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를 사랑한 사진들 〈보그 라이크 어 페인팅〉


Mert Alas & Marcus Piggot, Ophelia, Hever Castle, Kent, 2011 ⒸMert Alas and Marcus Piggott 〈사진1〉

한 여인이 짙은 녹색의 나뭇잎 사이에 누워있다. 녹음이 짙은 어두운 배경에 유독 여인의 도자기같이 창백한 피부가 몽환적으로 떠오른다. 붉은 입술과 대조되는 창백한 목덜미를 우아하게 드러낸 그녀는 보는 이에게 야릇하면서도 관능적인 감각을 일깨우는데, 이 감각은 에로스보다는 타나토스(죽음의 본능)에 가깝다. 여인의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덜미와 어깻죽지, 피안(彼岸)을 응시하듯 먼 곳을 보며 꺾인 그녀의 머리 위로 흰 꽃잎 들이 마치 애도하듯 흩어져 있다.

패션 사진가 메트 알라스 & 마르커스 피고트가 찍은 이 사진의 제목은 오필리어Ophelia다.〈사진1〉 셰익스피어 〈햄릿〉의 여주인공으로, 그녀는 연인인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알고 미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는다. 비탄에 빠진 오필리어가 물 속에 몸을 던지는 이 장면은 많은 화가들의 영감을 자극했는데 특히 19세기 영국의 존 에버렛 밀레이는 지극히 몽환적이면서도 낭만적인 화풍으로 죽어가는 오필리어의 모습을 마치 황홀경에 취한 듯 묘사해 극찬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이후 오필리어가 수많은 화가들의 뮤즈가 되도록 영감을 줬다. 메트 알라스&마르커스 피고트 역시 그 중 하나로, 이들은 짙은 녹음 속에서 타나토스에 도취돼있는 그들만의 오필리어를 재창조했다.


 

Cecil Beaton, Charles James gowns French & Company, 1948 ⒸCondé Nast Archive

이처럼 고전 속 명화는 후대 화가는 물론 사진가들에게까지 영감을 주며,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창조되고 있다. 이는 패션사진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피터 린드벅, 파울로 로베르시, 어빙 펜 등 세계적인 패션사진계의 대가들이 명화를 오마쥬했다. 

오는 6월 국내에서 첫 전시되는 〈보그 라이크 어 페인팅VOGUE like a painting〉전은 이렇게 고전 명화에서 영감을 얻고 재현한 패션사진들을 전시한다. 패션잡지 보그의 아카이브에서 세기의 명화에 영감을 받은 사진들을 선정해 선보인다. 지난 해 스페인 티센 -보르네미차에서 처음 선보였을 때, 38만명에 이르는 관람객이 들며 화제가 됐다. 전시는 ‘초상화, 정물화, 로코코, 풍경화, 아방가르드에서 팝 아트까지’ 5가지 섹션으로 나눠 전시되며, 한국전시를 기념해 스페셜 섹션인 ‘보그 코리아’가 더해져 한국의 전통미를 살린 패션사진을 함께 전시한다.

19~20세기 전문미술사학자인 카롤린 라로슈는 서양미술사에서 각 작품들의 계보를 살펴보는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에서 앞선 작가들의 그림을 다시 그리는 것은 “선대미술가가 자기 시대에 제시했던 문제 제기의 연속선상에 자리하는 것, 선대 미술가의 직관을 이해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 그리고 20세기 미술가들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는 작업 방식, 즉 재해석 내지 권위에 대한 도전에 관계된 작업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보그 라이크 어 페인팅’의 패션사진들 역시 피사넬로, 보티첼리부터 피카소, 잭슨 폴락까지 다양한 세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그 주제의 연속선상에서 재해석하고, 패션 사진이란 틀로 새롭게 재현한다. 


 

 Peter Lindbergh, One Enchanted Evening (Aymeline Valade, Bette Franke,
Elza Luijendijk and Zuzanna Bijoch), Taormina, Sicily, 2012 ⒸPeter Lindbergh Studio, Paris / Gagosian Gallery 〈사진2〉


▹Tim Walker, Stella Tennant, Eglingham Hall, Northumberland, 2007 ⒸTim Walker


이 전시에서 눈여겨 볼 점은 ‘명작의 주제의식과 아우라가 패션사진에서 어떻게 모방되고 재해석, 나아가 재창조되는가?’이다. 단순한 ‘흉내내기’라면 똑같은 코스튬과 자세, 오브제와 구도만을 재현하겠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재현에 그치는 사진은 오히려 드물다. 팀 워커는 19세기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The Lady of Shalott(1884)을 ‘원형의 계단 위에선 여인이 탑 위의 라푼젤이 머리를 늘어뜨리듯, 푸른 드레스 자락을 계단 밑으로 길게 드리우는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사진(Lily Cole on Spiral Staircase, 2005)〈사진3〉로 재해석했다. 또한 피터 린드버그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진, 선, 미 3여신을 그린 The Three Graces(삼미신)을 동적인 느낌을 더해서 손에 손을 잡고 돌고 있는 세 명의 우아한 여인들의 화보(One Enchanted Evening, 2012)〈사진2〉로 재창조했다.   

 

Tim Walker, Lily Cole on Spiral Staircase, Whadwan, Gujarat, India, 2005 ⒸTim Walker 〈사진3〉



Tim Walker, The Dress Lamp Tree, England, 2004 ⒸTim Walker

이렇게 원작과 모방의  관계에 놓이는 그림과 사진의 관계, 그 대조와 공명, 차용과 변형의 지점을 훑어가다 보면 서양미술사 속의 명작들이 단순히 미술관 안 숭배할 대상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해석하며 재탄생시킬 수 있는 창작의 원천임을 발견할 수 있다. 

패션사진의 아름다움과 그 뒤에 숨은 명화들을 추측하고 맞춰보는 쏠쏠한 재미가 있는 이 전시는 6월 23일부터 10월 7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3층에서 열린다.

 

글 석현혜 기자 사진제공 보그 라이크 어 페인팅
해당 기사는 2017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