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응식과 정인성, 시간의 산책자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0)의 책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실린 에세이 「산책자」에서 ‘산책자’는 주변의 경관을 단순히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는 관찰하고 머리로는 사고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발터 벤야민에게 있어서 진정한 예술가는 ‘산책자’처럼, 아름다운 풍경의 찰나를 단순히 스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의 역사적 맥락과 상황을 포착해 자신만의 언어로 해석하는 사람이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시간의 산책자들-임응식·정인성〉전에는 부산 사진의 초창기, 작가이자 교육자로서 사진문화의 보급과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헌신했던 임응식과 정인성의 사진과 관련자료 등 240여점이 소개되고 있다. 이 전시는 지난 2009년부터 매년 개최해오고 있는 부산시립미술관의 연례적인 작고작가 초대 기획전으로, 〈시간의 산책자들-임응식·정인성〉전은 부산의 1세대 사진작가인 임응식과 정인성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46년 사진현상소 아르스(ARS)를 운영하던 시기의 임응식

복제한 삶처럼 닮은, 두 작가의 사진에 대한 애정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이번 전시의 제목은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 ‘산책자’에서 개념을 빌려왔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한국의 1세대 사진가로서, 그리고 각각 서울과 부산의 후배 사진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교육자로서도 공통점이 많은 두 작가의 작품이 같은 장소에서 함께 전시된다는데 의미가 있다.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사진을 시작했던 임응식·정인성 두 작가는 마치 복제된 삶처럼 한국 사진문화의 정착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관객들이 두 작가의 삶과 연계한 작품들의 공간을 거닐며 임응식과 정인성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1912년 부산 대신동에서 태어난 임응식(1912-2001)은 중학교 입학 선물로 카메라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사진을 시작했다. 임응식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주도의 사진클럽인 부산여광구락부(釜山黎光俱樂部)에 가입, 요시카와 슈지와 도이 에이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해방 이후 1946년부터 부산에서 사진현상소 ‘아르스(ARS)’를 운영했으며 부산 최초의 사진동우회인 부산광화회(釜山光畵會)를 결성했다. 임응식의 작품경향은 한국전쟁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소재를 담은 소위 ‘살롱 사진’과 ‘회화주의 사진’을 주로 찍었으나, 한국전쟁 기간 중 종군사진가로 참전하면서부터 현실을 직면해 담아내는 ‘생활주의’ 사진의 추구를 선언하고 리얼리즘 정신이 담긴 사진을 남기기 시작했다. 임응식은 1952년 6월 서울에서 피란 온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원들과 합동전시를 개최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역임했다. 임응식은 한국전쟁 중인 1953년 부산으로 피란와 있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사진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이후 1974년까지 37년간 서울대학교와 중앙대학교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54년 서울로 이주한 임응식은 1957년 미국 현대미술관(MoMA)의 사진전인 〈인간가족〉전을 경복궁미술관에 유치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1952, 인천, 한국전쟁 ⓒ임응식

 
 1953, 서울 ⓒ임응식
 
1951, 부산 판자집 거리 ⓒ임응식
 
1953, 부산 서면 ⓒ임응식

 

서울, 1960. 4.19혁명 ⓒ임응식
 
 

1934년 동경 사진학교 재학 시절 정인성

1911년 경남 양산 출생의 정인성(1911-1996)은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5학년 재학시절 사진에 입문하였다. 1935년 일본 동경사진전문학교를 졸업한 정인성은 1940년대와 50년대, 특히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란 수도시절 부산이 실질적인 우리나라 사단의 발흥지로 자리 잡는데 임응식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부산사진의 제1세대로서 부산의 사진활동을 주도했던 정인성은 1957년부터 부산대학교에서 사진예술론을, 1965년부터 한성여자초급대학(현 경성대학교)에서 사진기법을, 1966년부터 동아대학교에서 사진학을 강의하는 등 대학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는 교육자이자 평론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현상·인화와 같은 암실작업을 손수하였던 정인성은 신즉물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물의 본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라는 사진 철학을 작품에 담으려 노력했다. 또한 완벽한 구성과 조형미의 추구를 위해 비연출과 스냅숏이라는, 당시 리얼리즘 사진의 절대 원칙을 고수했다. 이러한 노력은 ‘고달픈 현실을 찍은 사진에서마저 드러나는 따뜻하고 넉넉한 느낌’의 정인성 스타일 사진을 만들었다.


 
1952, 부산 용두산 공원 ⓒ정인성
 
1962, 부산 영도 ⓒ정인성
 
1959, 부산 충무동 ⓒ정인성

 

기억과 기록으로서의 사진
이번 전시에는 임응식과 정인성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특히, 전시 안의 전시로 마련된 〈임응식과 한국전쟁 1950-1953〉 코너에서는 임응식 작가가 가장 큰 작품의 변화를 겪었던 한국전쟁 종군 기록사진들 중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사진 30점이 특별히 공개되어 있다. 이 사진들은 월간〈사진예술〉의 이기명 발행인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로, 섬세하게 인화된 고품질의 한국전쟁 종군기자 시절 임응식 선생의 사진들이다. 더불어 임응식 선생의 장남인 임범택씨가 소장하고 있던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 소속 사진가들의 한국전쟁 기록사진이 역사 자료로 함께 전시되고 있다.

정인성은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1935년 일본 동경사진학교를 졸업한, 부산 근대 사진작가 중 정규 사진학교 과정을 수학한 최초의 작가이다. 작가가 사용한 카메라와 정인성 선생이 직접 디자인한 전시회 팜플렛 등이 작품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은 〈시간의 산책자들-임응식 정인성〉전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임응식 작가의 사진예술에 대한 애정을 재확인하고,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던 정인성 작가의 작업이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아쉽고 안타까운 필름의 보관 상태
전시의 기획자로서 〈시간의 산책자들-임응식·정인성〉전을 준비하면서, 임응식 작가의 작품을 섭외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유족과의 접촉이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시를 위한 작품의 확보도 손쉽지 않았다. 이 지면을 빌려 많은 배려와 도움을 주신 임응식 작가의 며느리이신 신경자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아쉬운 것은 임응식 작가의 한국 사진문화에 대한 기여도에 비해 원본 필름의 보관 상태는 매우 심각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기록과 기억으로서의 자료일 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인 필름이 사라지고 난 후, 후회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사진전문 관계자들이 모여 1세대 사진 작가들의 필름 보존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반면, 정인성 작가의 경우는 아들인 사진작가 정영모씨의 사려깊은 관리로 필름들이 상대적으로 잘 보관되어 있었다. 이번 전시의 준비과정에서 정영모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전시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영모씨는 이 전시에 출품된 120점의 작품을 모두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할 의사를 밝혔다. 부산시립미술관은 정인성 작가의 유족인 정영모씨에게도 무한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

전시일정 2016. 12. 22 - 2017. 2. 26
전시장소 부산시립미술관

 

글 이진철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관)
해당 기사는 2017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