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이슈]장소의 재발견④

현실과 환영의 틈새
이경희, <필름 맵 Film-Map>


 
“영화에서 어떤 특정 장소를 로케이션 한다는 것은 그 장소의 정체성으로부터 새로운 장소 개념을 끌어내는 작업이다. 그 새로운 장소 개념은 영화로 보존되고 관객에게 각인된다.”
- 이경희, <필름 맵 Film-Map> 작가노트 중

 

밀양 가곡동 준피아노학원, 밀양, 2007, 이창동 감독 


지난 4월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린 이경희의 <필름 맵 Film-Map> 전시는 전시장 초입에 극장의 관객석을 찍은 사진이 관객을 맞는다. 마치 ‘이제부터 영화가 시작되니 관람해주세요’라는 안내라도 들릴 듯하다. 전체적으로 붉은 벽면에 전시된 흑백의 사진들은 영화 속 한 장면이거나 혹은 한창 촬영 중인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사진들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다. 작가가 3년간 영화를 촬영했던 장소를 찾아 다시 기록한 이미지다.

 

경주 전통찻집 아리솔, <경주>, 장률감독, 2013


한류 드라마와 영화가 돌풍을 일으키고, 많은 해외 관광객들이 극중 장소를 찾아 한국을 방문했다. 그들은 배우들이 연기했던 장소에서 배우들이 극중했던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하고 싶어 한다. 배우들이 먹던 음식을 먹기도 하고, 그들이 취했던 포즈를 그대로 잡고 사진으로 남긴다. 극중 배역에 동화(同化)되고 그 허구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로케이션 장소에 남아있는 드라마, 영화의 자취를 쫓는 것이다. 이경희는 이렇게 영화 속 로케이션된 장소들을 찾아가, 이런 허구와 현실의 틈, 그 사이를 배회하는 인물들을 담았다.

 
“저는 영화관이 아니면 영화를 못봐요. 집에서 컴퓨터로 영화를 보면 영화에 잘 몰입이 안돼요. 눈 앞에 산재한 일도 해야 하는데, 영화도 봐야하고, 현실과 환영의 경계에서, 이쪽도 저 쪽도 발을 못 빼고 걸쳐진 상태라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도 그런 현실과 환상의 경계랄까, 그 틈을 본 것 같아요.”
 

경주 보문호, <경주>, 장률감독, 2013


특별히 사진을 찍기 전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하거나 포착하려고 기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영화의 여운을 쫒아 그 장소를 찾은 사람들이나, 혹은 그저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목격하며 그들이 마치 새로운 무대 위에 선 배우들과도 같다고 느꼈다고. 허구와 환상의 경계는 모호하고 사진 속 이미지들은 영화와 현실이 중첩된 채 새로운 내러티브를 품게 된다.

 
“영화와 그 영화를 보고 그 장소를 찾은 사람들,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내 카메라의 시선, 그리고 다시 내 사진을 보는 관객 - 이렇게 보면 마치 액자소설처럼 다양한 레이어가 이 사진을 둘러싸고 층층이 형성하게 되는 거죠.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 대사처럼 현실이 영화 같고, 영화가 현실 같은 거죠.”
 

부산 영도 영선동. <변호인> 양우성감독. 2013


이경희는 영화 <변호인>의 극중 장면인 부산 영도 영산동을 찍은 사진을 가장 애착가는 사진 중 하나로 꼽았다. 바다를 옆에 낀 비탈진 언덕길에 츄리닝 차림의 남자가 터덜터덜 올라가는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다. 영화 <변호인>은 실제 사건인 ‘부림사건’(1981년 9월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을 다뤘는데, 작가는 자신의 대학시절 가까운 지인들이 직접 그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시절이 지난 후 <변호인> 영화 속에서 부림사건을 만나고, 이 영화 속 장면을 따라 다시 실제 영도동의 언덕길에서 촬영했다. 쓸쓸한 듯 걸어가는 사내의 뒷모습은 작가가 직접 겪었던 80년대, 암울했던 시절을 함께했던 동료들의 헛헛한 뒷모습이기도 하고, 동시에 <변호인> 속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실제 사건은 영화화돼서 기호가 되지만, 다시 그 기호화된 장소에서 자신이 겪어온 시대를 곱씹게 된다. 마치 시간과 공간의 축이 뒤 섞여 혼재하는 우리의 기억처럼, 현실과 환영, 이야기와 실제는 뒤섞이며 사진 속에 공존한다.

“이 작업은 아직 끝이 아니에요. 처음에는 부산지역에서 시작했지만,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 속 장면들을 찾아 지역을 더 넓혀서 찍어볼 생각이에요. 영화와 사진, 현실과 환영, 그 사이에 틈이 있고, 내가 그 장소를 찍음으로써 그 틈 사이에 끼어들고 개입할 수 있을지 계속 실험해 볼 생각입니다.”
 
 
해당 기사는 2017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글 : 편집부
이미지 제공 : 이경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