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5월호로 출발, 「사진예술」의 새로운 방향성 제시


1989년은 마침 프랑스에서 사진술이 공표된 지 15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 30년 이상 견고하던 리얼리즘 사진이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는 시대적 흐름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한 전환의 시기였다. 이러한 조짐은 해외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소수 사진가들에 의해 실험적 사진들이 전시되는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시기에 월간 「사진예술」은 한국사진의 다양성과 세계화를 목표로 두고 창간되었다. 한국 사진이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국제무대에 진출하고, 다양하게 열린 담론을 형성하여 사진만이 갖고 있는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확립해보자는 취지로 출발한 것이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그동안 한국사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10년 단위로 짚어본다.



「사진예술」 탄생의 주역, 이명동 발행인

 
 
좌측부터 「사진예술」을 창간한 이명동 발행인, <발간사에 대신하여 독자에게 드리는 글>, <창간을 축하합니다>
                                                  

월간 「사진예술」을 창간한 이명동 발행인의 일생은 한국사진사의 산 역사다. 1920년 출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100세. 일제강점기에 경북 성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소학교 시절부터 학교 가는 길목에 자리한 일본인 카메라 상점 유리창 너머로 홀린 듯 카메라를 바라보던 소년이었다. 그러기를 몇 달, 어느 날 몰래 아버지의 소 판 돈을 들고 가게로 달려가 덜컥 카메라를 사고야 말았다. 어린아이의 큰돈을 수상쩍게 여긴 일본인 주인은 “한 번 사면 물러주지 않는다.”는 다짐을 몇 번이나 했지만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아이에게 카메라를 쥐여주었고, 이 사건은 한 소년의 생을 결정짓는다. 

 
그 일은 또한 1948년 정부수립, 1950년 한국전쟁, 그 이후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말로, 4.19 등 굵직한 20세기 역사의 현장을 카메라와 함께 지켜보고 기록하면서 사진 불모지에 한국사진의 깃발을 들어 올리는데 앞장서는 사진가 이명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는 한국전쟁 종군, 동아일보 사진기자, 사진평론가, 포토저널리즘 강의, 동아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사진살롱 창설, 국전에 사진부문 신설 등, 한국사진사에 한 획을 긋는 문화운동을 주도했다.

 
1950년대와 60년대, 타 분야 예술가들이 “사진이 예술이냐”고 폄하할 때 그는 동아일보 지면을 빌어 일당백으로 맞서며 한국사진의 영토를 한 뼘이라도 확보하려는 전면전을 벌였다. 평생에 걸쳐 사진과 관련된 거의 전 분야에서 열성적으로 활동을 했는데, 그 모든 활동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아무도 사진을 끼워주지 않으려던 문화예술계에서 사진의 지분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다.
 

칠십 평생을 바친 힘든 과정의 끝에서 월간 「사진예술」이 탄생했다. 사진전문지다운 잡지를 만들겠다는 결단을 한 것이다. 감히 아버지의 재산목록 1호인 소 판 돈을 카메라와 바꾼 시골 소년의 겁 없는 행동도 그렇지만 ‘이 나이에 무슨’이라며 뒤로 물러설 일흔 살에 잡지를 창간한 용기도 그에 못지않은 거사였다.


“나 혼자였으면 못했을 거예요. 주위에서 힘을 모아줘 가능했지요.” 이명동 초대발행인의 회고는 겸양만은 아니다. 전문적인 잡지를 원했던 프로 사진가들이 응원을 아끼지 않았고 평생 쌓아온 사진계 인맥이 이를 뒷받침했다. 당시 가까운 분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으기도 했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운 분들이 많았다. 임응식 선생을 위시한 원로 사진가들과 육명심, 한정식, 홍순태 교수, 동아일보 후배 사진기자들과 사진학과에서 강의를 들었던 제자들, 동아일보 사진동우회원들 등 각계에서 뜻을 같이하면서 창간호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다양성과 국제화에 초점


