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예술」창립자 故 이명동 선생

 

동아일보 편집국에서,1950년대
 

취재를 방해하는 경찰에게 강력히 항의를 하는 이명동기자,1957 

선생의 삶은 한마디로 사진을 향한 해바라기 열정의 외길 인생이었다. 선생은 어두운 시대를 카메라로 맞선 용기 있는 언론인이자 사진평론 부재의 암담한 현실 앞에서 스스로 가시밭길의 길을 떠안은 사진평론가였다. 또한 후진양성을 위해서 동아일보를 설득하여 ‘동아사진콘테스트’, ‘동아국제사진살롱전’ 등을 창설하였는데, 이를 통해 김기찬, 육명심, 이완교, 최민식, 한정식, 홍순태 등이 등단했다. 그리고 최초로 동아일보에 출판사진부를 만들어 출판부국장을 역임하면서 잡지 사진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일흔에 월간 「사진예술」을 창간하여 사진에 대한 마지막 뜻을 남기신 것이다. 이렇듯 항상 당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한국 사진계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해왔다.


대구시에서 30km쯤 떨어진 경북 성주군이 선생의 고향이다. 선생은 1920년 가야산 기슭에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카메라와의 만남은 보통학교 4학년 때 10전 짜리 카메라를 사면서 이루어졌는데, 그 카메라는 초점이 흐리고 인화상이 맑지 않아 차츰 더 나은 기종으로 옮겨 갔다. 급기야 대구에서 가장 큰 카메라점의 제일 비싼 카메라까지 탐을 내기에 이르렀다. 궁리 끝에 돈을 훔치기로 결심했다. 선생의 선친은 극진한 효자였기에 집안의 모든 재정을 선생의 할머니께 맡겼고 할머니의 큰 쌈지는 경제권의 상징이었다. 때마침 송아지 몇 마리가 팔렸다. 할머니는 초저녁 잠이 깊었고 그때를 이용해 이불 속으로 숨어들어가 쌈지에서 송아지 3마리 값에 해당하는 12원을 몰래 꺼냈다. 막상 카메라를 산 뒤에 부친이 두려워진 선생은 카메라를 가지고 뒷산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손자가 걱정이 된 할머니가 뒷산으로 찾아왔고 치마 속에 숨어 몰래 집으로 들어가서 밥을 먹고 잔 뒤 새벽에 다시 도망을 쳤다. 이렇게 닷새가 지났고 이러다가 손자 죽이겠다는 생각이 든 할머니가 마침내 아버지를 불러 설득하였고 효심이 지극한 아버지는 할머니의 뜻을 따라 용서할 수 밖에 없었다. 선생과 카메라의 만남은 그렇게 치열했던 것이다. 훗날 선생이 종군사진가나 사진기자 시절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촬영하던 치열함은 어린 시절부터 그러했음이다.


 

마음에 드는 카메라를 갖게 된 뒤, 10대 때부터 사진전문잡지인 「아사히카메라」를 정기구독 했다. 「아사히카메라」지 일본본사에서 시골마을 구독자가 고맙다며 경북지국장에게 직접 찾아가 감사의 뜻을 전하라고 지시했다. 막상 선생을 만난 지국장은 소년 독자란 사실에 놀라워하며 더 깍듯한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고 한다. 성주에서 사진 스승을 만나기 힘들었던 고인에게 사진잡지는 사진 스승이자 사진과의 첫 인연이었다. 훗날 은퇴할 나이인 70세에 사진에 대한 마지막 뜻을 남긴 것이 「사진예술」이니, 바로 고인의 사진 인연 처음과 끝이 사진잡지인 셈이다.
 

