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호, 내 안의 나를 찾아서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열망을 넘어 이제는 그의 삶 자체를 예술로 만들고 싶다는 사진가 강영호(1970년~). 성공한 광고 사진가로 꼽히지만, 처음부터 사진가가 될 꿈을 가졌던 건 아니었다. 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여자 친구의 사진을 근사하게 찍어주려고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내재되었던 감각이 뿜어져 나오면서 점점 사진의 세계로 다가가게 되었던 것. 광고 사진가로 성공하길 꿈꾸는 이들의 롤 모델인 강영호 작가의 삶과 사진 철학은 그의 직선적인 성격만큼이나 명료하고 직관적이다.


영화가 소설이라면 영화 포스터는 한 편의 시(詩)
인생길에서 골목길을 돌아서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른다. 강영호 작가, 그도 그랬다. 어려서부터 특별한 재능을 발휘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범하고 유복하게 자랐다는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홍익대학교 불어 불문학과에 진학했다. 패션 디자이너였던 어머니가 아들에게 패션 사업을 대물림하기 위한 수순으로 프랑스 유학을 보내고자 불어 불문학을 권했던 것. 본인도 어학과 패션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는 그는 그러나 아직은 그의 앞에 어떤 삶이 펼쳐질지 알지 못했다.

그가 처음 사진을 찍게 된 것은 캠퍼스 커플인 여자 친구가 연극을 하는데 필요한 인물 사진을 찍어주면서였다. 그때까지는 사진에 별 관심이 없었고 사진을 잘 찍는 법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김중만 작가가 사진 찍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나도 사진을 해볼까?”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 후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찾아갔더니 김중만 작가가 시원스럽게 답을 주었다. “사진해도 되겠네!”

그럴 즈음 청바지 닉스의 사진 공모전에 응모했다가 당선되어 일본으로 청바지 사진을 찍으러 가는 특전을 받게 되었다. 20대 중반, 묘하게 자꾸 사진에 얽히기 시작했지만 사실 사진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 그로서는 전문적인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난감했다. 따라서 촬영 기법보다는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 수조에 물을 채우고 물고기를 넣은 후 청바지를 찍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그것이 채택되어 그의 수조 속 청바지 사진이 탄생했다. 처음에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영화 포스터 사진을 찍게 된 것도 우연히 연결된 인맥으로 당시 최고의 사진가와 경합할 기회를 얻었는데 결국 그의 사진이 채택되었다.

“사진을 전공한 게 아니라서 기술적으로는 미흡한 부분이 많았어요. 그래서 상상력을 발휘한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잘 먹혀들었고, 이상하게 사람과 연결도 잘 되었어요. 행운이 따랐던 거죠.”          

1999년에는 그가 촬영한 첫 영화 포스터가 세상에 나왔다. 심은하, 이정재 주연의 “인터뷰”라는 영화였는데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영화 포스터는 화제가 되었다. 심은하 씨가 영화 개봉 전에 TV에 출연해 인터뷰하면서 “영화가 성공할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영화 포스터가 참 마음에 들어요.”라는 느닷없는 포스터 홍보를 해주었다. 이 말이 신호탄이 되어 3~4년 동안에 무려 100편이 넘는 영화의 포스터 작업을 하게 되고 문자 그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나는 영화가 한 권의 소설이라면 포스터는 그걸 압축하여 보여주는 한 편의 시라고 생각했어요. 그때까지는 누가 출연하는 어떤 영화라는 홍보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나는 포스터 한 장으로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려고 했거든요. 그런 시도가 참신했던 것 같아요.”

시기도 잘 맞아떨어졌다. 한국 영화의 붐을 맞으면서 영화 산업에 큰돈이 몰렸고 그 와중에 그는 사진가의 몸값을 올리면서 신나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영화 포스터에서 사진의 역할이 디자인의 소스로 쓰이는 분위기로 바뀌면서 사진가의 목소리가 작아지자 그는 영화 포스터에서 광고 사진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갔다. 그 사이에 그에게는 핫한 광고 사진가라는 딱지가 붙어있었다.



