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ll Life③ - 일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

일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 <정물Ⅱ_ representing>
 

권도연, 개념어 사전 연보, 105x105cm, Pigment print, 2014


권도연, 섬광기억 여름방학2 145x245cm, Pigment print, 2017

겹겹이 쌓여 있는 수백 장의 종이들과 구겨지고 찢겨진 책들 사이로 문장과 단어, 글자들이 떨어져 나온다. 오직 상상의 힘으로만 읽을 수 있는 책들과 버려지고 사라져감으로서 존재를 증명하는 권도연 작가의 작품들은 상처 입은 곤충의 날개처럼 애처롭다. “어릴 적 책 읽기를 좋아하는 저를 위해 아버지께서 헌책방에서 사온 책들로 지하실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주셨어요. 작지만 완벽한 세상 속에서 책 속의 모든 언어가 합쳐진 단어를 상상하며 꿈을 키워나갔죠. 하지만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일어난 홍수로 지하 도서관이 물속에 잠겼어요. 그 시절 여름방학은 서늘한 공기와 곰팡이 냄새, 물비린내로 가득했어요.” 작가는 홍수로 잃어버린 유년의 안식처와 그로 인한 상실감을 ‘섬광기억 # 여름방학2’라는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그는 책의 안쪽에서 고요하게 새어나오는 먹색 어둠과 형상들이 뭉개진 채로 화석처럼 굳어져가는 종이들, 토막 난 물고기의 비늘처럼 조사와 어미들이 떨어져 나와 눈 속에 박히는 시간들을 사진으로 표현함으로써 섬광처럼 사라진 여름방학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권도연 작가의 ‘개념어 사전’은 버려진 사전들을 수집해서 이제는 아무도 읽지 않은 텍스트와 훼손되어 가는 일러스트를 손으로 뜯어내서 촬영한 작품이다. 폐지로 버려진 사전들이 카메라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로 탄생하고 연보, 환, 과일의 세계, 환절기 등 다양한 이름을 얻으면, 유용성이 사라진 사물은 기능적이고 지시적인 본래 역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이미지로 변주된다. 찢어진 곤충의 날개처럼 보잘 것 없이 여겨졌던 사전들은 이제 점점 나름의 형체와 생기를 얻어 자유로운 사유의 세계로 날아갈 것처럼 보인다.

 

윤한종, Invisible Beings-Consistent 070 145x110cm Pigment based Inkjet print, 2017
 

윤한종, Invisible Beings-Society 036 195x145cm Pigment based Inkjet, 2017
 
오돌토돌 거친 질감을 가진 전자부품들과 1만개나 되는 부품의 이미지를 직물처럼 합성해 거대한 하나의 형상으로 만들어놓은 윤한종 작가의 작품은 ‘개인’과 ‘사회’를 낯선 방식으로 보여준다.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산업계에 종사하면서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조그만 전자 부품이 사람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후 전자부품들을 화공약품으로 부식시키거나 흠집을 낸 후 제품을 검사할 때 사용하는 카메라로 확대해 촬영하기 시작했죠. 확대하기 전에는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부품들이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어요.” 부품 하나하나를 촬영한 작품은 개인을, 전자부품을 콜라주 방식으로 합성해 만든 작품은 사회를 상징하지만, 그의 작품은 언어가 정착되지 않은 낯선 세계에서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부호처럼 낯설게 보인다. 석기시대 유물처럼 거칠고 투박하며 미세한 구멍들과 흠집을 가진 부품들은 각기 다른 생김새와 성격, 재능을 가진 사람처럼 모두 다른 모양과 기능을 갖고 있다. 그는 개별 부품을 찍은 이 사진들을 통해 비록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개인이 상처와 실패의 과정을 거치며 전자부품들처럼 소모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획일화되고 소진되어 가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거칠게 짠 직물을 벽에 걸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다른 작품 ‘Invisible Beings_Society 036'은 가까이 들여다보면 각기 다른 숫자들이 표기되어 있다. 1만개의 부품은 모두 다른 형태이고, 양품과 불량품이 섞여 있다. 이 사진은 멀리서 보면 거대한 빌딩이나 기계처럼 보인다. 개성은 사라지고 너와 나의 구분은 없어진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에서 적재적소에 각자 맡은 역할을 다하고 있지만 기계의 부품처럼 점점 소모되고 획일화 되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성공한 것처럼 행복해 보이지만 숨겨진 아픔과 상처, 실패의 기억들을 모두 갖고 있다는 메시지를 들려준다.
 

