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산업이 문화를 만나 예술이 되다, 김용호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된다.”
- 루신(Lu Xun)


예술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공감하며 상상을 펼칠 수 있다면 그것이 예술이 된다. 20여 년간 광고사진과 예술사진을 넘나들며 작업해온 김용호 작가가 2017년에 내놓은 한 권의 사진집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현대자동차의 7개 해외생산 공장을 중심으로 촬영한 이 사진들은 작가가 어떤 철학을 갖고 어떻게 사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것이 한 송이 꽃이든 차가운 금속성의 자동차이든 우리의 미감을 자극하고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브라질 프레스 공장과 아마존 정글의 식물


길을 만드는 사람들

그 옛날부터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길을 만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비단이나 귀한 향료가 건네졌으며 다양한 문화가 전해졌다. 지구의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우리나라도 오래 전부터 험난하고 좁은 그 길을 따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하며 그 길에 발걸음을 보탰다. 그 길은 동서교역과 문화교류의 길이었지만 때로는 생명과 죽음의 길이 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실크로드로 통칭되는 길의 의미는 교류와 소통을 상징한다.

 

인도 엔진 공장과 사원 입구의 노점의 장식품


광고사진가가 자동차 사진을 찍는 일은 의뢰인이 원하는 이미지를 의뢰받은 사진가가 구현하면 되는, 하등 특이할 것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자동차에서는 6년여를 함께 일해 온 김용호 작가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작가가 자유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광고사진이지만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해달라는 제안이었다. 그 결과 2015년 여름부터 1년여에 걸쳐 7개국 23개 도시를 방문하며 8만 컷이 넘는 사진이 만들어졌고 영상작업도 병행했다. 그 옛날 수만리 길을 걸었던 실크로드 대장정처럼 작가는 긴 시간 유례없는 촬영을 통해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이다.


현대자동차의 ‘통 큰 제안’은 작가에게 기존의 광고사진과는 다른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욕과 열정에 불을 붙였다. 다른 작업에서도 항상 그래왔지만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많은 시간을 리서치하고 공부하며 사전 준비하는 데에 보냈다. 마침내 실크로드와 현대자동차의 이미지를 연계하는 콘셉트를 짜냈다.

 

터키 의장공장의 수밀테스트장과 아야소피아 대성당의 내부


사실, 자동차는 길을 전제로 한다. 길이 없다면 자동차의 존재가치가 없다. 반면 자동차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길이 뚫리고 확장되었다. 길과 자동차는 필수불가결한 관계인 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50년 전인 1967년에 실크로드의 가장 동쪽 출발지이며 종착지인 신라시대의 경주, 그 옆 해안도시인 울산에 현대자동차가 둥지를 틀었고 그 이후 첫 해외생산기지를 터키에 세웠다는 점이다.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해주는 관문으로서 역사적으로 항상 동서교역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길 위에서 길을 만나다


 

체코 프레스 공장과 프라하 큐비즘 양식의 실내 장식

 
김용호 작가는 현대자동차가 뻗어나간 길을 따라 터키를 시작으로 인도, 중국, 미국, 체코, 러시아, 브라질, 7개국의 해외공장을 촬영했다. 이러한 대형 프로젝트를 풀어나갈 키워드로 그는 현지의 생산기지와 문화를 접목하는 방법에 착안했다. 자동차를 생산하는 공장 시스템은 국가별 차이가 거의 없지만 공장에서 일하는 현지사람들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뭔가 공장의 표정이 다르고 공장이 위치한 지리적 환경이 다르다. 따라서 자동차의 이미지를 그들의 삶과 문화의 이미지와 병치하는 방법으로 국가별 특색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도장공장 로봇팔과 예르미타시 미술관 철갑기병 갑옷팔

 


“자동차처럼 현대문명을 극명하게 대표하는 오브제가 있을까요? 그런데 예를 들어 자동차 공장의 로봇 팔이 러시아 예르미타시 미술관의 중세 철각 기병 갑옷의 팔 부분과 아주 흡사해요. 참 신기하죠. 수 세기의 시차를 두고 있는 데도 서로 생각이 통한다는 점이요.”

 

디렉터스컷 155*200mm, 456p, PUR제본



 
현대자동차 255*330mm, 296p, 양장제본

 
현대자동차의 브랜드이미지 북을 제작한 뒤 다시 작가의 디렉터스 컷으로 만든 456페이지 사진집에는 현대자동차 공장사진과 그 지역의 건축물이나 풍경, 예술품들이 나란히 편집되어 있는데 책장을 넘기다보면 어떤 것이 산업사진이고 어떤 것이 예술사진인지 얼핏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둘 다 아름답고 예술적이다. “아름다움은 도처에 있구나!” 기능이 앞선 것이라 해서 완전한 아름다움을 갖추지 못할 이유는 없을 터, 예민하게 발견해주는 눈만 있다면 말이다.

 

남양연구소 충돌테스트 장의 벽면, 자동차가 충돌하여 만들어낸 흔적

 
특히 2013년 “모든모던” 국내 프로젝트 작업 중 자동차충돌테스트 벽면을 촬영한 사진은 대표적이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충돌테스트를 함으로써 상처를 입은 벽의 흔적이 추상적인 회화를 능가하는 작품이 된 것은 순전히 눈 밝은 사진가 덕분이다. 그는 거대한 공장 내부에서 아주 작은 흔적 하나조차 놓치지 않고 그것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시각화 했다. 그리고 그 지역의 문화와 연계시키면서 이야기를 더욱 증폭시켜 풍성한 스토리텔링을 완성해나갔다. 작은 것을 크게 보고 큰 것을 작게 보는 자유자재한 그의 시선이 기계와 자동차를 소재로 풍성한 문화콘텐츠를 만들어낸 것이다. 사실 오래 전부터 실크로드를 오간 것이 물질문명과 함께 문화의 교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크로드라는 아이디어를 가설로 콘셉트를 풀어나간 것은 탁월한 접근이었다.


