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은 팔십 평생 한국사진계의 발전을 위해 애써오신 故 이명동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자 후배들의 뜻을 모아 제정한 상으로서 우리 사진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그 성금으로 사진상을 만든 일은 일찍이 없던 뜻깊은 상입니다.



故 이명동 선생은 1920년 경북 성주 출생으로 보통학교 4학년 재학 시절 부터 사진촬영을 시작했습니다. 그후 사진에 심취하여 작품활동을 계속해오다가 본격적인 사진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한국전쟁 때는 기록사진가로 종군해 세 가지의 화랑 무공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1953년 전쟁이 끝나면서 중앙일보사에서 사진기자로 첫발을 내디뎌 1955년에는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자리를 옮기면서 보도사진가로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자유당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4·19 민주혁명을 기록한 그의 보도사진은 이제 살아있는 전설로 남게 되었습니다.
또한 선생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동아일보를 비롯한 여러 매체를 통해 리얼리즘만이 ‘사진의 본질’임을 일깨우는 날카로운 사진평론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국전에 사진부를 두어야 한다는 운동을 펼치면서 동아일보사가 ‘동아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사진살롱’을 창설하는 데에 산파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각 대학의 신문방송학과와 사진과에서 보도사진을 강의, 30여년간 대학의 사진교육에도 관여했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현직에서 물러나는 칠순에 월간 사진예술을 창간, 사진에 대한 끝없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명동 사진상」은 한마디로 지난 50년간 실로 초인적인 활동력으로 한국 사진계의 대부 역할을 해오신 이 선생의 업적이 후배들에게도 영원히 이어지도록 하는 가교가 될 것입니다.
한편 「이명동 사진상 」은 해마다 그 해에 한국 사진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한 사진계 인사중 한분을 심사위원들의 심의로 결정하게 되는데, 운영위원회에서는 이 상이 권위있고 명예로운 사진상으로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했지만, 안타깝게도 중단된 상황입니다.




제1회 이명동 사진상 수상자 김희중

김희중씨, 그는 자신의 자전 에세이집의 제목처럼 카메라를 통해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왔다. 중학교에 다니던 소년시절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이래 그에게 사진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었으며 사람과의 만남을 맺어준 언어였다.

김희중씨는 제1회 「이명동 사진상」을 수상했다. 아마 그에게 이 상은 그 어떤 상보다 감회가 깊었을 것이다. 소년시절 처음 사진을 배울 때 진정한 사진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던 첫 스승이 바로 이명동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온 세계를 누비며 성공한 사진가로서의 삶을 살아온 그가 45년이 지난 지금 사진으로 만난 첫번째 스승으로부터 받는 사진상의 감회는 어떤 것일까?
“이제까지 많은 상을 받아왔지만 이번 수상의 의미는 특별합니다. 이명동 선생과의 개인적인 인연도 그러하지만, 이 상은 이명동 선생이 평생 한국 사진계를 위해 헌신해오신 정신을 물려받아 한국 사진계의 발전에 공헌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김희중씨는 아직도 우리에게 에드워드 김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을 정도로 한국 사진계와 거리가 있었다. 대학에 다니다 유학을 떠난 1961년부터 영구 귀국한 1985년까지 그는 미국에서 포토저널리즘을 공부한 후 세계 유수의 잡지인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사진기자와 편집장으로 활약했다. 




제2회 이명동 사진상 수상자 구본창
 
 
구본창씨는 아름답다운 것을 찾아내는 능력이 남다른 것 같다. 우연히 스웨덴에서 만나게 되어 한나절 동안 스톡홀름의 올드 타운을 함께 눈요기한 적이 있는데 그는 쇼윈도 너머 작은 물건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작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보면 거기에는 건질만한(?) 그 무엇이 한구석에 숨어있곤 했다. 그것이 오래된 티스푼이든 낡은 시계든 아니면 그림엽서든 간에 그의 손이 그것을 집어들면 왠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구본창씨만의 독특한 심미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도 그랬다. 많
은 작가들이 아직도 해오던 사진을 그대로 답습하여 보여주고 있던 80년대 후반에, 그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세련된 사진을 선보였다. 디자인적인 감각이 물씬 풍기는 그의 사진들은 ‘구본창’ 이라는 명품 브랜드를 만들면서 단숨에 그를 인기 작가로 떠오르게 했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사진을 잘 찍는, 혹은 자신의 외길을 고집하는 훌륭한 사진가는 있었을지라도 아마 대중 스타처럼 인기있는 사진가는 구본창씨가 처음일 것이다.





제3회 이명동 사진상 수상자 김기찬
그의 이름 앞에는 '골목안 풍경'의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30여년간 서민들의 공간인 골목을 촬영해 사진집 '골목안 풍경'을 5권, '개가 있는 따뜻한 골목'이란 사진집까지 합치면 여섯 권의 골목 책을 냈으니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로는 조금의 과장도 없다.
사진가 김기찬과 그의 사진작품도 그러하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소박하고 진실하다. 그래서 그가 진가를 인정받는 데에 걸린 시간이 남보다 길었는지도 모른다.

화려함이나 현란한 기교보다는 진솔한 마음을 담은 그의 사진들은 골동품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를 더한다.
2002년 제3회 이명동 사진상의 주인공이 된 김기찬씨. 좋은 상을 받게 되어 기쁘면서도 쑥스럽다고 말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별로 상을 받아본 적이 없어 그런 일에 익숙치 못해서 그런가보라고 덧붙인다.
그렇게 오랜 세월 사진을 찍어오면서도 그는 늘 아마추어 사진가라는 말로 전면에서 비켜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6년에 처음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후 36년간 그의 관심은 늘 서민들의 삶에 있었고, 그의 일관된 사진작업은 그를 아마추어라 부를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다만, 36년 전과 마찬가지로 목적 없이 사진이 좋아서 사진을 찍는다는 순수성에서는 변함이 없는 아마추어다.



