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남아 역사가 되다 ⑥ : 6.10 민주항쟁, 격동의 현장서 역사를 담다

1987. 6.26일, 부산 문현동 로터리는 함성과 구호로 하늘이 뒤흔들리는 듯 했다. 경찰이 다탄두최루탄을 발사하자 희뿌연,
매운 최루가스로 현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곳에서 돌연 웃통을 벗고 대형 태극기 대열 앞으로 한 시민이 뛰쳐나왔다.


학생들이 먼저 거리로 나왔다. 차츰 시민들의 수가 늘어났고 시위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전국 방방곳곳에서 동시다발적 시위가 일어났고 국민운동으로 커져 갔다. 시민들의 민주적 힘은 정당하지 못한 공권력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열사의 고향에서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렸다. 26일, 부산 문현동 로터리는 함성과 구호로 하늘이 뒤흔들리는 듯 했다. 경찰이 다탄두최루탄을 발사하자 희뿌연, 매운 최루가스로 현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곳에서 돌연 웃통을 벗고 대형 태극기 대열 앞으로 한 시민이 뛰쳐나왔다.
 

"아… 그건, 정말… 정말 전율을 느꼈다. 셔터 누르는 순간, 내 평생의 특종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진기자구나, 내가 사진기자구나.  사진기자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내가 사진기자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준 사진이다." - 한국일보 고명진 사진기자



대부분 기자들은 시위대 뒤쪽에 있었지만, 한국일보 고명진 사진기자는 시위대 반대편에 위치를 잡고 있었다. 당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혼탁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일어선 시민들을 상징하는 순간을 잡아보자. 최류탄 가스가 퍼지는 순간 시민들의 고통을 찍자!”

다행히 시위대 반대쪽에 있었기에 대형 태극기와 함께 웃옷을 벗은 채 포효하는 시민을 함께 담을 수 있었다. 한국 민주화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된 이 사진은 20세기 마지막 해인 1999년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진에 포함됐다.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 1972년 유신체재이후, 간접선거로 체육관에서 선출했다는 이유로 당시 대통령을 '체육관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전 대통령의 군부 정권은 정당성이 없는 비민주성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야권과 재야세력의 직접선거제 개헌 공세 대상이 됐다. 1986년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개헌 서명운동에 1000만 명이 동참했다. 그 결과 여야가 헌법 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13일 개헌 논의를 중단시켰다. 즉 현행 헌법에 따라 후임자에게 정부이양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맞서 시민들까지 시위에 적극 지지를 보내며 거리로 나섰다. 거리의 시민들 앞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더 이상 독재자가 국민위에 군림할 수 없을 만큼 진전되어 있었고 마침내 군사독재정권은 항복했다. 

그러나 시민의 힘으로 16년만에 되찾은 직선제에서 야권의 분열로 야당이 선거에서 패배함으로써 군부독재를 청산하려는 국민의 여망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1960년 4.19혁명 또한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민주당이 집권했지만 민주세력의 분열로 인해 5.16 쿠데타의 빌미를 주고 말았다. 그래서 4.19혁명과 6월 민주항쟁은 미완의 혁명이기도하다.

우리는 30년 만에 국민혁명의 시간을 다시 맞이했다. 1960년 4.19혁명. 1987년 6월 민주항쟁. 2016년 12월 촛불혁명. 우리는 30년마다 도래한 국민혁명을 통해 민주주의가 무엇을 딛고 일어서는지, 민주주의를 향한 길이 얼마나 숭고하고 험난한 길인지 체험했다. 

촛불을 든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을 헌법 질서 내에서 탄핵시키고 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평화적으로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키는 경험을 하였다.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할 때에 시민이 먼저 거리로 나섰고 시민들이 지향해야할 민주적 가치와 길을 연 것이다. 그 승리의 경험과 함께 과거의 실패를 잊지 말아야 한다! 또다시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


글 이기명 발행인 겸 편집인
해당 기사는 2017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