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문타다스 | 의식 있는 예술가










ⓒAntoni Muntadas


 
안토니 문타다스는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1971년부터 뉴욕에서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는 멀티미디어 아티스트이다. 그는 예리하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전 세계의 사회, 정치 및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다루며 MoMA 를 비롯하여 카쎌 도큐멘타, 베니스 비엔날레, 퐁피두 센터 등 전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미술관과 비엔날레에서 무수히 많은 개인전과 단체전을 가졌다. 이제 막 여든을 넘긴 노장 예술가를 바르셀로나의 작업실에서 만났고, 그의 삶과 예술 작품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특히 그가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방식에 주목하여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당신은 평생을 예술가로 살아왔습니다. 처음부터 미술을 공부하고 예술가가 되고 싶으셨나요? 예술가로서의 삶은 어떤가요?
저는 평생을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연습, 훈련 및 프로젝트 개발에 바쳤습니다. 일찍이 예술가가 되기로 결정했고, 그 중요한 결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바르셀로나의 산업 엔지니어를 위한 기술 학교(Technical School for Industrial Engineers in Barcelona)에서 건축학을 공부했고 뉴욕의 프랫 그래픽 센터(Pratt Graphic Center)에서 예술을 공부했습니다. 대학에 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대학의 강의가 중요하다 기보다 그 시간 동안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작업 시스템과 구조를 찾고 훈련하는 법을 익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술, 지질학, 경제학, 생물학 등 무엇을 공부하든 상관없이 대학생활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7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뉴욕으로 이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는 세계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특히 뉴욕에서는 끊임없는 문화운동과 예술을 통한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움직임들이 많았습니다. 이때는 개념미술이 시작되던 시기이기도 했지요. 이 모든 변화와 활동들이 저를 1971 년에 뉴욕으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 이미 많은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고, 뉴욕에 도착 하자마자 바로 예술가로서 작품활동을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뉴욕에서 점점 더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개념 중심의 프로젝트에 집중하면서 다양한 미디어(사진, 비디오, 설치, 출판, 공연 등)를 통해서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뉴욕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매우 흥미로웠죠. 당시 뉴욕의 예술이 매우 활발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많은 예술가들이 뉴욕으로 모였고, 다양한 대안 공간이 있었습니다. 같은 세대의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서로 도우며 협업을 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눈에 띄었고 일부는 그렇지 않았지만 모두 좋은 예술가들이었습니다.
 
작업의 동기는 어디에서 찾으세요?
저는 “동기”나 “테마”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아요. 모든 작품들을 “프로젝트(Project)”라고 부릅니다. 하나의 프로젝트는 항상 개념과 아이디어에서 출발합니다. 아이디어는 이전 작업이나 순수한 관심에서 비롯됩니다. 일단 아이디어가 생기면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철저하게 그 분야에 대한 연구와 조사를 하는데, 한 아이디어에서 프로젝트로 발전하는 데에는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립니다. 그 과정에서 상상력과 호기심, 관심은 항상 중요하지요. 예를 들어 서울 토탈 미술관에서 전시했던 <아시안 프로토콜>프로젝트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한국, 중국,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가까이 위치하고 있지만 매우 다릅니다. 아시아 각 나라의 고유한 문맥을 이해하기 위해 많이 방문하고 연구해야 했습니다. 큐레이터들과의 미팅도 수없이 하고 여행도 많이 다녔어요. 이 과정을 거치는 것이 제게는 매우 중요하기에, 즉흥적이거나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프로젝트는 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예술 프로젝트는 시간과 과정, 그리고 문맥(context)을 의미합니다.
 
다양한 매체를 다루며 작업을 해왔습니다. 사진, 비디오, 공연, 설치, 출판, 인터넷 등의 여러 미디어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매력적인 미디어가 있습니까?
미디어는 자신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스펙트럼입니다. 저는 하나의 미디어로 작업하지 않으며, 비디오 아티스트, 설치 아티스트 등의 단어로 불리는 것을 거부합니다. 저를 카테고리 안에 규정하려고 하는 것에 반기를 들지요. 많은 사람이 프로젝트를 할 때 처음부터 미디어를 선택하여 혼란을 일으키거나 한 예술가를 사진가, 비디오 아티스트 등으로 한정하여 분류하기도 합니다. 저는 처음에는 어떤 미디어를 선택할지 고민하지 않고, 항상 프로젝트 자체의 개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많은 연구와 조사를 한 후에 그것을 실현할 미디어를 마지막으로 결정합니다.
 
