디지털카메라

 
한편 2001년 8월호에서는 처음으로 디지털카메라를 소개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를 반영한 결과다. 니콘에서 1996년부터 발매를 시작한 쿨픽스100부터 2001년 여름에 발매 예정인 D1H까지 약 20종의 카메라를 소개했고, 9월호에는 한국후지필름의 디지털카메라 소개와 함께 디지털카메라를 잘 고르는 법도 실었다. 10월호에는 기존의 디지털 강좌와 중앙대 하동환 교수의 디지털 세상, LG 캐논 디지털카메라 소개를 실었는데 그 후 「사진예술」 20주년이 되기까지 매달 3~4개의 기사를 묶어 디지털 섹션을 구성했다. 


특히 2001년 12월호에는 서울예술대 황선구 교수의 “디지털 칼럼”이라는 연재를 통하여 디지털 마인드부터 차근차근 디지털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연재가 시작되었다. 디지털 사진에 관한 필자들은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교수들로서 그들은 첨단과학의 산물인 디지털 전도사의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디지털 사진의 필진은 김종태, 황선구, 하동환, 김성민, 임준형 등이었다. 본지는 다양한 필자들을 통하여 디지털 사진에 관한 이론적 탐구, 디지털 사진의 기법, 디지털카메라의 종류와 성능, 해외 디지털 사진의 동향 등 다양한 관점에서 디지털 사진을 설명하고 디지털 사진에 접근하는 길을 제시하였다.
  
 

국제무대에서 통하는 스타 작가의 탄생  





2000년 5월호 Houston FotoFest 2000
 

2000년은 한국사진의 국제무대 진출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해가 되었다. 2000년 3월 3일부터 한 달간 미국 휴스턴에서 열린 <휴스턴 포토페스트 2000>에 드디어 한국사진가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 현대사진가들”이란 전시기획으로 한국의 사진가 10명이 참여한 것. 1998년에 시카고에서 “이화와 동화”라는 타이틀 아래 한국의 사진과 비디오 영상이 선보인 적이 있었지만, 영향력을 따져볼 때 <휴스턴 포토페스트>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큐레이터, 평론가, 기자, 미술관장 등이 참석하는 국제적인 사진 행사에 한국의 현대 사진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본격적인 기회는 처음이었다. 이러한 기회를 이끌어낸 구본창을 비롯하여 김석중(아타), 민병헌, 박홍천, 배병우, 오형근, 이갑철, 이상일, 이정진, 정주하 10명의 사진가들이 참여하여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2003년 6월호 김아타
 

기획자인 구본창은 2000년 5월호에 실린 참가 후기에서 “이러한 전시 한 번으로 한국사진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번이 큰 발걸음을 내딛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하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전시에서 몇몇 작가들은 다음 전시에 초대되기도 하고 작품이 구매되기도 했으며 특히 김아타의 경우,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는 아주 중요한 기회를 맞았다. 미국의 영향력 있는 사진잡지 「아파추어」 편집장과 만남을 계기로 2004년에 아파추어 파운데이션에서 “뮤지엄 프로젝트”가 사진집으로 출간되었고, 2006년 뉴욕 ICP 개인전으로 이어지면서 「뉴욕타임즈」에 인터뷰 기사가 실리는 등 큰 주목을 받았다. 이에 앞서 2002년에는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사진가가 한국 대표로 선정되는 경사를 맞았고 2009년에는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초대전>에 초청되기도 했다.


 

 
한편, 미국 <휴스턴 포토페스트2000>의 긍정적인 반응에 이어 그해 8월 24일부터 10월 8일까지 덴마크에서 열린 <오덴제 트리엔날레>에서도 한국작가 6명의 초대전이 열렸다. “느림”이란 전시주제 아래 구본창, 김아타, 박홍천, 배병우, 이정진, 주명덕 작가가 참여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2000년은 한국사진이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로 진출한 원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이 방아쇠를 잡아당긴 가장 큰 공로자는 구본창이다. 독일에서 유학하고 1985년에 귀국한 구본창은 사진 해외유학파 1세대로 한국사진의 흐름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일군 해외 인적 네트워크, 소통 가능한 외국어 실력, 꼼꼼하고 성실한 일처리로 해외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가이면서 기획자로 인정받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자신만이 아니라 한국사진의 해외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1년 10월호 ‘제6회 헤르텐 국제사진전’에 특별 초청된 “한국 사진의 한세기”

 
 
한편, 2001년 9월 독일 중북부 지방의 헤르텐에서 열린 <제6회 헤르텐 국제사진전>에서는 “한국사진의 한 세기-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이미지”라는 제목의 사진전이 열려 한국사진의 역사를 총 정리하는 450점으로 구성된 전시와 영문 도록을 출간하여 배포하고 판매했다. 2000년대부터 우리 작가들이 활발하게 해외에서 전시에 초대되고 작품이 판매되는 성과를 통하여 구본창, 김아타, 배병우, 이정진 등 국제적인 스타 작가가 탄생했다. 