영화 <인터뷰> 포스터 사진 ⓒ강영호



영화 <파이란> 포스터 사진 ⓒ강영호


강영호 브랜드의 요체는 철저한 사전 준비     
사진가가 되기 위한 훈련과 예행연습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사진가가 되어버린 강영호 작가가 건너뛴 과정은 그의 타고난 감각으로 커버되었지만, 그의 프리젠테이션 실력과 협상력도 중요한 뒷받침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촬영 전에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함으로써 사진이 잘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게 더 관건인 것 같다고 강조한다. 확실한 콘셉트를 갖고 관계자들을 설득하여 촬영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게 만들고 특급의 모델을 섭외하여 최적의 환경에서 촬영을 진행하면 좋은 사진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 특히 그의 기발한 상상력과 탄탄한 스토리 구성력은 늘 새로움을 요구하는 광고계에서 빛을 발했다.

“영화 포스터에서 멀어지면서 맡은 첫 번째 광고는 지오다노 촬영이었어요. 이번에는 패션 사진을 영화처럼 찍었더니 아주 반응이 좋았어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광고 사진이 정서적으로 가닿은 것 같아요.”

첫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그에게 일감이 몰려왔고 그는 작가 정신을 발휘하여 늘 새로운 시도로 사진가의 전문성과 창의성을 발휘하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배우 전지현과 김혜수 같은 특급 모델들과 감(感)이 통했고, 그런 공감대는 결과적으로 그의 촬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의외로 자기 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없이 편하게 가려는 모델들이 많아요. 그런데 전지현 씨 같은 경우는 톱 모델이지만 새로운 시도를 하자고 제안하면 흔쾌히 수락하고 사진가를 믿고 따라와요. 덕분에 2000년대에 전지현 씨가 등장하는 광고 사진은 거의 다 제가 찍은 사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함께 작업을 많이 했어요.”

광고는 철저히 비즈니스다. 어떤 분야나 그렇지만 광고 사진에서는 사람을 다루는 기술,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하나의 광고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돈을 가장 많이 쓰는 광고주와 돈을 가장 많이 받는 모델이 ‘갑’이다.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 스태프는 ‘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을이 갑을 잘 움직여야 좋은 광고 사진이 나온다. 그리고 갑을 움직이는 힘은 사진가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모델과 사진가 사이에 믿음의 카르텔이 형성될 때 좋은 사진이 나온다. 그렇게 믿음은 더 굳은 믿음으로 발전하고 인연은 새로운 인연으로 확장되면서 강영호 작가의 광고 사진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2009년, 그가 갑자기 핸들을 확 꺾지만 않았다면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라도 광고 사진가로서의 화려한 명성이 40대까지 쭉 이어져 지금까지도 여전히 광고 사진가로만 머물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하던 대로 쭉~’ 대신에 2009년 11월에 성곡미술관에서 <99Variations>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어 새로운 실험과 변화를 선보였다.

 


김혜수, 휘슬러 광고 ⓒ강영호



지오다노 광고 사진 ⓒ강영호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
2009년, 그의 나이 마흔. 10여년의 성공 가도에서 몸을 돌려 새로운 길로 달려보고 싶은 욕망을 품었음직하다. 그것은 광고 사진가 강영호에서 예술가 강영호로, <99Variations> 라는 전시 제목처럼 자신을 다양하게 변주해보고 싶은 열망으로 나타났다. 그에게 ‘춤추는 사진가’라는 별칭을 붙여준 이 전시를 통하여 그는 사진가로서 변곡점을 찍으려 했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좀 지쳤던 것 같아요. 이젠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심이 생겼어요. 당장 광고 사진을 찍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슬슬 주체적으로 내가 나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사진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그 이후 10년 동안 그는 자아를 성찰하는 작업과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면서 하고 싶은 작업과 잘할 수 있는 작업의 접점을 찾아갔다. 2009년의 전시가 그동안 눌러놓았던 예술 본능을 한꺼번에 분출시킨 것처럼 격정적이었다면 그 이후는 조금 더 정제된 작업의 형태로 나타났다. 일방적인 격정의 토로에서 진솔한 대화를 모색하는 변화를 보여준다. 그것이 중앙일보에 연재한 “Who are you?”라는 정치인들의 인물 사진에서 그리고 거기서 진일보한 KBS와 진행한 국민의 마음 캠페인 “한국 사람” 인터뷰를 통하여 드러난다.