제4회 이명동 사진상 수상자 김아타

제4회 이명동 사진상에 김아타씨가 선정되었다. 김아타씨는 2002년에는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선정되었고 미국의 아파추어지에 특집으로 소개되는 등 국내외에 사진가로서 그 영역을 확장하는데에 선도적 역할을 해온 점이 인정돼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이명동 선생님은 우리나라 사진역사가 아닙니까? 그런 선생님의 상을 받게 되어 영광스럽고 정말 기쁩니다.”
제4회 이명동 사진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아타씨는 먼저 커다란 웃음소리로 그의 기쁨을 대신했다. 이미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사진가로 부상했고 그에 관한 특집기사도 여러 번 다루어진 바 있지만, 그는 외롭게 작업하는 작가로서 이러한 격려와 애정이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5년 전 3년 전만 해도 우리 사진이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 아니 사진가로서 작업만 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이었습니까? 그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계속 해왔고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 장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20년 작가 경력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을 꼽아보라는 짓궂은 질문에 그는 서슴없이 그렇게 답했다. 최근 2년 사이에 그의 외국전시가 부쩍 늘고 미국에서 사진이 팔리고 있지만 “내가 내 세계를 확실하게 추구해나가면 당연히 올 수 있는 결과”이기에 그 결과보다 그것을 만들어낸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작품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살아가는데 있어 생각을 크게 가지려고 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우리의 지평을 열어 가는 것, 세계무대에서 한국사진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것입니다.”



제5회 이명동 사진상 수상자 김승곤

이 땅에서 사진평론을 말할 때는 아직은 채 여물지 않은 나락을 깨무는 느낌이다. 일백년 한국사진의 역사에서 평론이 하나의 독립적 분야로서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진이 그 가치와 존재 이유를 아직까지도 자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대구에 근거지를 두었던 구왕삼이라는 사진평론가가 있었고, 서울에 이명동이라는 사진평론가가 있었으며, 역시 서울에 최병덕이라는 사진평론가, 전주에 권진희라는 사진평론가가 있었다고 역사는 말한다. 그러나 인접 분야에서 거론되어지는 평론가의 모습과 같았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들이 자신의 시대 속에서 자신의 관점에 따라 사진적 담론 행위를 펼쳤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진교육기관 하나 없는 척박한 토양과 사진 이론서 하나 변변치 못한 상황에서 그들은 신문지상을 통해서, 혹은 미약하지만 사진저널을 통해서 미명의 한국사진을 말하고, 예술을 말하고, 미학을 말했다. 특히 이명동은 가장 강력하게 동아일보라는 확실한 저널을 통해서 한국사진의 당면 문제들을 공론화하고 이슈화했던 사진평론가다. 우리가 평론이 반드시 논문체계여야 할 이유도 없고, 또 반드시 장문의 분석적, 비평적 논리적 텍스트여야 할 필요성이 없다고 한다면 이명동을 비롯한 그 시대 진보적 인사들이 펼친 평론 행위는 비록 자칭, 타칭이었을지언정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사진평론가의 위치를 마땅히 부여받아야 한다.

그러나 한발짝 뒤로 물러서서 냉정하게 평론 혹은 비평이라는 담론 체계가 자칭, 타칭으로 말해질 수 없는 영역이고, 또 담론 행위가 반드시 학문과 논리 그리고 전문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어떤 테리토리(territory)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80년대 이전까지 이 땅에서 사진평론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즉 평론 및 비평 행위를 고도의 이론적 토대를 갖춘 이론 전공자, 혹은 그에 견줄만한 학문적 과정의 이수자가 전문적으로 행한 담론 행위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때까지 단 한명의 평론가도 갖지 못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우리는 불모의 아카데미 안에서 비평적 담론과 텍스트 생산을 위한 전문적인 학습 기회란 그저 꿈이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평론 행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학문적 성과로서 자리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다.



제6회 이명동 사진상 수상자 “이갑철”

참 평범하다. 그런데 참 독특하다. 이갑철, 그와 이야기하면서 느낀 상반된 인상이다. 어질게 보이는 눈매와 웃음 사이로 착한 성품이 배어나오는데 한편으로는 아무리 밀어도 뒤로 밀리지 않을 것 같은 부동의 힘이 느껴진다. ‘충돌과 반동’이라는 그의 사진집 제목처럼 그는 부딪치는 대상을 그의 내면으로 빨아들이고 거기에 다시 그의 미묘한 에너지를 실어 강하게 내뿜어버리는 것 같다.
올해의 ‘이명동 사진상’ 수상자인 이갑철(47세). 신구대학 사진과 졸업, 계몽사와 웅진출판사에서 각각 이 삼년씩 일한 경력, 사회적으로 공인(?) 받을 경력은 별로 없는데 마치 강호의 고수처럼 그에게서는 원초적이고 강렬하고 단단한 그 무엇이 느껴진다. 화려한 보검을 쥐고 있지 않아도, 휘하에 기라성 같은 부하를 거느리지 않아도 혼자서 당당할 수 있는 그의 저력은 차라리 평범함에 있는 것 같다.
“사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사진은 내가 사는 한 방법일 뿐이에요.”
“사진을 하면서 삶의 기쁨을 느끼니까 사진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평생 사진을 하게 될지 나도 답할 수 없어요. 사진보다 더 기쁨을 주는 게 있다면 그걸 하게 될 테니까요.”
그의 고백들은 거창하지 않은데도 그가 작은 거인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