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 존재의 본질을 묻는 ‘고요’, 한정식

오십년쯤 어떤 일을 하고도 도가 트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백년을 산들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올해로 만 80세, 사진을 시작한지 50년에 이른 한정식 교수(중앙대 명예교수)는 4월 14일부터 네 달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기획한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에 초대되어 전시를 연다. 사진가 이전에 선생임을, 선생 이전에 사람임을 새기며 살았다는 한정식 교수의 말씀은 작가와 교육자 사이에서, 작업과 삶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자 애쓴 일생을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서 정년퇴임을 한 바로 그해 2002년에 “고요”라는 작품을 발표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 같다. 이제는 자유롭게 존재의 본질을 찾아 깊숙한 <고요>의 세계에 접어든다는 선언이 아니었을까. 사람으로서나 작가로서나 경지에 이른 한정식 선생의 ‘고요 시리즈’를 따라가 본다.

 

<나무>


고요에 들다.

불가에서는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고요에 들었다’는 표현을 쓴다고 했다. 참으로 시적詩的이다. 감정을 더 부풀리자면, 그 말을 듣는 순간 표현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도 고요에 들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적정寂靜, 적멸寂滅과 같은 의미의 ‘고요’는 죽음과 내통하고 있는데 죽음은 또한 존재의 마침표이면서 완결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고요’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준다는 경지라 할 수 있겠다.


한정식 교수가 청장년 시절을 보내고 60대 중반에 이르러 ‘고요’에 빠져든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귀결이다. 젊은 날의 고요란 원래 당치 않아 보이거니와 30여 년의 사진탐구 이후에 외형을 하나하나 벗어던지고 마침내 흑백사진으로 구현할 수 있는 가장 미학적이면서 철학적인 세계로 쑥 들어가 버린 형국이기 때문이다. 마치 대기권을 뚫고 나가 우주를 품듯이 고요의 세계로 안긴 것이다.


 

<고요> 경기 가평 1998

 
“그런데 참 재미있어요. 고요가 내 이름이거든요. 내 이름 한정식에서 ‘한’은 가족의 이름이고 ‘식’은 돌림자이니 나만의 이름은 ‘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고요할 정靜자란 말이죠. 그러고 보니 결국 이름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셈이네요.”

 

<풍경론> 전라남도 해남군


그렇다. 약 50년에 이르는 사진작업이 결국 이름값을 하는 것이었다면 고요야말로 한정식 작가의 내면의 상태, 즉 내면풍경이라는 말과 통한다. 원래 그는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초기사진부터 광각보다는 표준과 망원을 선호한, 그리고 주로 클로즈업 사진을 많이 찍는 성향을 보였다. 그가 보성고등학교 국어선생님으로 처음 카메라를 장만하여 사진을 찍기 시작, 60년대 후반에 모두가 그랬듯이 공모전과 촬영대회에 참여했을 때도 주로 클로즈업 사진을 출품했다고 한다. 조용하고 미니멀한 사진을 추구했던 것.

 
“당시는 리얼리즘 사진이 대세를 이루고 있을 때였어요. 고달픈 삶의 현장이 주로 사진의 대상이 되었는데 난 쑥스러워서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하겠는 거예요. 아마 그런 내 성격이 망원렌즈를 선호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요.”


국어선생님에서 사진학과 교수로

1937년 서울 태생으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한 그는 예정대로 국어교사가 되어 보성고등학교에 근무했다. 그때 운명처럼 만난 사람이 같은 학교로 전근해온 홍순태 교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사진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도 교사가 되어 모은 월급으로 산 첫 번째 물품이 카메라였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그때 무슨 생각으로 카메라부터 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사진에 발을 들여놓게 한 홍순태 교수를 만나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 모든 게 우연인 것 같지만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보성고에서 홍 선생을 만나 사진을 시작했고 1968년도에 홍 선생이 만든 ‘백영회’에서 동호인 활동을 하다가 임응식 선생을 뵙게 돼요. 그리고 차례로 이명동, 육명심 선생을 알게 됩니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내 사진의 출발점에서 이미 평생 함께 할 사진의 스승과 동반자들을 다 만난 셈이었어요.”


