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모카메라박물관 “소장품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

 
여순사건, 한국전쟁 등 한국의 비극적인 근현대사를 비롯해 전국 각지의 풍경과 문화재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한국사진작가협회 발족에 기여하는 등 한국사진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 있다. 바로 故 이경모 선생(1926-2001)이다. 기록하는 것에 큰 뜻을 품은 연장이었을까, 그는 생전에 “장인의 손때가 묻고 정성이 담긴 카메라”를 평생에 걸쳐 수집했다. 그 규모가 대단해 한때 카메라 사업에 열을 가하던 삼성에서 구매 의사를 밝혔지만, 선생은 거절한다. 대신에 그가 객원교수로 지낸 동신대학교에 기증했는데, 이것이 1996년 국내 최초의 카메라박물관인 ‘동신대학교 영상박물관’의 개관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지금, 동신대학교 영상박물관은 ‘이경모카메라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난다. 20세기 한국의 격동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그 최전선을 카메라와 함께 누빈 고인을 기리며 박물관의 이름에 기증자의 이름을 넣어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열린 개관전 《카메라의 역사 100년》에서는 189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중요한 사건과 인물을 생생하게 기록한 카메라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이경모카메라박물관의 핵심에는 3년 전부터 재개관을 준비한 동신대학교 학술문화정보원장 허용무 교수가 있다. 그를 만나 재개관과 개관전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동신대 이경모카메라박물관 재개관식, 녹색 상의를 입은 허용무 교수가 이주희 총장 등에게 전시를 소개하고 있다.




전시장 입구 노란 벽에는 故 이경모 선생과 그가 사랑한 카메라가 함께 촬영된 사진이 걸려 있다.


 
동신대학교 영상박물관에서 이경모카메라박물관으로, 재개관에 얽힌 사연이 있다고 들었다.
故 이경모 선생이 카메라를 기증하던 1996년, 학교에서는 ‘이경모기념관’ 설립 계획이 있었다. 선생은 그의 제자인 차정환 교수에게 기념관이 생기면 당신의 필름을 기증해 달라 유언을 남기기도 했고, 故 이상섭 당시 동신대학교 총장은 건물 설계도까지 의뢰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 총장의 갑작스러운 별세 이후 기념관 설립은 사실상 잊힌 일이 되었고, 그렇게 기증자와 그의 유족에게는 약속을 못 지키고 있던 것이었다. 따라서 이번 재개관은 학교 입장에서 보면 미뤄온 약속을 늦게나마 지키게 된 것에 의미가 있고, 나아가 우리나라 사진계에서는 처음으로 기증자의 이름으로 박물관 이름을 지었다는 것에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 모든 주역에는 재개관과 명칭 변경에 흔쾌히 결정을 내린 이주희 총장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3년 전, 박물관장 취임 이후 재개관 준비 과정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무엇에 중점을 두었나?
당시 박물관장으로서 재개관 결정이 난 이후에는 개관전 개최가 가장 큰 과제였다. 우선 이경모 선생이 기증한 카메라만 1,400여 대에 달하는 만큼,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카메라는 정말 많다. 소장품이 많은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소장품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것인지에 관한 질문이다. 고민한 끝에 전시에서는 189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기간을 설정하고 그 기간에 이루어진 카메라의 발전사를 다루기로 했다. 준비하면서 공부할 게 정말 많았다. 이 100년만 가지고도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연구를 해도 좋을 만큼 복잡하고 방대한 내용이 있었다.

 
이경모 선생이 기증한 카메라를 포함하여 1,700여 대의 카메라를 소장하고 있고, 이번에 전시되는 카메라는 340여 대이다. 어떤 기준으로 선별했는지 궁금하다.
카메라에 대해서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하신 이경모 선생이 1990년에 명동 롯데백화점에서 열린 전시 《세계의 역사적인 카메라들》을 기획하면서 만든 책이 있다. 책에는 카메라 발전사와 함께 연대기 순으로 주요 카메라 약 300대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경모 선생이 당시의 시제품을 제외하고 기술사적으로 유의미하며 인기가 많았던 카메라를 선정하여 유형별로 분류한 끝에 나온 것이다. 이 책을 참고하여 소장품 가운데 340여 대를 선정하였다.



라이카 카메라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작품




폴라로이드 랜드 95



베스트 포켓

 

코닥 1호 카메라(No. 1)부터 초기 디지털카메라까지, 연대순으로 각 시기의 주요한 카메라가 전시된다. 100년에 걸친 변화와 발전 가운데 대표적인 흐름을 꼽자면 무엇인가?
이 기간 초반에는 카메라의 부피를 줄이고 휴대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그 시작으로 1888년, 코닥의 1호 카메라(No.1 Kodak)를 꼽을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휴대 가능한 크기 덕분에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는 출발점으로 작용했는데, 카메라의 소형화와 보편화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후로도 크기를 줄이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이를테면 렌즈 뒤가 주름막으로 된 카메라를 폴딩 카메라라고 하는데, 1910년대가 되면 ‘폴딩 포켓 카메라’가 나오고, 뒤이어 ‘포켓 주니어’, ‘베스트 포켓’이 출시된다. 카메라 이름에 ‘포켓’이라는 단어가 붙으면서 점점 작아지는 거다. 크기를 줄이고 간편하게 찍고자 하는 욕구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12년 출시된 ‘베스트 포켓’은 1차 세계대전에서 군인들이 많이 썼던 카메라이기도 하다.