 
 
 
2006년 5월호 21세기 한국사진, 세계를 겨냥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진계에 커다란 자극이 되고 후배 사진가들의 희망이 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본지 2006년 5월호에서는 “21세기 한국사진, 세계를 겨냥하다”란 특집기사를 마련하여 젊은 작가들의 해외 진출 노하우, 미국 사진 시장의 접근 방법, 유럽 무대로 진입하기 위한 준비, 일본 사진계 현황 등을 현장을 경험한 필자들을 통해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였다.





2007년 1월호 2007 해외진출 가이드


 
2007년 1월호에서도 “2007 해외진출가이드”라는 한성필 객원기자의 글을 통해 해외 진출을 시도할 수 있는 해외의 기금, 공모 및 리뷰 일정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이어 4월호에서도 “세계적인 사진가가 되는 길”이란 특집을 통하여 한국사진학회 세미나 “국제 사진계의 흐름과 진출 방안”의 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이 기사에서는 국제적인 사진페스티벌과 아트페어, 포트폴리오 리뷰, 레지던스 등 구체적인 내용까지 싣고 있다.
 

나도 작품을 팔 수 있다
 



2007년 6월호 어떤 사진이 얼마에 판매되는가
 

2007년 6월호에는 “어떤 사진이 얼마에 판매되는가?”라는 기사가 눈길을 끈다. 물론 해외 사진 가격이긴 하지만 누구의 작품이 얼마에 판매되었는지 구체적인 낙찰 가격이 나열됨으로써 사진판매가 현실적으로 다가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아트페어에 사진이 출품되면서 사진의 판매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주고 “팔리는 작품에는 이유가 있다”며 필자 최유진은 국내 작가 중에서 잘 팔리는 작가들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2008년 4월호 아트마켓을 말한다
 

2008년 4월호에서도 특집으로 “아트마켓을 말한다”가 실렸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 사진가들이 알아야 할 시장 정보를 소개하고 국내외의 미술품 경매 사이트를 소개했다(도판12). 이어 5월호에는 “당신의 이미지도 팔릴 수 있다”는 기획 기사를 실었는데, 스탁포토 에이전시를 소개하며 아마추어 사진가의 이미지도 팔릴 수 있다는 희소식을 전한다.

 
2008년 5월호 “당신의 사진 이미지도 팔릴 수 있다”


 
또한 세계적인 이미지 에이전시의 사이트를 소개하여 직접 도전해볼 수 있도록 했는데, 스탁포토는 디지털 시대여서 가능해진 일이라고 하겠다.
 

<동강국제사진축제>, <대구사진비엔날레>등 풍성한 사진 이벤트

 
우리나라 작가들의 해외로 향한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국내에서도 해외 작가들과 교류의 장이 되는 사진축제와 비엔날레 등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맨 처음에 출발한 국제적인 페스티벌은 <동강국제사진축제>였다. 이 축제의 탄생에는 본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2000년 9월호 히가시가와 국제사진 페스티벌

 

먼저, 2000년 9월호에 윤주영의 일본 “히카시카와 국제사진페스티벌을 보고”라는 글이 실렸다. 일본 북해도의 아주 작은 마을인 히카시카와에서 국제적인 사진페스티벌이 열리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는 윤주영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 축제를 소개하는 후기를 싣자고 제안한 것. 이어 10월호 ‘편집장의 글’에 “일본인들의 저력”이란 제목의 칼럼을 쓰면서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도 국제적인 축제를 하는데 우리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적은 필자는 이 잡지를 편지와 함께 김진선 강원도 도지사에게 보냈다. 도지사의 취미가 사진이라는 것을 알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사진축제를 제의해본 것. 이에 대해 도지사는 선뜻 논의해보자는 답을 주었고 곧이어 서울 코리아나 호텔에서 김진선 지사와 춘천의 심상만 작가, 서울에서 윤주영, 김승곤, 김녕만 그리고 필자가 만나 사진축제에 대한 논의를 했고 긍정적인 답을 얻었다.


 
2002년 8월호 제1회 동강국제사진축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김진선 지사는 박물관의 도시인 강원도 영월에 이 아이디어를 주었고, 영월은 발 빠르게 2001년에 ‘사진마을’임을 선포하고 2002년 여름에 <제1회 동강국제사진축제>를 열었다. 초대 운영위원장은 김승곤 평론가가 맡았고 제1회 동강사진상은 최광호 작가에게 돌아갔. 군청 바로 옆 부지에 동강사진박물관 건물이 지어졌고 해마다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기 시작했다. 