편집이란? 사진과 영상 프로젝트에서 편집은 어떤 역할을 하나요?
편집은 작업의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사진과 영상 뿐만 아니라, 출판과 설치 작업에서도 편집은 아주 중요합니다. 매 순간이 사실상 편집 작업이며 모든 것을 한데 모아 결정을 내리는 순간이 편집이지요. 편집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결정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관객이 작품을 감상하며 관객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편집이 최종 편집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저는 필리핀에서 새 프로젝트를 막 마쳤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기억에 대한 연습(Exercises on Past and Present Memories)>(2022)인데요. 과거와 현재의 기억에 대한 연습은 필리핀과 스페인의 식민지 추억과 역사를 작가가 공유하면서 시작됩니다. 과거와 현재의 필리핀과의 연결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으로 세 가지 거래 대상을 선별했어요. 중국의 Mantón Manila 숄, 메달과 동전, 세비야의 도자기입니다. 이 물건들을 매개로 하여 식민지 역사의 기억을 다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마닐라와 스페인에 각각 이 주제를 연구하는 팀과 디자인 팀이 있었고, 그들과 협력하여 개념을 발전시켜 작품 디자인 및 생산 과정 전체가 하나의 협업이 되도록 인도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화상으로 회의하며 작업했습니다.
 
한국의 미술관과 대학에서 여러 차례 작가와의 대화를 가졌고, 2014년 토탈미술관에서는 《아시안 프로토콜(Asian Protocols)》 개인전도 열렸는데요. 한국에서의 경험은 어땠나요?
신보슬 큐레이터가 토탈미술관의 <아시안 프로토콜(Asian Protocols)>이라는 프로젝트에 초대했습니다. 한국 사회의 맥락을 더 잘 이해하고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 번 한국을 방문했지요. 이 준비 기간 동안 박물관과 대학에서 몇 차례 강의를 했고 토탈 미술관의 전시는 <아시안 프로토콜(Asian Protocols)> 프로젝트의 첫 번째 전시였습니다. 서울에서의 전시 이후 일본 도쿄와 중국 베이징에서 같은 주제로 다른 전시들이 이어졌습니다.
한국에서 작업을 위해 머물던 기간은 매우 활동적이었어요. 이전에 백남준 센터에서 제 작업 <파일룸(The File Room)>을 전시한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신보슬 큐레이터가 모은 팀은 매우 젊고 열정적이었고, 저는 결과에 정말 만족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유럽의 이탈리아인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들은 매우 빠르고 열정적으로 일하며,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 제대로 작업하기를 원하고 일하기를 좋아합니다. 한국에서의 나의 느낌과 경험은 매우 긍정적이었습니다.
 
또한 <회의실(The Board Room)> (1987)과 <기자회견실(The Press Conference Room)>(1991) 작업을 아주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저는 연구자나 사회과학자가 아닌 예술가로서, 학술 출판물이 아닌 예술작품으로 세상을 보는 저의 관점과 시각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회의실(The Board Room)> 프로젝트는 작품을 시각화 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명확하게 보이도록 구성을 했고,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여러가지 사회적인 메세지들을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우화하여 보여주려고 했던 작업입니다. 이렇게 하여 관객은 제가 던지는 대중매체의 힘과 전술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을 가시화 하여 읽기 쉽고 이해 가능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기자회견실(The Press Conference Room)> 프로젝트는 텅 빈 연단이 실종된 정치인을 기다리고 있는 프로젝트 입니다. 바닥에 깔린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은 뉴스와 선정주의, 정치와 오락의 차이가 겹쳐지도록 구성을 했고, 마이크가 가득하지만 스피커가 없는 기자회견장은 권력의 계층화와 소통의 부재로 가득한 우리 사회를 보여주고 예시하고 싶었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누구와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합니까? 작업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큐레이터나 아티스트가 있습니까? 아니면 프로젝트마다 함께 일하는 팀이 다른 가요?
프로젝트를 만들 때에는 항상 주제와 관련된 사람들과 대화하며 작업을 진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업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사람들은 해당 프로젝트와 장소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인터뷰, 대화 및 여행은 작업을 진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방법이지요. 당신이 작업을 할 때에는 해당 프로젝트와 연관이 있는 그 장소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각각의 프로젝트는 다르고 사람들은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특정 한 두 사람과 작업의 고민을 나누거나 하지 않으며, 여러 분야의 많은 사람과 작업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며 작품성을 높이는데 주력합니다. 제 전시 카탈로그를 보면 프로젝트마다 작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과 그들에 대한 감사가 항상 적혀 있어요.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전시를 개최하는 것은 프로젝트의 마지막 입니다. 그리고 카탈로그는 전시의 연장선입니다.
 
세상에서 예술가와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예술가의 역할이란 윤리와 미학 측면을 프로젝트의 주제로 구성하고 동시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고안해 내지 않아요. 새로운 것 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은 사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창조, 은유, 구성을 통해 동시대 문제에 대한 내 의견을 제시합니다. 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려고 합니다. 어떤 작품이 완성되어 전시 되었을 때 그것에 관객이 참여하도록 요청해야 하지요. 우리 사회의 현 모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작가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관객의 책임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관객은 예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자신이 보고 관람하는 작품들을 조사하고 문제가 무엇인지 읽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젊은 예술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예술가가 되기로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결정입니다. 그 결정에는 많은 힘든 훈련과 대가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효과적인 작업 방식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또 작품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전반적인 과정의 이해, 자신만의 작업 방식, 다른 예술가 및 큐레이터와의 관계, 대화와 소통 등이 모두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유기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어 권지현 특파원
해당 기사는 2022년 10월호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