코닥 No.1 카메라




맥스 데스포가 촬영한 한국전쟁 당시 대동강 철교 위의 피난 행렬과 그라플렉스 스피드그래픽

 
소형화가 이루어진 이후의 변화도 궁금하다. 연대별로 괄목할 만한 발전 사례를 소개한다면?
1948년에는 미국의 폴라로이드에서 단 3분 만에 사진을 만들어 내는 ‘폴라로이드 랜드 95’를 출시하며 획기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1950년대에 이르면 일본이 카메라 산업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최초로 펜타프리즘과 퀵리턴미러를 장착한 ‘아사히플렉스IIb’의 아사히광학이 있었다. 이후 니콘, 캐논, 야시카 등의 제조사에서 이 방식을 채택하고, 일본 카메라가 세계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 이름에 ‘일렉트로닉’이라는 단어가 붙은 카메라들이 나오는데, 이는 카메라에 노출계가 내장되었음을 의미한다. 1980년대는 기술 발전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로, 필름 모터 드라이브부터 초점, 노출 등의 자동화가 이루어지는 단계다. 또한 전시의 후반에는 사진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린 카메라 광고지면을 모아두었다. 이를 통해 카메라 시장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짐작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라이카’와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는 연도 순서에 따른 전체적인 흐름에서 분리되어 따로 전시된다. 그 의도가 궁금하다.
라이카와 롤라이플렉스는 카메라 발전사에서 특별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두 브랜드의 카메라는 흩어서 배치하기보다 한 곳에 모아 그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했다. 롤라이플렉스는 이안반사식 카메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브랜드다. 촬영 시 상이 반대로 맺혀 불편함이 있긴 했지만, 광학적 성능은 아주 대단했다. 또한 1930년대, 최초로 주름막 방식에서 기계식으로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카메라를 내놓은 곳이 라이카인데, 당시로는 대단한 기술이었다. 또한 라이카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나 강운구 등 많은 사진가의 사랑을 받았다.

많은 사진가의 사랑을 받은 라이카, 그러니까 그 말은 ‘많은 위대한 사진과 함께한 라이카 카메라’로 다가온다. 과연 사진과 카메라는 뗄 수 없는데, 말이 나온 김에 전시장 곳곳에 전시되는 사진들에 관해 듣고 싶다.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이나 한국의 근현대사가 담긴 사진을 어떤 카메라로 촬영했는지 알 수 있도록 카메라와 나란히 설치했다. 널리 알려져 익숙하거나 우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진이 함께 있다면 더욱 실감나게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도로시아 랭의 <이민자 어머니>(1936)는 ‘그라플렉스 RB’로 촬영되었고, 맥스 데스포는 ‘그라플렉스 스피드그래픽’으로 한국전쟁 당시 대동강 철교 위의 피난 행렬을 촬영했다. 이외에도 이경모 선생이 여순사건을 취재할 당시에 사용한 코닥 반탐카메라, 로버트 카파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록할 때 사용한 콘탁스 2, 최초로 우주에서 지구의 모습을 촬영한 핫셀블라드 카메라 등이 사진과 함께 전시된다.




故 이경모 선생이 사용한 다양한 필름과 라이트박스에 놓인 그의 슬라이드필름




《카메라의 역사 100년》 전시 전경
 

이렇게나 많은 제조사가 있었다는 것도 놀랍다.
지금은 소수의 카메라 제조사가 경쟁하는 체제이지만, 전시를 보면 알다시피 과거에는 아주 많은 제조사가 있었다. 거의 나라마다 카메라를 만들어 냈는데, 당시의 카메라 산업은 그 나라의 정밀과학기술 수준을 대변할 수 있는,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북한이나 중국, 러시아에서도 내수용 카메라를 만들었다.

다시 전시에서 재개관 이야기로 돌아와, 미뤄온 약속을 지킨 것과 기증자의 이름으로 박물관을 지었다는 것 외에도 많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에 대한 견해가 궁금하다.
무엇보다 ‘기증 문화’의 측면에서 깊은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본다. 사진가 사후 고인의 필름이나 카메라 등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일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 방법을 모른다거나 돈 문제가 얽혀있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짐작하건대, 이번 재개관이 기증에 따른 좋은 결과의 사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자료를 개인이 관리하기보다 전문 기관을 통해 객관적인 가치가 매겨지고 연구가 이루어지면 우리 사진문화가 더욱 풍성해지지 않을까? 이를 위한 첫 번째 단계로써 기증 문화가 정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재개관을 계기로 향후 나아갈 방향에 관해서도 듣고 싶다.
도서관이나 박물관의 기능이 옛날과 많이 달라지고 있다. 옛날에는 학생들만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지역사회를 위한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앞으로 동신대학교 내에 지역민을 위한 공간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와 연동하여 운영하려 한다. 또한 박물관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인 지역사회 기반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것이다. 혁신도시가 형성된 나주에는 젊은 사람이 많아 문화예술 향유를 향한 욕구가 많은데, 이를 충족하고자 한다. 또한 젊은 층이 많다 보니 어린아이도 많다.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준비할 것이다. 개관전에서 100년에 걸친 아날로그 카메라들이 전시되고 있는 만큼, 흑백 필름 작업 교육도 생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