첫 시작이 일본 히카시카와 축제에서 벤치마킹한 것이었으므로 일본과 교류가 활발했다. 일본의 평론가가 동강해외작가상 심사위원으로 왕래하면서 2005년에는 당시 본지 발행인이었던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녕만 작가가 히카시카와 사진축제에서 해외작가상을 받기도 했다. 



 

2008년 10월호 대구사진비엔날레 2008


 
한편 <동강국제사진축제>에 이어 2006년에는 대구에서 사진비엔날레가 시작되었고 전주와 서울에서도 해마다 국제사진축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는 국내에서 해외로, 해외에서 국내로 상호작용하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면서 한국사진이 세계로 나아가는데 기여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명동 사진상”의 의미


2000년 1월호 제1회 이명동사진상 수상자 김희중


 
동강사진축제가 국내에서 국제사진축제를 견인해냈듯이 “이명동 사진상” 또한 사진상 시상에서 선도적 역할을 했다. 이 상은 본지를 창간한 이명동 선생이 80세가 되는 1999년에 사진인들이 몇 개월 만에 약 7천만 원에 이르는 기금을 마련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기금으로 “이명동 사진상”은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해마다 시상식을 열고 한국사진의 발전에 공이 큰 사진인 한 명을 선정하여 시상식을 열었다.
제1회 수상자 김희중(에드워드 김)에 이어 구본창, 김기찬, 김아타, 김승곤, 이갑철, 양종훈까지 일곱 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2002년 2월호 박건희문화재단 출범
 


2002년 8월호 한미문화예술재단 송영숙 이사장


 
그러는 동안 2002년에 박건희 문화재단이 출범하여 다음 작가상을 만들었고, 또 같은 해에 동강 사진상을, 2002년 6월에는 한미문화재단이 출범하여 한미사진미술관 개관으로 이어졌고 한미 사진상도 제정했다. 이밖에도 젊은 작가에게 주는 사진비평상 등, 다양한 성격의 작가상이 운영되었다. 이명동 사진상은 7회까지 수상자를 내고 막을 내렸지만 다양한 사진상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2000년대 10년은 한국사진의 전환기

 
이 기간의 잡지를 살펴보면 어떤 일의 전환점이 되는 특별한 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00년을 한국사진의 국제화 진출의 원년이라고 한다면 2001년은 본지에서 디지털 사진을 본격적으로 다루며 의식의 전환을 유도하기 시작한 해였다. 그리고 2002년은 한국사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해였다. 월드컵의 열기로 뜨거웠던 그해, 한국사진의 열기도 못지않게 뜨거웠다. 굵직한 굿 뉴스가 줄을 이었는데 <동강국제사진축제>, 박건희 문화재단, 한미사진문화재단 출범이 대표적이다.

 

2005년 5월호 찰나의 거장전





2004년 7월호 헬무트 뉴턴의 패션 누드 사진


2005년 2월호 Andreas Gursky & Thomas Struth



2007년 5월호 Martin Parr
 

2004년부터는 해외 유명 작가들의 한국전시가 시작되는데 대표적인 것은 2005년에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사진전>이었다. 그리고 헬무트 뉴턴, 안드레아 거스키&토마스 스트루스, 세계보도사진전, 매그넘 사진전(마틴 파 등), 랄프 깁슨, 베르나르 포콩, 마이클 케냐, 으젠느 앗제, 살가도 등 그동안 책으로만 알았던 유명 작가들의 전시를 국내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2007년부터는 아트 마켓에 대한 기사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이는 시장에 내놓을만한 사진가들이 등장했다는 의미인데,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몇몇 국내 작가들을 중심으로 사진 시장이 열리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의미 있는 것은 2008년 8월 15일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70일 동안 110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한국사진 60년전>이라는 대규모 사진전이 열렸다는 것이다. 미술관에서 외면 받던 사진이 당당히 국립현대미술관에 입성했고 그 후 서울시립미술관을 비롯한 큰 규모의 사립 미술관에서도 사진 기획전이 열리면서 사진이 컨템포러리 아트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과시하였다.
 

사진이 스스로 존재 이유를 증명해 보이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음을 느낀다. 많은 사진가들의 꾸준하고 성실한 작업과 이론가와 기획자들의 등장과 사진 인프라와 네트워크의 확장, 그리고 그들을 응원해온 사진 전문잡지, 사진 교육 등 모두의 노력이 집중되어 사진의 시대를 열어간 것이다. 사진 시장, 즉 아트마켓 부문만 제외하고는 오랫동안 사진인들이 소망해온 꿈은 거의 다 이루어진 10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