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혜경 사진집 「토기, 그 빛나는 침묵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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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잎 흩날리던 날
영원한 그리움 안겨주시고
슬픔 덮어주시려고
벙그는 꽃에
향기 가득 채워 놓고
이생의 깊고 넓은 강을 건너가신
아버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

작업 노트

 
‘동보당(東寶堂)’...

어린 시절의 ‘동보당’을 떠올리면 백자, 고려청자, 분청사기, 호롱, 떡살 따위도 덩달아 떠오른다. 대문 입구 일층에서 삼층까지 선반 가득 온갖 골동품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집에서 나는 자랐다. 오래 내 방을 차지하고 있던, 연한 물빛을 머금고 있던 백자 항아리, 뿌연 색을 띈 독특한 형태와 문양을 지니고 있던 분청사기, 소꿉놀이 하고 싶은 마음을 자주 불러 일으키던 조선 백자 부장품(副葬品) 명기(明器)는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떤 멋진 주인을 만났을까?


 
선친께서는 민속 박물관을 설립하겠다는 큰 꿈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신 채 일찍 고인이 되셨다. 살아생전 특별히 아끼시던 애장품들이 매우 많았고 그 종류들도 다양했지만, 마지막까지 소장하고 계셨던 것들 중엔 유독 토기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선친에게 토기는 일종의 궁극적인 지향점, 아니 종착점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버지는 토기의 어떤 점들을 좋아하셨을까?” 바로 이 질문이 그 이후 오랫동안 선친께서 남겨주신 유물들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를 이끌어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내 눈에 들어오는 토기의 모습과 표정들도 조금씩 변화해 왔던 것 같다. 사진에 입문하여 카메라를 통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제대로 바라보고 충일하고 풍요롭게 포착하고 담아내려 애써온 지난 8여년 동안엔 더더욱 그랬다. 그렇다, 나도, 생전의 아버지처럼, 그 토기들의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시선의 깊이, 깊이의 시선을 갖고 싶었다.

 
자로 잰 듯한 정밀함이나 정교함은 부족하면서도 한결같이 넉넉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그 토기들, 투박하고 단순한 형태에 다양한 무늬와 장식들이 더해져서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한 격조와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은은하게 머금은 채 언제나 내 앞에 버티고 있는 토기들.... 어느덧 그것은 내 인생의 화두가 되고 말았다.

 
토기는 인간이 처음으로 응용한 화학변화의 산물이다. 부드러운 흙을 뭉치고 빚어내어 뜨거운 불에 단단하게 구워낸 것으로서, 그 작품을 만들어낸 도공(陶工)의 정서와 기술이,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시대의 삶의 감각과 미적 감수성, 예술성까지 고스란히 투영되어 나타난다. 삼국시대의 토기는 고려 청자,조선 백자, 조선 분청사기와 함께 당당히 한 장을 차지할 만큼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지만 그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현대 예술의 관점에서 보면, 토기의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조형성과 질감은 뜻밖의 강력한 흡입력과 호소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실 토기의 아름다움, 그 힘은 더없이 근원적이고 인류학적인 뿌리를 지니고 있다. 토기는, 바슐라르(G, Bachelard)의 표현을 빌린다면, 인간의 ‘의지적 몽상’의 위대한 결과물이다. 말랑거리는 물질은 형태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물질을 반죽하는 사람의 에너지와 의지력으로 단단한 형태미를 만들어나가는 행위는, 조물주가 이 세상-우주를 창조하는 행위, 그 과정과 구조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토기 하나 하나가 ‘우주적 몽상’이 빚어낸 하나의 우주, 인간이 창조해낸 ‘소우주’인 것이다.

 
그런 ‘우주적 몽상’의 힘을 토기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 몸체의 곡선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부드럽고도 매끄럽게 흘러내리고, 어찌 보면 인체의 아름다운 목선과 가슴선을 고스란히 구현해내고 있다. 또한 직선과 곡선이 만나는 부분들은 움직임 속에 정지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일종의 ‘정중동(靜中動)의 형식미’를 아주 잘 보여준다. 토기 특유의 경쾌함, 생동감, 강인함과 함께 어떤 외로움, 어떤 쓸쓸함이 은은하게 묻어나는 그 선들은 매우 침묵적이고, 지극히 내적이다. 무엇인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마음, 멈출 듯 떠나려는 마음, 어떤 고요한 사무침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이 모든 것들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싶은 열망이 내 안에 처음 자리잡은 게 언제였던가? 점점 커지고 점점 깊어지는 그 열망에 이끌려, 선친께서 남겨주신 토기들을 관찰하고 응시하면서, 그 토기들이 나직하게 건네는 침묵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한 점 한 점 사진을 찍어나가면서, 나는 삶에 대해, 우주에 대해, 우주의 침묵에 대해, 그리고 시공을 넘어선 죽음에 대해 사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번 그 시간들은 삶의 태도를 되묻는 시간으로 내게 되돌아 왔다.

 
그리고 이제...
여기 내 작은 작업의 부끄럽고 아쉬운 결과물들이 있다. 이 사진들이 그 토기들이 내게 오랜 세월 베풀어주고 나누어준 싱그러운 에너지와 기운, 행복한 우주적 만남의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도 맛볼 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