창간호를 낸 1989년은 극으로 치달았던 민주화의 요구와 갈망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경제호황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그 어느 시대보다 다양해지고 풍요로워지던 때였다. 1980년대 초반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로 해외유학과 해외여행 등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국제화는 시대적인 요구가 되었다. 문화예술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세계 예술동향과 예술시장에 대한 호기심과 진출 욕구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따라서 「사진예술」은 다양성과 국제화라는 사진계의 두 가지 갈증을 풀어주는 매체를 표방하고 나섰다. 당시 독자들의 기대가 뜨거웠음을 “창간을 축하한다”는 글에서 엿볼 수 있다. 국내외에서, 서울과 지방에서 25명의 사진 관계자들이 투고한 글에서는 전문성 있는 잡지, 새로운 사진 동향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며 사진가를 북돋워주는 잡지, 작품만이 아니라 이론적 무장을 시켜줄 것, 그리고 어려운 잡지시장에서 반드시 오래 살아남아 권위 있는 잡지가 되어줄 것 등을 원하고 있다.



 

<현대사진의 이해> 한정식 (1989년 5월)



<현대사진의 방향> 홍순태 (1991년 5월)
 
 
 
이러한 요구는 창간호 목차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현대사진의 이해”(글/한정식), “현대사진의 방향”(글/홍순태)이라는 연재를 통해 심도 있는 사진이론을 소개했다. 또한 80년대부터 시작된 해외 사진유학에 대한 조언을 듣고자 “나의 사진 유학기”를 통해 인터넷 검색이 없던 당시에 사진 유학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고자 했다. 그리고 해외 사진가들의 작품을 분석하고 소개하는 기사를 실어, 현재 우리의 위치가 어느 지점인지 스스로 가늠해보는 기회를 갖도록 유도했다.


그밖에도 각 부문에서 전문적인 프로페셔널 사진가를 소개하는 “이런 사람”(창간호에는 문화재 전문사진가 한석홍), “이달의 테마”,  “오늘의 작가” 등을 통해 폭넓고 다양한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예술사진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포토다큐멘터리”를 한 편씩 연재했고, 흥미로운 읽을거리로 “사진기자 수첩”을 실었다. 한편, 아마추어 사진가들에 대한 배려로는 “초급사진 강좌”, “중급사진 강좌”, “독자사진콘테스트”, “사진잡학사전” 등을 실었다. 창간호부터 이론과 작품, 프로와 아마추어를 수용하는 넓고 깊은 잡지를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창간호 마지막 페이지에서는 “사진예술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편집 방향을 밝히고 있다.


1. 연령에 관계없이 사진이라는 공통언어만 갖고 있으면 대화가 통합니다.
2. 굳이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3. 사진의 각 분야를 수용하는 큰 그릇이 되겠습니다.
4. 보고 버리지 않고 두고 읽는 큰 잡지를 만들고자 합니다.



사진의 모든 것을 담는 큰 그릇이 될 것을 다짐하는 창간호가 출발한 것이다.

 


사진이론에 중점을 두다


 
「사진예술」이 전문지를 표방하고 출발한 만큼, 창간호부터 10년간 가장 공을 들인 부분 중 하나가 사진이론의 확립이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사진은 ‘찍을’ 뿐, ‘공부’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진가는 많지 않았다. 사진 전문 서적도 ‘사진을 잘 찍는 법’을 말하는 책이 대부분이었고, 사진미학이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실 원서를 읽지 않는다면 사진이론을 공부할 방법도 없는 실정이었다.


 

<사진강좌> 이완교 (1990년 2월)



<미국의 현대사진> 김남진 (1991년 4월)



<포토 저널리즘> 이기명 (1996년 7월)
 

이론의 부재가 비평의 부재를 낳고 이것이 사진의 발전을 가로막고 타 분야 예술계에서 홀대받는 요인임을 일찍부터 간파했던 이명동 발행인은 학계의 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필진을 구성하여 원서를 번역하거나 본인의 이론을 피력하는 연재물을 실었다. 앞에서 소개한 당시 중앙대 사진학과 한정식 교수의 “현대사진의 이해”와 신구대 사진과 홍순태 교수의 “현대사진의 방향” 외에도 이완교 선생의 “유명 사진가들의 사진사상과 암실기법”을 연재했다. 또한, 창간 1주년이 된 1990년 5월호부터 김남진이 번역한 “미국의 사진사”의 연재가 시작되었고 16회 연재에 이어 “현대사진사”, “현대사진 입문” 등 수년간에 걸쳐 꾸준히 외국서적을 번역 연재하였다. 또한 번역 연재물로 이기명의 “포토저널리즘”도 25회까지 이어졌다. 사진이론에 목말라했던 독자들에게 단비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사진비평> 진동선 (1994년 8월)


