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작가]사진의 진실, 사진가의 진실 바바라 클렘 <빛과 어둠 - 독일 사진>

독일의 대표적 포토저널리스트 바바라 클렘의 전시 <빛과 어둠 - 독일 사진>이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바바라 클렘이 포토저널리스트로 활동한 40년간의 사진 중 대표적인 작품들을 선정해 선보인다. 

 

Opening of the Brandenburg Gate, Berlin, 22. December 1989 ⓒBarbara Klemm
브란덴부르크 문 개방, 베를린, 1989년 12월 22일
브란덴부르크 문은 바르샤바조약기구와 NATO 간의 경계를 표시하는 건축물인 동시에 냉전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12월 21일, 동독 노동자들이 장벽을 무너드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서독의 헬무트 콜과 동독의 한스 모드로프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브란덴부르크 문이 개방되었다.
당시 모였던 인파는 30만 명에 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견해를 확고히 하고, 그 견해를 충실히 견지하며, 항시 모티브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 즉 자신을 모티브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바바라 클렘 BARBARA KLEMM
 

Fraternal Kiss bet ween Leonid Brezhnev and Erich Honecker,
Marking Thirty Years of East Germany,
East Berlin, 1979 ⓒBarbara Klemm

‘형제의 키스’
두 중년의 사내가 입을 맞대고 키스하고 있다. 동성애를 암시하는  성적인 뉘앙스는 없지만, 그와는 다른 기묘한 분위기가 있다. 이들을 둘러싸고 박수를 치고 있는 정장입은 사내들의 무리도 이 상황이 두 사내만의 돌발적이고 이례적인 일이 아니라 그들 사회의 승인을 받는 엄숙한 의식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장면은 1979년 10월 7일 동독 수립 30주년 기념행사에서 레오니즈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동독 국가원수이자 당 서기장인 에리히 호네커의 입맞춤으로 일명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서로간의 우애와 신의를 보여주기 위해 행하던 ‘형제의 키스’이다. 


 
"‘형제의 키스’, 사회주의식 입맞춤은 공산주의 운동과 더불어 러시아 정교회에서 행하던 부활절 키스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러시아 정교회의 부활절 키스는 예수의 정신 아래 모두가 형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의 당대표들 간에 행해지는 형제의 키스도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행위였지만, 비평가들은 이러한 관습을 ‘유다의 입맞춤’에 비유하며 조롱하곤 했다.”
바바라 클렘, 빛과 어둠 - 독일 사진 中

 
ⓒ이기명
Dmitry Vrubel, 형제의 키스, 이스트갤러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이 되었지만, 독일은 장벽의 일부를 남겨놓았다. 
베를린 중심부의 1.3km의 거대한 장벽이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장벽벽화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러시아 화가 Dmitry Vrubel의 ‛형제의 키스ʼ이다. 
이 벽화에는 '신이시여, 내가 이 치명적 사랑 속에서 살아남게 도와주소서'란 글이 함께 남겨져있다. 
사진이 남아 역사가 되고 역사가 남아 예술이 된다.
 

레오니즈 브레즈네프와 에리히 호네커의 ‘형제의 키스’는 냉전시대의 상징이자 사회주의 국가들의 단합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당시 이 장면을 찍은 사진 중 레지스 보쉬와 바바라 클렘의 사진 두 장이 두고두고 회자되는데, 각 사진들이 취한 전략이 포토저널리스트는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가를 시사하기 때문이다.    


레지스 보쉬는 두 지도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두 사내의 맞닿은 입술을 사진 중앙에 배치하고 강조했다면 바바라 클렘은 거리를 두고 주변의 인물들을 함께 담아냈다. 바바라 클렘은 “좋은 사진이란 그 장면도 중요하지만, 그 행위가 어떤 환경에서 이뤄지는 지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서 “유럽 정치사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이었고,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유대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장면이어서 주변에 사람들이 서 있는 장면을 함께 찍었다”고 설명한다.   


 

▵ The Fall of the Wall, Berlin, 10. November 1989 ⓒBarbara Klemm ⓒBarbara Klemm
장벽붕괴, 베를린, 1989년 11월 10일
11월 9일, 독일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 소속인 귄터 샤보브스키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오늘, 모든 동독 주민 누구나 출국할 수 있게 만들어 줄 규정을 통과시키기로 결의했다."
너무 일찍 공개된 이 메시지는 라디오와 TV를 통해 일파만파 확산되었고,
이는 수천 명의 동독 시민들이 국경으로 몰려들어 장벽 개방만을 기다리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원래 한 순간에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촬영 순간을 둘러싼 앞뒤의 시간들이 그 안에 압축돼 있다. 이 점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사진의 집약성이다. 훌륭한 사진이라면 관찰자의 눈 속에서 압축된 그 순간이 다시 풀릴 것이다. 그러면 그 속에서 관찰자는 그 순간 이전과 이후의 스토리를 읽을 수 있게 된다.”

 

Helmut Kohl in Dresden, 19. December 1989 ⓒBarbara Klemm
드레스덴을 찾은 헬무트 콜, 1989년 12월 19일
서독의 콜 총리가 수천 명의 동독 시민들 앞에서 최초로 연설을 하는 모습.
그 중 많은 이들이 서독과의 조속한 통일을 요구했다.