조성연 Still alive tamato, 50x40cm,Pigment print, 2016



조성연, Still alive-적시소와 비름, 100x68cm, Pigment print, 2017

줄기와 잎을 쭉쭉 뻗으며 자라는 식물들과 화병에 기괴한 모습으로 꽂힌 토마토와 줄기콩, 엉킨 실타래처럼 보이는 풍선초와 검은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사람처럼 역동적으로 보이는 잎채소와 쑥갓꽃. 이처럼 다양한 식물들의 생성과 소멸을 사진으로 표현한 조성연 작가의 작품들은 밭에 뿌린 씨앗이 흙 속의 양분과 햇빛, 물을 흡수하며 자라는 과정과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식물이 자라는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식물이 고요하고 잔잔하며 정적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식물은 작은 씨앗에서 발아해 성장하고 또, 그 씨앗을 남기는 과정을 계속 반복할 정도로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어요. 우연히 발아된 콩 싹을 보면서 씨앗은 생명이 다한 흔적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지닌 무한한 에너지의 응축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엔 흔히 접할 수 있는 콩류나 잡곡, 꽃씨의 발아 과정을 사진에 담고 관찰했는데,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숨도 쉬지 않을 것 같았던 씨앗들이 빛과 공기, 물만으로 세상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것을 카메라를 통해 보았어요. 온기로 가득한 그 씨앗들이 생명력을 품은 작은 우주로 느껴졌고, 사람의 일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조성연 작가는 직접 식물을 경작하는 경험을 통해 자연의 질서 안에서 느낀 식물들의 무한한 생명력과 경이로움, 출발점과 종착점 없이 모든 것이 끝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자연의 순환을 사진으로 표현했다.

 

김시연, Household, 85x100cm, Archival Pigment with fine art paper 2013


김시연, Yellowish, 103 ⅹ153 cm, Digital print, 2012

아슬아슬하게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여있는 찻잔들과 깨진 몸집을 기대고 있는 계란껍질, 난간 끝에 서있는 사람처럼 위태롭게 사물 위에 걸쳐져 있는 숟가락과 앙상하게 마른 가지 끝에 눈물처럼 매달린 나뭇잎. 일상에서 느끼는 우울함과 슬픔의 감정들, 삶의 위태로움을 사진으로 표현한 김시연 작가는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을 정물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공감을 얻게 한다.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속의 그늘을 친숙한 사물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위로를 얻고 편안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어요. 슬픔의 감정뿐만 아니라 일상에 있는 모든 감정을 드러냄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다른 사람들도 나와 다르지 않음을 느끼길 원해요. 일상은 불안하고 슬픈 일들이 많지만 그 순간에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고, 위태로움 속에도 균형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때문에 김시연 작가에게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란 주변의 사물이 미묘하게 어긋난 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 틈을 가능한 넓게 벌리고 그 틈으로 상상하고, 한 순간의 쉼을 체험하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의 정의나 상투적인 의미에 매달리지 않고 자유롭게 일상을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절제와 균형을 갈망하는 것.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일상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작품 속에 녹아있다. 반복적인 일들이 모여 일상이 되듯이 그녀의 작업 방식 또한 반복적이다. 노란 배경에 계란 껍질이 놓여 있는 작품은 캔버스를 노란 색연필로 모두 칠한 후에 다시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일상생활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며 수많은 드로잉을 하는 그녀는 드로잉을 완성해 사진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일상은 평온한 듯 보이지만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인 사물들처럼 위태롭고,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헤어 나오기 힘든 크레바스에 빠진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누구나 우울과 불안, 슬픔을 안고 살아가지만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모든 순간이 아름답다는 것을 말해준다.

4명의 작가의 작품을 통해 일상의 오브제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정물Ⅱ_representing>은 아트스페이스 J에서 2월 27일까지 열린다. 관람객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 평범한 일상의 오브제를 카메라에 담아낸 정물사진 한 장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얼마나 다르게 인식하고 사유하며, 바라볼 수 있게 하는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글 김수은 기자  이미지 제공 아트스페이스 J
해당 기사는 2019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