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 맨의 기이한 에덴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 제목을 연상시키는 샐리 맨의 〈천 개의 교차점(A Thousand Crossings)〉 전시가 파리의 주드폼미술관에서 9월 22일까지 열린다. 지난해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시작된 후 게티미술관 등의 미국 내 전시를 거쳐 펼쳐지고 있는 순회전이다. 이 전시는 맨의 작업을 시대적으로 구분한 섹션들로 구성되어 회고전의 형식을 띠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작가의 사진행위에 대한 사려 깊은 이해를 요청한다. 그리고 이는 미국 남부의 역사와 그로부터 끊임없이 내재화되어 온 미국 남부인으로서의 정체성 및 그 유산 속에서 부유하는 미국과 미국인의 기억과 깊은 관계성을 맺고 있다.
 


1. Sally Mann, Easter Dress, 1986, gelatin silver print. Patricia and David Schulte ⓒSally Mann



2. Sally Mann, On the Maury, 1992, gelatin silver print. private collection ⓒSally Mann


샐리 맨, 가족 사진의 이면
샐리 맨의 1980-1990년대 작품 “직계 가족” 연작에 관해 알고 있다면 그녀의 작품을 미국 남부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그 유산의 기억이라는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에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당시 맨이 촬영한 어린 자녀들은 ‘관능적인 시선과 육감적인 나체의 몸짓’이 두드러진 사진으로 알려졌으며, 그로 인해 그녀가 자녀들을 성적으로 대상화한다는 사회적 논란에 휩싸였던 것을 쉬이 연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은 기실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태도보다는 이미지 중심의 상징성만으로 맨의 작업을 파악했던 당대의 비판적 관점에서 기인한다. 실제로 “직계 가족” 연작에서는 즉각적으로 해독하기 어려운 미묘하고도 복잡한 다양한 감정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맨이 어릴 적 입었던 부활절 드레스를 입고 있는 딸을 중심으로 버지니아의 풍경이 펼쳐진 사진에는 아이의 모습으로부터 시간의 내면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작가의 시점(視點)이 엿보인다(사진1). 이는 렌즈의 비네팅으로 인해 애수를 자아내는 강물 위의 나룻배를 탄 가족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사진2). 맨은 이러한 계열의 사진에서 가족을 대상화하지도 않을뿐더러 눈앞에 펼쳐진 모습과 기억 저편의 편린을 구분하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맨의 시선은 카메라 파인더 뒤에서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 부활절 드레스를 입은 유년기 자신의 눈으로부터, 그리고 나룻배 위에 서 있는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시선과 상호적으로 조우한다. 결국 일련의 사진에서 유추할 수 있는 그녀의 사진행위는 파인더 위에 펼쳐진 장면으로부터 어린 시절에 조우했던 부모의 시선이나 남부의 풍경과 다시 마주하는 비물질적이고 비선형적인 이미지 포착행위이다. 즉 이 사진들은 맨이 태어나고 성장했으며 가정을 꾸린 미국 남부의 삶에 내재하는 고립적이고 형용하기 어려운 특이한 시간의 내면을 비추는 파편적 이미지이다.



3. Sally Mann, Cherry Tomatoes, 1991, gelatin silver print.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Corcoran Collection (Gift of David M. Malcolm in memory of Peter T. Malcolm), 2015 ⓒSally Mann



4. Sally Mann, Gorjus, 1989, gelatin silver print. Sayra and Neil Meyerhoff ⓒSally Mann


반면 사진3, 4의 경우는 가족 공동체의 구성원인 개체들을 바라보는 맨의 관찰자적 시선이 두드러진다. 부모자식 간의 깊은 유대감을 연상시키는 사진3은 일견 아이들의 개체적 독립성이 엿보이는 사진4와는 일정한 거리감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후자의 사진이 ‘관능적인 시선과 육감적인 나체의 몸짓’으로 정의되던 일련의 사진과 계열적 관계성이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와 같은 낯선 성숙함의 몸짓은 사진이 아니라면 그리 기묘한 것이 아니다. 성인 부모가 아이에게 기대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이미지(부모를 존경하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아이)를 우리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면 독립적이고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드러내는 아이의 모습은 주변에서 마주하는 장면이지 않는가. 우리 각자의 유년기를 회상할 때 이와 같은 모습은 매우 실재적임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전자(사진3)이다. 여기에는 미묘한 육감적 의존 관계가 느껴지는 특별함이 있다. 사실 이러한 특별함이 샐리 맨을 오랫동안 비도덕성에 관한 논란 속으로 밀어 넣게 한 핵심적 요소였는데, 이는 화면의 전경에 놓인 몇 가지 사물로부터 유추되는 관능적 상징성에 익숙한 사진읽기(사진5 참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예사롭지 않은 의존에서 진실로 중요한 것은 광활한 자연 속에서 가족 공동체의 개체 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성의 특별함이다. 맨의 가족사진 전반에서 총합적으로 지각되는 이 특별함은 육감적이고 의존적이면서도 개체 독립적인데, 이는 비단 개체 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가족과 그들을 둘러싼 시공간의 관계에서도 배어나온다.

 


6. Sally Mann, Bloody Nose, 1991, silver dye bleach print. Private collection ⓒSally Mann

아이의 밝은 피부 위를 흘러내리는 다량의 코피가 눈길을 사로잡는 장면을 보자(사진6). 이 사진은 기이하게도 다른 일련의 가족사진을 휘감는 특별한 분위기와 분리되지 않는 메타적인 계열성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연유는 이 기묘한 불안과 폭력에 관한 지각으로부터 맨의 가족사진에 내재하는 정적이고 평화로운 풍경 이면의 세부(저 멀리 늪지대로부터 뭍으로 올라오는 악어나, 사진4에서 아이들 주변의 낡은 픽업트럭과 커다란 개 등)가 환기되기 때문이다. 가족사진에서 배어나오는 이러한 강박관념은 맨이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의 심연에서 찍은 “남부의 기저(Deep South)” 연작에서 심화된다. 이 작업은 마치 가족사진의 이면에 자리 잡은 강박관념의 지형도와도 같다.