바바라 클렘이 마티아스 플뤼게와의 대담에서 밝혔듯이 그는 한 장의 사진으로 독자들이 사건의 앞뒤와 상황의 맥락을 모두 유추할 수 있는 포토저널리즘을 지향해왔다. 그는 자신의 사진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다.

 

Andy, Warhol, Frankfurt am Main, 1981
ⓒBarbara Klemm
앤디 워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1981
1928-1987, 미국 출신의 예술가이자 영화제작가

 
“우리는 그저 우리가 목도한 사건들을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제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 뿐이다. 이것이 바로 화보집과의 차이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단 한 장의 사진 속에 담아야하고 이를 위해서는 특별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스토리 전체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단 하나의 순간을 찾아내는 작업 말이다. 나는 늘 한 장의 사진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독일의 대표적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에서 40년 이상 활동해온 베테랑 저널리스트였던 그는 유럽 현대사의 주요한 지점을 한 장의 사진으로 포착해 독자들에게 전달해왔다. 수많은 사진기자들의 사진 속에서 그의 사진이 유독 두드러지며 역사적 자료이자 미학적 포토저널리즘의 기준으로 꼽히는 것은 그의 사진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철저한 계산에 의해 명확한 구도를 지닌 사진, 예술성 높은 구도 속에서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 사진”(우루줄라 첼러)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사진기자 무리들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비슷한 사진을 찍기보다는, 철저한 사전 조사를 통해 맥락을 파악하고, 순간적이고 본능적인 감각으로  구도를 파악함으로써 남들과는 확연히 다른 미학적 가치를 확보한 사진을 찍어왔기 때문이다. 우루줄라 첼러는 이에 대해 “클렘은 사건의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서, 그저 스쳐지나가는 찰나 속에서 사건의 핵심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와 상징성을 지닌 사소한 순간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카메라에 담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평했다.

 

Alfred Hichcock, Frankfurt am Main, 1972
ⓒBarbara Klemm
알프레드 히치콕,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1972
1899-1980, 영국 출생의 미국 영화 감독 겸 영화제작가


그러나 그는 저널리즘 사진의 한계와 효용에 대해 분명히 알았고 또 ‘선을 넘는 사진’에 대해서는 경계했다. 그는 “상대방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느낌 때문에 찍지 않고 포기한 사진이 정말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쩌다가 결국 사진을 찍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다. 찍어서는 안 될 사진들이 분명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단순히 사진을 통해 ‘사냥’을 하기 원하는 무리와 자신의 신념과 소명의식이 분명한 포토저널리스트와의 차이라고 그는 믿었다. 바바라 클렘이 찍은 유명인사들의 사진이나 무명인들의 사진 어디에도 그들의 존엄성을 훼손한다거나, 조롱하는 사진은 볼 수 없다. 영화감독 히치콕이나 앤디 워홀의 사진 등 유명인을 찍을 때 그는 남들이 주로 기대하는 유명인들의 고정된 이미지와는 한 발 비껴선 지점을 원했고, 이것은 정치인의 공식회담이나 국제조약, 시위사진 등 다양한 상황을 촬영하며 그가 항상 지향해왔던 원칙이다. 

 

At the Reichstag, West Berlin, 1987 ⓒBarbara Klemm
국회의사당에서, 서베를린, 1987년
베를린-티어가르텐에서 브란덴부르크 문 쪽으로 이어진 장벽을 바라본 모습.
당시 시위 방지를 위해 서베를린쪽 지역이 폭넓게 차단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런 바바라 클렘의 사진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부산에서 열리고 있다. 고은사진미술관은 지난 5월부터 8월 9일까지 석 달에 걸쳐 <바바라 클렘, 빛과 어둠 - 독일 사진> 전시를 진행 중이다. 고은사진미술관의 개관 10주년을 맞아 2년간 진행하는 ‘시작과 시작’의 첫 번째 해외교류전으로 독일국제교류처 ifa가 기획하고 주한독일문화원이 협력하는 세계순회전인 이번 전시에는 바바라 클렘의 흑백사진 120여점이 선보인다. 이번 전시 이후에는 경남도립미술관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전시에 맞춰 내한한 바바라 클렘은 관객과의 만남에서 사진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으로 “미술관에 자주 가서 많이 보고 배워야 한다”고 권했다. 사진은 그림보다 속도가 빠르지만 결국 지향하는 구도나 미적인 원리는 동일하기에, 미술관에서 예술 작품들을 통해 이런 원리를 독학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사진가의 진실된 시각을 강조한다.


 
 Leonid Brezhnev, Willy Brandt, Bonn, 1973 ⓒBarbara Klemm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빌리 브란트, 본, 1973
1973년 5월 19일,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소련의 국가원수이자 공산당 당수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서독 본 시에서 만났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서는 최초로 서독을 방문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 만남은 서로 다른 두 체제의 화해 무드를 희망하는 상징으로 작용했다.
 
 
“어떤 한 순간을 사진이 찍지만 그 사진이 꼭 진실일 수만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 사진은 현상의 부분만을 담고 거기에는 사진가의 주관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진이 진실한가, 그렇지 않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진가의 시선이 진실한가 아닌가이다. 사진은 때론 진실이 아닐 수 있지만, 결국 작가의 진실이 사진의 진실을 만드는 것이다.”
 
글 : 석현혜 기자
이미지 제공 : 고은사진미술관

해당 기사는 2017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