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남아 역사가 되다 ④ 수전 손택의 경고


Ⓒ 이경모
1948년 10월 19일에 발발한 여수·순천사건 당시 친일 경찰 출신의 고참 경찰들은 일찌감치 피신하였고 반군을 막았던 신참경찰들이 반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시체들을 가로질러서 아기를 업은 젊은 아낙네가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매고 있다. 




사진의 기록성이 주는 증거력 내지 객관성이란 그것이 기록한 텅 빈 현실을 임대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경고했다. 그 의도와 사용에 따라서 어떤 의미의 현실성도, 진실성도 사진 안에 담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폭력을 촬영한 사진에서 폭력을 행하는 가해자가 나쁜 사람으로 간주된다. 폭력에 이르게 된 상황 설명 없이 폭력의 결과만을 보고 판단한다면 폭행자를 악인이라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A와 B 쌍방이 폭행했지만 A가 B에 저지른 폭행만을 촬영해서 보여준다면 A를 나쁘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포토저널리즘이나 공적인 다큐멘터리사진이 진실에 다가서기위해서는 상황설명을 하는 문안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사진 사용자의 의도에 의해 문자와 함께 정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기에 사건을 기록한 사진은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상황 설명이 중요하다. 사진이 문안과 함께 할 때에 진실된 실체로서 비로소 역사와 마주 할 수 있다. 

<사진1>은 1948년 10월 19일에 발발한 여수·순천사건의 희생자 사진이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일어난 제주도 ‘4.3사건’을 진압하기위해 파견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우리는 같은 민족을 죽이러 갈 수 없다”는 민족적 양심으로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난을 일으킴에서 비롯되었다.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반군은 경찰, 친일파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경찰은 반군에게 잡히면 그 자리에서 총살당하기 일쑤였다. 반군의 주요 공격대상이 경찰이었는데 그 원인은 해방공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군정은 치안유지를 위해 일체치하의 경찰근무자나 그 앞잡이들을 중추로 해서 경찰조직을 재구성했다. 남한에서 공산주의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던 미군정은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조직화된 세력을 필요로 하였다. 미군정은 경찰조직을 그대로 이용하기 위해 ‘경력자 우선’을 내세워 일제치하의 경찰조직에 가담했던 여러 종류의 민족 반역자들을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 높은 직위로 경찰에 복귀시켰다.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친일 세력이 재등장하였고 이로 인해 민족정기를 세울 수 없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역사발전의 주체와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없었던 민족 반역자와의 갈등을 가져왔다. 즉, 친일파의 단죄가 이뤄지지 않음으로 해서 민족의 분열은 심각해졌고 이러한 민족 모순이 내란의 내면적 원인이 된 것이다.

<사진1>에서 친일 경찰 출신의 고참 경찰들은 일찌감치 피신하였고 반군을 막았던 신참경찰들이 반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시체들을 질러서 아기를 업은 젊은 아낙네가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매고 있다. 

호남신문사 사진기자 이경모가 촬영한 사진은 폭력이 빚어낸 피해 양상과 비극성을 보여준다. 폭력에 맞선 상대적 폭력은 상대가 더 가혹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타당성과 근거를 불러온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눈멀었던 미망의 시대에 폭력성은 좌우 모두에게 학살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한국사회는 광복이후 이데올로기가 지닌 자기절대성에 갇혀 오늘까지 정치.사회적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해방공간의 좌우 폭력과 같은 비인도성과 잔인성이 우리 역사에서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글 이기명 (발행인 겸 편집인)
해당 기사는 2017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