한국전쟁 중동부전선. 1951. ⓒ이명동
 

보병 제7사단의 한국전쟁 중동부전선. 1952. ⓒ이명동
 

'호국의 꽃’, 한국전쟁 3주년 기념 전육군사진 콘테스트에서 1등 수상작. 1953. ⓒ이명동
 
선생이 남긴 수많은 족적 가운데서도 가슴을 뭉클하게 감동시키는 것은 용기 있는 종군사진가와 사진기자 상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오랜 기간을 지하실에 숨어 살아야만 했다. 어느 날 지하실 유리창의 깨진 틈으로 미해병대가 M1 소총을 쏘면서 진격하고 인민군이 기관총을 쏘면서 응수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해병대 선두 바로 뒤에 총도 없이 라이카 카메라 두 대만을 목에 덩그러니 맨 채 뒤따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라이프」지 사진기자, 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David Douglas Duncan)이었다. 사진하는 사람이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지 실감할 수 있었고 결국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던컨의 용맹성에 자극을 받아 종군사진가를 결심하게 된다. 고인은 “기관총탄이나 소총탄환은 맞아도 죽지 않는다. 폭탄만 정통으로 맞지 않으면 어디든지 카메라와 함께 간다”는 투지로 육군 보병 제7사단에서 종군 기록사진가로서 3년간 한국전쟁을 기록했다. 중동부전선의 고지전을 비롯하여 일선 사단의 처참한 전투 상황을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그 결과로 무공훈장(화랑금성, 화랑은성, 화랑무성) 3가지를 전부 받았다. 한편 한국전쟁 3주년 기념으로 1953년 7월에 전 육군이 실시한 전쟁기록사진 콘테스트에서 ‘호국의 꽃’으로 1등상을 입상하기도 했다. 선생은 1996년에 한국전쟁의 공로로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유공자증을 받았기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

 


4월 19일 경무대 앞 발포현장. 1960. ⓒ이명동


4·19민주혁명. 종로 거리의 고대생 시위. 이 사진은 4·19민주혁명 기념 우표로 발행되었다. 1960. ⓒ이명동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61년
 

4.19 건국포장 2012년

 
선생은 죽음의 현장을 피하지 않는 기자 정신, 불의와 맞서는 정의감, 사회에 대한 해석과 판단 등 포토저널리즘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사진들을 남겼다. 그는 용기있는 사진기자의 표상으로 남았다. 특히 동아일보 사진기자 시절에 촬영한 1960년 4월 19일 경무대(청와대의 옛 이름) 발포 사진은 선생의 대표 사진이다. 4월 19일 시민과 학생은 경무대를 향해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국가 원수의 최후 방어선이 무너질 형국이니 경찰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따라서 실탄 사격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불과 얼마 전, 중앙청까지도 신문기자들이 많았는데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뒤쪽에 세워둔 동아일보 지프차로 가서 운전기사에게 촬영한 필름들을 맡겼다. 이때 선생은 “역사적 현장을 증언할 기자가 나 혼자뿐이니 오히려 영광이지 않은가”라고 다짐하면서 라이카 카메라에 새 필름을 장전하고 앞장서 나아갔다. 데모대와 경찰이 10여 미터 정도로 좁혀졌을 때 경찰이 실탄 사격을 개시했다. 그때 데모대 사이에서 총을 맞고 비틀거리는 두 명의 학생을 목숨을 걸고 찍은 것이다. 선생은 4.19를 취재한 공로로 이듬해 ‘제10회 서울시 문화상’에서 신설된 언론상의 첫 수상자가 됐으며 4.19혁명 유공자포상을 받았다.



백범 선생과 백범동지청년들, 맨 왼쪽이 이명동 선생. 1949.
 
 

경교장에서 촬영한 백범 선생 최후의 사진. 1949. 6. 23. ⓒ이명동

 
이명동 선생은 2019년 7월 24일에 영면하셨다. 향년 100세, 하늘이 내려주는 나이라는 상수(上壽)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선생의 빈소에 김구 선생 유족이 조화를 보내왔다.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음에도, 부음기사를 접하고서 인사를 전한 것이다. 70년이 지났지만, 김구 선생 유족은 고인이 남긴 김구 선생의 초상사진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다. 1949년 6월 23일, 존경하는 김구 선생의 초상사진을 제대로 찍기 위해 선생은 일부러 무거운 대형카메라를 경교장 마당에 가져가서 최선을 다해 촬영하였다. 서거 3일 전이었다. 그 사진이 생전 마지막 사진으로 영정사진이 되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이 간디의 마지막 사진을 남긴 것처럼, 역사에 남을 사진가들이 위대한 인물의 마지막을 기록하는 듯싶다.

 
선생의 고향, 성주에는 태실(胎室)이 있다. 그 태실의 역사는 세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찬란한 조선 왕조를 이끈 어진 임금, 세종대왕은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여 자녀들의 태를 묻을 명당을 물색하게 했다. ‘태’는 태아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으로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태실로 선정된 곳은 성주였다. 세종 20년부터 24년에 걸친 어렵고 힘든 작업으로 열아홉의 왕자와 공주의 태가 이곳으로 옮겨져 묻혀 질 수 있었다. 선생에게 있어 「사진예술」의 의미는 사진의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는 태실이 아닐까 싶다. 고인의 사진을 향한 마지막 뜻이 담긴 「사진예술」을 잘 이어가리라, 다짐한다.
 
이명동 초대 발행인 마지막 가시는 길, 상여를 들고 가는 김녕만 2대 발행인과 이기명 3대 발행인 ⓒ곽명우

글 : 발행인 겸 편집인 이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