스스로 길이 되다

 
 
김용호 작가는 사진뿐만 아니라 아트디렉터로서 영상과 디자인, 인문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아티스트이다. 그가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다양한 관련 자료부터 수집하고 인접분야의 예술과 연계시켜가면서 사진으로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은 그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

 
“가장 고민하는 지점이 남이 보지 못한 것을 찾는 것, 진실은 보이는 것 너머에 있고 형식은 본질의 표면일 뿐이므로 ‘정신’을 찾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어서 매번 고민입니다. 기술적으로 잘 찍는 사진은 나 말고 다른 사진가도 할 수 있거든요. 그러므로 나만의 것이 있어야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겠어요?”


김용호 작가는 ‘나만의 것’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기술자가 되지 말고 남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을 생각해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주변에 관심을 갖고 정보를 접하고 생각을 더 많이 해야 의뢰인이 원하는 것 이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김용호 작가의 이번 현대자동차 브랜드이미지 북 “모든 모던 월드”는 우리나라 광고사진에 한 획을 긋는 새롭고 방대한 작품이다. 특히 그가 돋보이는 것은 일회성 광고사진으로 그치지 않고 국내외 미술관에 초대되어 전시를 하고 작품으로 판매되고 소장이 된다는 점이다. 2012년 현대카드 잇 브랜드이미지 작업인 “우아한 인생”은 서울의 류화랑에서 전시가 열리고 작품이 판매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이례적인 일은 작가의 말대로 형태를 찍은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찍은 것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재능 있는 작가들이 참 많아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사진과 기업의 연계성을 찾아 사진가들이 기업의 후원도 받고 사진이 팔리는 풍토를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김용호 작가, 그는 스스로 길이 되고자 하는 것 같다. 광고사진도 작품으로 소장되는 예술사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새로운 가능성을 펼쳐 보인 그는 광고사진 외에 우리 시대의 명인들을 흑백사진으로 기록한 “명인”전, 연잎을 독특한 앵글로 촬영한 “피안”, 매화 시리즈 같은 개인 작업과 “제주 영상전 blow blow blow” 같은 영상작업에도 몰두하고 있다. 사실 그에게 광고사진과 작품사진을 구별하는 자체가 별 의미 없는 일이지만 그는 최근 매화를 소재로 한 작업에 애정을 쏟고 있다.

 
“젊었을 적엔 한 달에 30일을 일했어요. 광고사진가로서 그런 일정이 만족감을 준 일면도 부인할 순 없어요. 그러나 요즘은 그렇게 일하지 않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그게 싫지 않더라고요. 집중할 수 있고 더 충실해지는 만족감이 있어요.”


그러나 그의 일정은 결코 느슨해 보이지 않는다. 도시역사, 건축, 음악, 미술, 조각, 장식, 공연, 종교, 대자연 그리고 사람... 그가 이번 현대자동차 작업을 하면서 관심을 갖고 살펴보고 접목한 분야다. 그의 말대로 더 충실하고 더 집중하기 때문에 광고사진가로서 그의 일정이 가볍지 않다. 게다가 국내외에서 전시 검토 등 순수사진가로서 활동도 활발하여 스스로 길이 되고자 하는 김용호 작가의 하루는 충만하다.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사진가
 
“내가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도록 해준 점에서 현대자동차에 참 감사하죠. 그런데 생각해보니 현대자동차의 근로자 5만여 명 가운데 나보다 더 현대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요.(웃음) 대부분 자기 자리에서만 일하게 되는데 나는 현대자동차 구석구석 안 가본 데가 없으니 말입니다.”


김용호 작가는 현대직원보다 더 현대에 애정을 가진 외부자일 것 같다. 그는 산업사회에서 기업은 생산성을 추구하는 속성을 갖지만 그것이 극대화된 기업에는 반드시 정신과 철학이 있더라고 말한다. 그래서 바로 그 지점, 기업의 정신을 표현하는 이미지 작업을 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지난 20여 년 동안 김용호 작가는 패션사진가로 더 이름을 알렸다. 가장 앞서가야 하고 세련되고 섬세한 미감을 살려내야 하는 패션이란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의 감각이 현대자동차 외에도 롯데 케미컬, 삼성전자 등의 산업사진에서 색다른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설중송백(雪中松柏)”이란 부제가 붙은 삼성 텔레비전 제품사진의 경우 가장 첨단의 전자제품과 고전적인 붓글씨라는 상극의 어우러짐, 텔레비전의 아웃라인만 보이는 무중력 상태 같은 분위기와 ‘눈 속의 소나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뜻과 이미지를 매치시키는 스토리텔링이 독창적이다.


이처럼 패션이든 기업사진이든 사람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람의 흔적을 찾아내고 이야기로 풀어내는 그의 사진 접근법은 김용호 작가의 세계를 구축하는 본질인 것 같다. 이미지로 들려주는 작가의 새롭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솔깃하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17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