한편, 평론이 부재한 사진계에서 평론가를 키우자는 발상으로 1991년에 “사진평론상”을 공모했다. 그러나 당시 빈약한 사진이론의 현실을 보여주듯이 응모작은 매년 5편 내외에 불과하여 1회에서는 당선자를 배출하지 못했고 1993년 제2회 사진평론상을 통해 진동선과 홍경, 두 명의 가작 당선자를 냈다. 그 이후 진동선은 미국으로 사진유학을 떠났고, 지난 25년 동안 수많은 글을 쓰며 우리 사진계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데에 일조했다. 


월간 「사진예술」에서 데뷔한 진동선은 미국 유학 중에도 꾸준히 기고하였고 귀국 이후 전속 필자로서 1994년 8월호부터 “사진비평”을 연재, 국내외에서 이슈가 된 작가들과 전시에 대한 비평을 5년간 연재하였다. 동시에 1998년 3월호부터 “사진미학”이라는, 읽기 쉬운 미학강좌를 연재해 큰 호응을 받았고 연재가 끝난 뒤 사진예술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어서도 인기를 끌었다.


육명심, 홍순태, 한정식, 이완교, 박영숙, 전규완, 김장섭 등 창간 당시 기존의 필진에 더하여 당시 30대인 김남진, 진동선, 윤준성 같은 젊은 필자들을 발굴했던 것은 「사진예술」이 우리의 빈약하고 허약한 사진이론 분야를 개선하는 데에 큰 공헌을 한 일이었다.     



국제교류와 사진 관련 고급정보에도 주목


 

<뉴욕의 사진 이야기> 윤준성 (1994년 9월)

 
뉴욕특파원으로 활동하던 윤준성의 "뉴욕의 사진 이야기"와 프랑스에서 공부한 양민정 특파원이 전해주는 해외 사진계 소식은 해외교류에 목말라하던 당시로서는 귀한 정보였다. 해외에서 벌어지는 유명작가의 전시 소개와 인터뷰 기사, 포토페스티벌 취재는 해외진출을 겨냥하는 사진가들에게 좋은 정보였디. 특히 진동선의 "외국화랑 소개"는 해외에서 전시를 해보고 싶어 하는 작가들에게는 매우 실용적인 정보였다.
 

또한 해외유학을 꿈꾸는 사진학도들을 위한 “나의 해외유학기”는 직접 유학을 했던 경험을 실음으로써 어느 나라, 어느 학교의 사진과에 진학하는 것이 나의 사진경향과 맞을 것인지 가늠해볼 수 있게 길잡이 역할을 했고, 실제로 90년대부터는 8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은 학생들이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 등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 유학생들이 전해오는 소식은 다시 국내에 유입되어 후배들의 꿈을 키웠고, 「사진예술」의 특파원으로도 활동했다. 지금은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여 지구촌 어디라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할 수 있지만 90년대만 해도 사진 관련 해외정보를 접하기는 제한적이어서 잡지의 역할이 지대했다.  
 

 
젊은 사진가 육성에 관심

 
창간 3년째인 1992년에 「사진예술」은 “올해의 작가상”을 실시, 젊은 스타작가를 탄생시키고 격려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새로운 사진에 대한 욕구는 거세져 갔지만 기존의 세력을 뚫고 올라올 신진 작가의 활동무대가 없었다. 그들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 주고 그들을 북돋워줌으로써 지속적으로 작업할 기회와 토대를 마련하자는 의도로 “올해의 작가상”을 실시한 것.


