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남아 역사가 되다 ⑪ : 과학문명으로서 사진을 사랑한 고종


 
고종, 1884년 경,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최초의 고종 어사진, 창덕궁 후원 농수정에서 지운영 촬영으로 추정, 1884년 경.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구한말 새로운 과학기술의 수용 과정에서 크고 작은 샤머니즘과의 충돌이 있었다. 예컨대 전기는 서양의 도깨비 불로 생각되었고 서울에 전차가 다니기 시작했을 때엔 가뭄의 원인을 전차 때문이라고 여겨 한때 철거하려 한 적이 있었다. 또한 지석영이 종두를 접종시키는데 우두를 맞으면 소가 된다해서 어려움이 많았다한다.

사진 또한 외국인들이 어린이를 잡아다가 뜨거운 가마솥에 삶아서 사진의 약품으로 사용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으며 이로 인해 외국인촌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지 못한 때도 있었다. 또 카메라를 나무에 비추면 나무가 말라 죽는다든가 셋이서 촬영하면 가운데 사람은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기도 하였다. 사진관은 밤마다 날아오는 돌맹이 때문에 영업을 하지 못하고 이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샤머니즘과의 충돌은 작게는 소극적 거부에서 크게는 파괴 행위까지 확대되어 갔다.


이렇듯 과학문명에 관한 몰이해의 시기였기에, 고종이 사진가를 불러 어사진을 촬영하도록 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고종은 개화정책을 펼쳐 서양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지로 서구문명에 관심이 높았다. 사진으로 대표되는 신문명에 대해 이해를 갖고 있었고 사진촬영을 허락함으로써 사진술을 인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이 전제군주제였음을 감안하면 프랑스의 사진술공표에 버금가는 조선에서 사진술 공인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사진학자들 가운데 한국에서 ‘사진의 날’을 정하게 된다면 고종의 첫 어사진 촬영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윤치호일기’에 따르면, 사진가 지운영은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이 고종과 왕세자 순종을 촬영하게 되는 둘째 날 로웰에 뒤이어 그들을 촬영하였다.

로웰뿐만 아니라 W.R. 찰스(‘Life in Corea’ 1888), 비숍 (‘Korea, her neighbors’ 1898), 게일(‘Korea Sketches’ 1898), 훌버트(‘The passing of Korea’ 1906) 등 한국에 초청된 관리, 교사, 선교사들의 저술에서 주목할 만한 고종 사진들을 볼 수 있다. 고종의 사진이 많다는 것은 고종이 적극적으로 사진촬영을 허락했다는 반증이다.

고종은 왜 사진 촬영에 적극적이었을까? 그의 숨은 뜻은 무엇이었을까? 무한으로 기술복제가 가능한 사진은 복제되는 만큼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어 정치적기능이 강하다.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널리 알리고자 사진가와 사진매체를 활용할 줄아는 정치가적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청나라, 러시아,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 세계열강과 대등한 자주 독립국가로서 조선을, 대한제국을 세계에 인식시키고 왕의, 황제의 건재와 위엄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싶다. 
 

글 이기명 (발행인 겸 편집인)
해당 기사는 2017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