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남아 역사가 되다 ⑧ 1945년 8월 17일 인덱스로서의 사진

광복의 기쁨에 태극기를 신명나게 휘날리며 땀범벅이 될 만큼 만세를 외치고 또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태극기의 형태가 이상하게 보이는데, 그 이유는 일장기를 덧칠하여
태극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장기를 덧칠한 태극기는 친일청산을 가늠하는 인덱스이다. 
Ⓒ이경모

8월이면 신문이나 방송에서 쉽게 접하는 사진이 있다. 광복의 아이콘으로 1945년 8월 해방이 된 기쁨으로 거리로 나와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촬영한 사진이다. 이 사진에 관한 캡션으로 ‘1945년 8월 15일 촬영’이라고 표기하는 실수가 매체에서 왕왕 있지만 실제 이 사진은 8월 17일에 촬영된 것이다. 누구든 광복의 날에 그 소식을 듣자마자 전국 방방곡곡의 국민들이 반사적으로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으리라 단정하기 쉽다. 당연히 15일 일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사실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매체의 반복된 실수가 겹쳐 15일에 촬영되었다고 믿게 된 것이다. 1945년 만세소리가 삼천리 마을 곳곳에 울려 퍼진 것은 17일이었다.

17일 아침부터 흥겨운 농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농악대 소리에 어깨춤이 절로 나며 신바람나는 축제의 마당이 펼쳐졌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광복의 얼굴, 해방의 몸짓으로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17일이 되어서야 이렇듯 신바람을 일으켰는가하는 것이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해 광복 소식을 주위사람에게 알리는데 이틀이나 걸렸다고 예측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긴 듯하다. 군중심지에서 벗어난 면·리 단위일수록 광복을 실감하지 못하여 15일은 무심코 지나갔고 16일에도 사람들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탐색하고 있었다는 것이 보다 더 설득력있는 이유인 듯하다. 그 시간은 광복이 확실한지 확인하는 절차였고 검증이었다. 35년간 식민지 백성으로 온갖 고초와 착취를 견뎌야 했던 그들은 그만큼 방어적이고 냉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광복의 순간에도 기쁨의 감정보다 자제된 이성으로 대처했던 것이다. 
 
 
Ⓒ이경모

한편 이 사진에서 우리민족의 일제 청산에 대한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인덱스를 발견할 수 있다.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는 기호가 지시물과 인과적인 관계에 의해 기호로서 기능하는 것을 인덱스(Index, 지표)라 했다. 즉 기호가 그 대상과 실존적 연결을 이루고 실제적 결부성에 의해 대상의 영향을 받고 그 사실에 의하여 그 대상의 기호로서 기능하는 것을 인덱스 기호라 한다. 예를 들어 콧물, 재치기, 미열 등의 증상은 감기나 알레르기 같은 병의 인덱스이다. 선거유세 기간 중 유권자에게 돈봉투를 건네주는 운동원을 찍은 사진에서 돈봉투는 금권, 타락 선거를 지시하는 인덱스가 된다.  

광복의 기쁨에 태극기를 신명나게 휘날리며 땀범벅이 될 만큼 만세를 외치고 또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태극기의 형태가 이상하게 보이는데, 그 이유는 일장기를 덧칠하여 태극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장기를 덧칠한 태극기는 친일청산을 가늠하는 인덱스이다. 당시 극심한 물자난으로 천조차 구하기 어려워서 일장기를 재활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한다. 그렇다면 정부청사를 구하기 어려워서 총독부 건물을, 대통령관저가 필요해 일제 총독 관저를 재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양해해야 하는가. 그러나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친일 세력이 재등장하였다는 것이다.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없었던 민족 반역자들, 친일정치인, 친일경찰, 친일군인...... 등의 재활용! 친일인사의 단죄가 이뤄지지 않음으로 해서 민족정기를 세울 수 없었고 역사 또한 굴곡질 수밖에 없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현재진행형이다.  
 

글 이기명 발행인 겸 편집인
해당 기사는 2017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