 

올해의 작가상 시상식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 - 민병헌> (1992년 6월)



<‘젊은작가 무료전시회’ 당선자 - 구성수> (1998년 1월)
 
  
 
1992년 제1회 수상자는 민병헌, 제2회 박보하, 제3회 이상일, 제4회 이용순, 제5회 문옥진, 제6회 김석중(아타 김)이다. 이 가운데 몇몇 작가는 끊임없는 작업으로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 외에도 포트폴리오 심사를 통해 초대전을 열어주는 <젊은 사진가 무료전시회>를 실시, 인사동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개인전을 열기가 쉽지 않은 젊은 작가를 응원하기 위함이었다. 전시장과 액자와 프린트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하는 이 프로젝트는 젊은 작가들에게 큰 호응을 받아 진행되었고 이 가운데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로는 구성수, 방병상 작가가 있다.


젊은 작가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하는 한편으로 1992년 3월호부터는 박영숙의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연재가 시작되어 구본창, 김장섭, 민병헌, 배병우, 김대수, 김석중(아타 김), 김중만, 김성태, 최광호, 정주하, 권순평 등 개념예술로서의 사진에 중점을 두고 작업하는 국내 작가들을 인터뷰하고 작품을 분석했다. 담론을 형성하여 작가들이 더 공부하고 깊이 있는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유명작가로 활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아마추어 작가 육성에도 관심을 가졌다. 독자사진콘테스트를 통해 일정 점수를 획득하면 2단계로 사예(사진예술)작품마당에서 여러 번 작품발표의 기회를 주고, 이 과정을 통과하면 ‘사예작가’ 칭호와 함께 사예회를 조직하여 강의와 촬영을 통해 그들의 사진 성장을 도왔다. 이 과정을 거쳐 나중에 개인전을 여는 등 사진가로 활동하는 사예회원들이 등장했다.        

 
 
공보처 선정 우수잡지


 

공보처가 실시한 제1회우수잡지로 선정, 1992년


「사진예술」은 1992년에 공보처가 실시한 제1회 우수잡지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한국잡지협회에서 실시한 한국잡지언론상 편집상을 수상, 공보처와 한국잡지협회에서 전문성을 공인받는 잡지가 되었다. 창간한 지 수년 내에 이루어진 이런 결과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전문잡지를 키우려 노력한 결과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한편 「사진예술」은 잡지 발행 이외에 1991년에 “사진예술사”로 출판사 등록을 마치고 90년대 초반부터 사진집 발간에 주력하였다. 80년대까지는 국내에서 사진집 발간이 손에 꼽을 정도로 미미하였으나 90년대 이후 작품집 출간의 붐을 일으켰다. 전시는 일회성에 그치지만 책은 반영구적이라는 점을 인식시키고 작품을 책으로 남길 수 있도록 편집과 출판을 대행했다. 


1999년 5월호에 창간 10주년을 맞이하여 쓴 글에서 진동선은 지난 10년, 「사진예술」 잡지의 공로로 “사진예술이 한국사진의 이론의 산실이 되고 평론의 기틀이 되고, 사진가를 국내외로 알린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한 국내외 고급 사진 정보를 널리 알린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창간 이후 10년 동안 매달 발간된 잡지 120권을 살펴보면서 수많은 사진가들의 작품이 소개되고 인터뷰를 했고, 작가를 길러내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를 시행했던 일들이 문자 그대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지금은 유명해진 사진가들의 면면이 120권의 잡지에 게재되어 있음을 보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라진 이름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가가 지금까지 작업을 하고 있음을 보면서 가슴 뿌듯한 만족감과 고마움, ‘그래도 할 일을 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당시에는 잡지에 몇 페이지 실리는 것에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가치가 선명하게 드러남이 확인된다. 기록이 있어 과거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이는 것임을, 그래서 기록이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느낀다. 월간 「사진예술」이란 잡지가 결국은 한국사진의 일기였고 그것이 쌓여 역사가 되었음을 실감하며 120권의 잡지를 바라본다. 무엇보다 한 달도 결호 없이 매달 잡지를 꼬박꼬박 발행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런 성실함이 한국사진의 성장과 발전에 크나큰 버팀목이 되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