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쓴 역사 ② 빗개가 바라보던 제주의 4.3풍경, 유별남 〈빗개〉


ⓒ유별남 〈빗개〉 _ 아끈다랑쉬, 2017. Pigment print
 
제주의 봄은 슬픔과 함께 온다. 푸르게 물드는 오름과 노랗게 핀 유채꽃도 그 슬픔을 다 가릴 수는 없다. 봉오리 째 뚝뚝 떨어지는 붉은 동백꽃은 70년 전 4.3 사건 때 스러져버린 목숨과 그들이 흘린 핏물을 연상시킨다. 70년 전 4.3 사건 때 살기위해 동굴이나 비탈에 숨어서, 망을 보던 아이들의 시선에도 제주의 봄은  슬픔과 다름 아니었으리라. 유별남 작가는 오는 4월 3일부터 22일까지 류가헌 갤러리에서 〈빗개〉 전을 연다. 이 전시에서는 ‘망보는 소년’의 시선으로 제주의 4.3을 환원하는 작업과 제주 4.3 생존자들의 증언 영상이 함께 전시된다.

제주의 모든 지역은 너무 아름다워서 어느 곳을 가도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그렇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 유별남 작가의 〈빗개〉는 그 시선의 높이가 중요하다. 마치 어린 아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듯 낮은 시점에서 내다 본 세상은 아름다우면서도 또한 생경하다. 갈대나 돌담, 풀잎이 바로 정면을 가득 메우고, 하늘과 구름, 바다는 그 너머로 멀리 잡힌다.

‘빗개’는 본래 제주말로 어린 소년, 소녀를 이른다. 제주 4.3 때 토벌대와 무장대, 어느 쪽에 발각돼도 수탈과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주민들은 은신처에 숨어서 어린 아이들에게 망을 보게 했다.

유별남 작가는 제주 4.3을 다루기 위해 이렇게 망을 보던 아이들의 시점에서 제주의 풍경과 사계를 촬영했다. 제주 다랑쉬굴 앞, 도틀굴 숲속, 정방폭포, 중간산 마을 등은 제주 4.3 당시 민간인 학살이 이뤄졌던 지역이다. 기실 유골이 발견되고 학살터로 공식 인정된 곳 외에도, 4.3 당시 제주의 모든 곳은 거대한 학살터였다. 바다로 갇힌 제주에서 태어난 그에게, 4.3은 그저 지나간 일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가족들을 둘러싼, 분명히 존재하지만 누구하나 또렷이 말하지 않고 모른 채 하는, 거대한 침묵이자 의문이었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사진기를 들고, 70년 전의 이야기를 찾아 헤맸다. 다큐멘터리사진에 있어 ‘현장’은 무엇보다 중요한데, 어디에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 그 아픔을 기리는 무덤과 기념비들, 또는 피해지역(섬 전체가 피해지역일진데), 생존자의(제주도민 모두가 생존자인데 누군들) 얼굴을 흑백으로 담는 것도 현장은 아니었다. …그러다 찾은 방법은 내가 과거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내가 빗개가 되어 그 감정으로 눈앞의 풍광을 바라보고 싶었다. 아니 그 방법이 나에게는 유일했다.”고 적었다.

그렇게 빗개의 시선으로 내다본 제주의 풍경은 아름다우면서도 서글프다. 눈 덮인 오름도, 어스름이 묻어나는 숲 속 길도, 저 멀리 내다보이는 제주의 바다도, 그 풍경을 겁먹은 시선으로 두리번거렸을 4.3 때의 어린 빗개의 시선으로 보면 두려움이 깔리기 때문이다.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 그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아이의 심경은 오죽했으랴?

4.3 당시 빗개였던 이들, 이제는 성장해 어른이 된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두려움은 생생하게 와닿는다.

“토벌대든 무장대든 언제 누가 쳐들어올지 몰라 무서운 마음으로 숨어서 망을 봅니다. 어릴 때니까 그렇게 종일 마을 뒷산에서 망을 보다보면 지루해지기도 합니다. 그럼 저도 모르게 주변에 풀꽃도 건드려보고 돌담에 기대 하늘도 올려다봅니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고향 참 아름답구나...’ 그러다 새가 날아오르는 작은 기척에도 소스라쳐 놀라지요.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해당 기사는 2018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