 

<나무> 1980

 
아직은 한국사진이 여명의 시기에 불과했던, 특히 대학에서 사진교육이 마악 시작되던 그 무렵, 나이 마흔에 일본으로 사진유학을 떠난 그의 결단력은 국어교사에서 사진학과 교수로 변신케 하고 본격적으사진가의 길을 걷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978년에 일본에서 돌아와 대학 강사로 출발, 신구대학을 거쳐 1982년에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나는 교육자이므로 원칙적으로는 내 창작활동보다 교육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90년대 이전에는 사진집보다 이론서를 여러 권 집필하고 번역한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그런 결과인지 지금까지 내 곁에 좋은 제자들이 많아요. 보람 있고 다행스런 일이지요.”

<발> 1980

 
<풍경론> 경상남도 하동군 1996
 

1960년부터 교편을 잡은 그의 교직생활은 2002년에야 끝이 났다. 온전히 사진가의 삶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그해 5월에 금호미술관에서 <한정식 사진전 고요>를 발표한다. 그는 사진집 후기에서 “사진 ‘고요’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나의 관심이다. 존재는 고요하다. 고요해서 고요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가 근원적으로 고요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대상의 근원을 살피겠다는 그의 의도는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전에 발표한 <나무>, <발>, <풍경론> 같은 제목의 사진전에서 ‘고요’의 단서가 될 만한 사진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불심(佛心)을 따라 깊어진 사진

한정식 교수는 오래 전부터 불교를 공부해왔다. 그의 사진에서 불교적인 색채가 배어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가 자신도 불교적인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하는데 “무엇이 불교적인 사진인가?”라는 물음이 생긴다. 모든 형상은 허망한 것이고, 형태를 통해서 형태가 아닌 것을 보면 부처님을 만난 것이라는 불법에 빗대어 그는 반드시 형태를 통해야만 하는 사진에서 형태가 아닌 것을 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있다고 말한다.


 

<고요> 전라남도 영광 월출산 도갑사 1986


그의 작업실에는 8x10 정도로 작게 프린트 된 사진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라고 했다. 바닥에 작은 탁자 하나와 천정에 백열등 하나가 걸려 있을 뿐 햇빛만 가득 찬 빈 방을 찍은 사진이다. 사진가가 보여주고자 한 것이 백열등과 탁자가 아니었음은 자명한 일이고 그렇다면 그 빈 방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그 사진을 찍은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1986년 오상조 교수(광주대학교)의 안내로 전남 영광 도갑사에 갔을 때였다고 한다. 마침 절 마당에서 기와불사를 접수하는데 기와 한 장에 천원이었다. 천원지폐가 없어서 거슬러 받을 요량으로 만원지폐를 내자 접수하던 보살님이 기뻐하며 “이렇게까지! 감사합니다!”라고 머리를 숙였다. 이쯤 되니 차마 거스름돈 이야기를 꺼낼 수 없어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그리고는 열심히 사진을 찍고 점심을 먹으러 절을 나서려는데 그 보살이 다가와 “점심공양 하셨나요? 아직 안하셨으면 여기서 드시고 가시지요.”라고 권하며 안내한 곳이 바로 그 방이었다. 아직 음식을 내오기 전, 밝은 빛으로 가득 찬 방을 보는 순간 그는 셔터를 눌렀다. 인연의 오묘함과 신비를 담은 이 사진은 보는 이에게 텅 빈 공간을 각자의 마음으로 채워야 하는 숙제를 남긴다.


