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문 《풍류》 | 빛으로 지우고 빛으로 그린
- 2024-10-17 16:46:18

공간의 재구성
전시장 문을 열면 곱고 찬란한 꽃밭에 들어온 느낌이 들기도 하고 설핏 신당 같기도 하다. 미세한 공기의 파장에도 나풀거리는 휘장이 사각의 전시장을 삼등분하면서 은밀한 세계로 들어온 느낌을 더해준다. 또한 하늘거리는 얇은 천에는 춤 사진을 쏘아서 동적인 분위기를 보탰다. 작가가 사전에 전시장을 몇 번씩 오가면서 벽면에 사진만 걸지 않고 어떻게 입체적인 느낌을 살릴 것인가를 연구한 결과다. 마침 전시장 천장 두 군데에서 돌출한 철근 빔이 있어 이를 대들보 삼아 그것에 커튼처럼 투명한 천을 매단 것이다.
첫 번째 공간은 신작 12점이 걸린 풍류의 방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공간에는 책상을 놓고 뒤편에 책가도를 실사로 프린트한 휘장을 걸어서 서재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실제로 전시 기간 내내 양재문 작가는 책상 앞에 앉아서 찾아온 사람과 차담을 나누기도 하고 혼자일 때는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전시 공간을 만끽했다. 내 집 서재처럼 꾸밈으로써 전시가 진행되는 열흘간 작가가 편안하게 전시장을 지킬 수 있게 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그리고 맨 뒤쪽 공간에는 미발표작과 더불어 기존에 발표한 사진 중에서 사랑을 많이 받은 작품을 위주로 배열했다.
물론 세 개의 방이 독립적으로 막혀있는 게 아니라 얇은 천으로 분리 효과를 낸 것뿐이어서 나뉘었지만 답답하지 않으면서 서로 적당히 간섭하고, 투명한 천 너머 궁금증을 유발하며 은밀함을 자아낸다. 최근에 전시가 열릴 때마다 공간구성에 특별히 마음을 쏟아왔던 양재문 작가는 이번 전시를 초대전이 아니라 공간을 대여해 자기 자신에게 헌정하는 전시로 구상했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특히 마음 가는 대로 해도 하늘의 뜻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70대 종심(從心 -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춤 사진을 비롯한 세상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구가 크게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한(恨)에서 출발하여 풍류(風流)에 이르다
이제 양재문의 춤도 30년을 넘어선다. 버릴 것은 버리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할 시점이다. 사실 춤에 대한 맨 처음 그의 기억은 부정적이었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춤추는 모습을 보고 왠지 거부감을 가졌던 때문이다. 젊은 날에 켜켜이 쌓인 미숙한 감정들로 인해 어머니와 갈등을 빚고 반목하던 중에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는 오랫동안 회한에 빠져 방황했다. 풀 수 없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는 채로 춤 사진을 시작했는데, 장노출로 초점이 흐린 흑백사진에서 살풀이춤을 추는 소복한 여인은 얼핏 어머니의 그림자 같다.
“애도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풀지 못해 한으로 쌓였어요. 그런데 한을 풀고 가라앉혀 평화로움으로 가는 게 한국 춤의 본질인 것 같아요. 춤 사진을 찍으며 나도 그런 과정을 거친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는 양재문 작가가 맨 처음에 찍은 춤 사진은 의뢰받아 촬영한 무대 위 공연 사진이었다. 그때는 단순히 주어진 업무를 수행했을 뿐이어서 훗날 춤 사진을 작품으로 작업하게 될 줄 몰랐다. 1980년대 사진가로서 초기 10년간은 다양한 소재를 넘나들며 갈 길을 탐색하다가 마치 어떤 이끌림에 의한 것처럼 1990년대에 다시 춤 사진을 찍게 되었고 1994년에 사진집 <풀빛여행>이 발표되었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인물사진이나 풍경사진을 놓지 않았는데, 2천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점 춤 사진으로 집중되었고 마침내 양재문의 독특한 브랜드가 된 춤 사진에 이르렀다.
양재문 작가에게 춤과 어머니는 뗄 수 없는 관계다. 어머니의 춤을 싫어했던 그가 결국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춤 사진으로 표현했고, <풀빛여행>, <비천몽>, <아리랑 판타지> <처용나르샤>, <화접몽> 등 일련의 춤 사진 시리즈를 전개해나가면서 비로소 어머니에 대한 한과 그리움을 풀고 기쁨과 환희로 접어드는 과정을 밟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에서조차 해탈하여 춤조차 내려놓고 자유롭게 놀자는 해방의 단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그의 춤 사진은 작가가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완숙해가는 기록이고 그 과정은 어머니와 주고받은 대화와 화해의 시간이었다.