2016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진행된 “후아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치인들의 포트레이트이다. 문재인, 박근혜, 안철수, 박원순, 안희정, 김무성 등등, 그들은 우리가 거의 날마다 뉴스를 통하여 접하는 익숙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익숙함과 낯섦이라는 상반된 요소를 충족시켜주는 시도가 필요했다. 작가는 그의 카메라 앞에 서는 그들에게 똑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검은 상의를 입고 검은 배경 앞에서 촬영했는데 그 이유는 ‘얼굴’에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의상과 배경을 검은색으로 누르고 얼굴의 표정만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작가의 의도가 적중했다. 그 작업에 이은 “한국 사람” 인터뷰는 KBS와 2년간 작업하였고, 유명한 정치인 대신에 이 땅의 보통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작업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만나 인터뷰하는 것을 좋아해요. “한국 사람” 인터뷰는 계속하고 싶은 작업이었는데 방송국 사정으로 끝나버렸어요. 그래서 언젠가 나의 개인 작업으로 다시 시도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KBS <한국사람> 은평소방서 구조대 ⓒ강영호



KBS <한국사람> 치매엄마를 돌보는 일흔두살 황점갑 ⓒ강영호



강영호 작가 셀프 포트레이트 <99Variations>에서


10년의 매듭
그는 홍대 앞 토박이다. 지금의 그의 작업실은 홍익대학교 정문 앞에서 불과 몇십 미터 떨어져 있는 명실상부한 홍대 앞인데, 그곳에서 지금까지 40년 이상 살았다고 한다. 홍대 앞에서 자라 학교도 홍대를 다녔고, 그 집터에 7층 빌딩을 올려서 사진 스튜디오와 사무실, 살림집으로 쓰고 있다. ‘홍대 앞’이라는 고유 명사에 특별한 추억과 애착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가 젊은이들의 문화 예술의 성지처럼 여겨졌던 그곳이 점차 상업 지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올해가 가기 전에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작업실 건물의 지하층에 갤러리를 개관하는 것이다.

“요즘 제가 생각하는 것이 함께 문화 예술을 살려나가는 것이거든요.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자는 것인데 이게 같이 가야 하는 것이더라고요. 우리가 경제 강국은 되었어도 백범 선생이 꿈꾸셨던 문화 강국은 아직 아니잖아요. 홍대 앞 문화 지킴이부터 시작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아내도 홍대에서 예술학 과정을 공부하고 있어요.”   

강영호 작가에게는 10년마다 하나의 큰 매듭이 지어지는 것 같다. 1999년 서른에 광고 사진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여 폭풍처럼 휘몰아치듯 일에 몰두했고, 2009년 마흔에 개인전을 열면서 사진가로서 새로운 변신을 모색했으며, 그리고 2019년 쉰에 이르러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로 무게 중심을 이동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남과 다른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겠다는 열정으로 치달아온 그가 이제는 자신의 삶에서 배어 나오는 진솔한 작품을 하고자 한다. 억지로 머리로 쥐어짜서 나오는 작품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삶에서 넘치고 흘러나오는, 생각이 앞서는 작품이 아니라 감각이 드러나고 마음이 보이는 그런 작품이 좋아진다는 것. 끼가 넘치는, 진실한 이야기가 들어 있는, 작가의 삶이 체화된 그런 작품들 말이다.

“몇 년 동안 일을 줄이고 주변을 살피고 작가들과 활발하게 접촉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인생에 대한 밑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사실 작품은 삶의 결과여야 하잖아요! 삶 따로, 작품 따로, 그런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당장의 작업보다 자신의 삶을 먼저 가다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니 그가 자신을 정제하고 숙성시킨 후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를 펴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어차피 책장을 넘겨야 다음 이야기를 알 수 있고 골목을 돌아서야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이므로 지천명의 나이에 이른 작가의 다음 행보를 큰 기대를 갖고 기다려본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19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