 
<발> 1980


화두를 던지듯이 툭 던지는 사진, 사물의 겉모습보다는 그 너머를 생각해보게 하면서 그저 실마리를 던져줄 뿐인 사진들이 심연의 세계에 드는 아득함으로 또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막막함으로 다가온다. 특히 흑백사진이 주는 그 매혹적인 흑과 백의 스펙트럼은 현란하면서도 단순하다. 침묵으로 가장 진솔해질 수 있듯이 절제된 최소한의 색으로 사물의 본질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본질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고요의 상태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불교사진의 진수일지 모른다. 그의 고요 시리즈 완결편인 『고요Ⅲ』 사진집에 실린 사진은 모두 절에서만 촬영한 사진이라는데, 물론 절에서 볼 수 있는 형상이 찍혀 있지만 그것을 굳이 절 사진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엇을 찍었든 그 무엇을 이미 넘어섰으니 말이다. 어느새 그의 사진은 그의 불심을 따라 깊어진 것일까. 껍데기를 벗기고 또 벗기어 공空으로 가는 길목에 그의 사진이 놓여있는 듯하다.


국립현대마술관 과천관에서 100여 점 전시


 
 
<고요> 경기 가평 2001
 

2015년에 『고요Ⅲ』을 내면서 이제 고요시리즈를 접는다고 밝혔지만 작가는 “사실, 고요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고백한다. 요즘은 부처님의 자취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관련하여 ‘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데 그것도 결국 ‘고요’의 범주에 들 것 같다는 것. 그동안 우연찮게 풀(나무), 물, 돌, 절 같이 한음절의 소재를 찍어왔는데 하긴 그것이 달이든 돌이든 물이든 또한 절이든 소재의 문제가 아닌 바에야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고요가 존재의 본질이라면 애초부터 본질을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다.


“실은 난 참 마음이 약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싸움을 못해요. 어차피 싸우면 질 테니까 아예 싸움을 안 해요.”


50년에 이른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런 그의 성품이 드러난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조차 쑥스러웠다는 초창기를 지나고도 그는 여전히 대상과 조용히 대면하는 쪽을 선택했으니 말이다. 한국사진이 리얼리즘에 경도되어 있던 70년대와 80년대에 ‘순수사진’을 주창하여 “그럼 우리가 찍는 사진은 불순한 사진이냐?”는 농담 섞인 항의를 받기도 했다는 한정식 교수는 “용어의 해석에 따른 오해의 소지는 있었는데 실은 실용성과 관계가 없는 스트레이트한 예술사진을 말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때의 그 자세는 사진을 시작한지 49년째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하다. 즉, 한 편의 시와 같은 사진을 찍고 싶다는 것이 그의 기본생각이었다. 1957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입선한 적도 있는 그는 시인이 되지 않고 사진가가 되었지만 결국은 사진으로 시를 쓰고 있는 셈이다. 


 
<고요> 강원 평창 오대산 월정사 2005

 
<고요> 강원 원주 2005

 
4월 14일부터 8월 6일까지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전시에서는 100여 점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큰 사이즈는 어쩔 수 없었지만 작은 사이즈는 은염프린트를 했다. 그리고 그 작품들 가운데 반 이상이 ‘고요’라고 한다. 시인의 길이 외로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진가의 길이 더 외롭더라고 말하는 한정식 작가. 올 봄에는 꽃 피는 화려한 봄의 외양과 대조되는 그의 고요한 시를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 불심이 깊어지면서 작가로서도 완숙기에 접어든 60대에 비로소 “나다운 나의 사진”이라고 할 ‘고요’를 만나 오늘에 이른 것은 작가에게 참으로 행복한 일일 것 같다. 사실 작가에게 평생 안고 갈 주제를 가졌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반세기 동안 사진을 찍어온 한정식 교수에게 올 봄은 어느 해보다 따뜻하고 화려한 계절이 될 것 같다.


전시기간 2017년 4월 14일 - 8월 6일
전시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글 :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제공 : 한정식 작가


해당 기사는 2017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