“꿈에서 어머니가 나에게 하얀 보자기에 싸인 학을 주셨어요.”
그 꿈은 시간이 꽤 흐른 뒤에 해몽이 되었다. <비천몽>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그 꿈이 떠올랐다는 것. “아, 어머니가 내게 주신 것이 바로 하늘로 날아가는 한 마리 하얀 학, 비천몽이었구나!” 미신처럼 <비천몽> 시리즈부터 큰 반향이 일어나고 좋은 결과가 쏟아지자 그는 새삼스럽게 ‘어머니의 선물’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렇듯 춤과 어머니가 동일시되었던 양재문 작가의 <춤> 시리즈는 그 이후 맺음에서 풀기로,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군무가 등장하고 선이 굵은 <처용무>, <농악> 시리즈 등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나’에서 ‘우리’로 확장되었던 그동안의 춤 작업에서 놓여나 자유를 구가하자는 의미의 “풍류”를 말하고 있다.
풍류, 쉽게 말해 한바탕 멋있게 놀자는 말이다. 조금 놀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논다는 것은 맺힌 데가 없는 자유, 해방을 뜻한다. 목적이 먼저이고 욕심이 작동하고 또한 계산이 빠삭하게 작용하면 진정 즐겁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풍류는 무심의, 무욕의, 무개념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또 다른 욕망(?)의 발현이다. 한국 춤을 통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승화시키면서 한국의 한과 흥을 보여주는 서사시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의 춤 사진은 더 구체적으로는 작가 내면의 개인적인 스토리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춤을 통해 형상화한 서정시라는 생각이 든다.

춤이 꽃이 되는 순간
이번 신작의 특징은 빛으로 지우던 작업에서 빛을 쌓는 작업으로 전환했다는 점이다. 장노출로 무희가 움직이는 궤적을 빛으로 지워냈던 그간의 작업에서 반대로 무희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작품을 시도했는데 정반대의 개념은 배경의 변화에서 더 잘 드러난다. 순백에서 바뀐 컬러 배경으로 인해 빛의 축적이 더 잘 드러나고 특히 한지로 프린트하여 원작이 가진 아우라를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 한지는 모두 결이 달라서 오로지 하나뿐인 오리지널리티를 담보하는 매력이 있다. 촬영부터 현상과 인화 과정까지, 직접 작가가 수행하는 까닭은 디지털 프로세스로 인한 기계적인 과정을 최대한 작가의 손으로 조절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수백 종의 한지를 시험했는데 한지는 원작의 아우라를 표현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자신의 작품에 가장 잘 맞는 한지 연구를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2023년에만 세 번의 전시를 열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양재문 작가는 최근에는 춤의 과정에서 피어나는 ‘꽃’을 포착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이번에 전시된 몇 작품에서 한 송이 꽃을 보는 느낌을 받는데, 작가는 춤은 춤인데 내 안에서 피어나는 꽃을 표현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이미 <화접몽>이라는 제목에서 작가에게 춤과 꽃과 꿈이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깊은 꿈속에서 헤매는 것 같은 춤사위가 한순간 꽃으로 피어나고, 마치 장자의 나비처럼 꿈과 현실이 뒤엉켜 춤인 듯 꽃인 듯 몽롱한 경지를 보여주는 사진이 앞으로 그가 작업할 춤 사진의 핵심이 될 것 같다.
작가가 굳이 전시장의 가운데 부분을 서재처럼 꾸민 것은 전시라는 것이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만 이번만큼은 전시장에 앉아 스스로 고요히 내면의 독백을 듣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였다. 작품에 맞는 모델을 섭외하여 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고 힘든 작업이어서 사람 대신에 풀을 찍을까, 여기서 멈출까, 고민했다는 그는 그동안의 춤 사진을 걸어 놓고 혼자 도 닦는 기분으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즉 그동안의 사진을 깨고 싶어서 시작한 전시였지만 다행히 새로운 문법을 찾았다. 어떤 형용사로도 완벽하지 않아서 형용사가 필요 없는 꽃처럼 앞으로 그는 그냥 그 자체로 본디 그러함을 추구하는 춤 사진을 하겠다는 것이다. 춤을 버리고 싶었던 이번 전시에서 춤이 꽃으로 피어남을 확인한 작가가 보여줄 다음 전시는 따라서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주는 춤 사진이 되지 않을까, 양재문 작가의 화양연화가 기대된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24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해당 기사는 2024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