그 이후, 불안과 침묵의 전환
신령한 느낌과 섬뜩함을 동시에 자아내는 일련의 풍경은 19세기의 풍경사진으로부터 차용한 촬영기법으로 인해 보는 이로 하여금 근대 시공간의 미국 남부를 연상시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폭력의 상흔이 전면에 두드러진 나무(사진7)와 싸늘한 정적만이 가득한 이 풍경으로부터 사진의 어떠한 구체적인 의미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이 난해한 침묵의 강요, 우리에게 육감을 자극하지만 무엇인가를 명확히 말할 수 없게 하는 “남부의 기저”는 맨의 사진에 뒤얽혀 있는 무수한 시점(視點)의 교차점 위로 우리를 조금 더 다가서게 한다.

실제로 이 연작에서 맨이 셔터를 누른 장소들은 오래 전 에밋 틸이라는 흑인 소년의 납치 살인 사건(1955년)이 자행되었던 현장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역사적 장소성의 의미만이 이 작업의 궁극적인 맥락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맨은 자신의 회고록 『Hold Still: A Memoir with Photographs』(2016)에서 남부의 유산과 인종 의식에 대한 각성, 그리고 예술가의 비전을 억누르고 의사로 살았던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그녀의 행위가 아버지의 ‘시끄러운 침묵’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자신에게 가족과 다름없는 가사도우미 버지니아 ‘지-지’ 카터(Virginia ‘Gee-Gee’ Carter; 여섯 명 아이의 편모로서 맨의 집에서 낮에는 12시간씩 일하고 밤에는 리넨을 다림질하며 아이들을 교육시켰던 흑인 여성)의 삶을 맹목적인 당연함으로 일관했던 자신과 가족의 침묵을 언급한다. 그녀 스스로 ‘미스터리’라고 말하는 이 시끄러운 침묵은, 그리고 맨의 전작을 감싸는 이 기묘한 침묵은, 일련의 연작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스며들고 축축한 남부의 시공간과 역사적 유산에 내재한 다중적인 시점과 시간 속으로 우리를 침윤케 한다. 실재와 상징, 기억과 상상 사이에서 애정과 속박이 공존하는 이상한 남부의 에덴으로 말이다.

 


7. Sally Mann, Deep South, Untitled (Scarred Tree), 1998, gelatin silver print.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Alfred H. Moses and Fern M. Schad Fund ⓒSally Mann



8. Sally Mann, Oak Hill Baptist, 2008-2016, gelatin silver print. Collection of the artist ⓒ Sally Mann



9. Sally Mann, The Two Virginias #4, 1991, gelatin silver print. Private collection ⓒ Sally Mann


대규모 남북전쟁의 역사적 장소를 콜로디온 습판으로 촬영하여 유동적 이미지의 효과가 두드러지는 작품 ‘전장(Battlefields)’ 역시 장면 속의 장소와 시간은 샐리 맨 특유의 다중적 시점에 의해 붕괴된다. 각각의 사진은 전장의 불안과 맨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강박관념이 뒤얽힌 어둡고 불협화음 가득한 불확실성의 원형만이 화면 속에서 부유하며 신화와 역사, 암흑과 섬광, 침묵과 요동이 혼재하는 시공간을 반사한다. 이 사진의 일부는 〈천 개의 교차점〉 전시에서 남부 흑인 교회의 원형을 찾아다니며 찍었던 사진들과(사진8) 맨의 딸 버지니아와 가사도우미 버지니아 ‘지-지’가 함께 자는 사진(사진9)과 함께 ‘나에게 기거하는(Abide with Me)’이라는 제하의 섹션을 구성하기도 한다.

특히 두 버지니아의 사진은 샐리 맨 전작을 관통하는 ‘기억 흔적’을 재맥락화하도록 유도하는 중요한 사진이다. 여기서 앙상하게 말라버린 버지니아 ‘지-지’ 손끝의 경직은 마치 그녀가 꿈꾸고 있을 법한 악몽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그녀의 곁에 누운 맨의 딸 버지니아도 깊은 잠 속에서 팔을 뻗고 있다. 이 기묘한 버지니아의 반복적 행위는 흑인 소년 에밋과 맨의 아들 에밋의 안타까운 기억을 자극한다(맨은 그녀의 아들 이름을 불행한 흑인 소년과 같게 지었다. 성인이 된 에밋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사후적인 관점에서 아들 에밋에게서 맨이 발견했던 불안의 흔적들은(코피를 흘리는 사진뿐만 아니라 맨의 사진 중에서는 물 위에 눈을 감고 떠 있는 에밋을 촬영한 것도 있는데, 이는 마치 과거의 흑인 소년 에밋에 대한 맨의 기억과 슬픔, 그리고 불안을 연상시킨다.) 기이하게도 비극적인 아들의 미래를 떠올리게 한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흑인들의 안식처였던 19세기 교회는 남부의 시공간 속의 맨에게 안식처라고 할 만한 가족의 테두리를 이중화한다.
 



10. Sally Mann, Was Ever Love, 2009, gelatin silver print. 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Museum purchase funded by the S.I. Morris Photography Endowment, 2010 ⓒSally Mann





11. Sally Mann, Ponder Heart, 2009, gelatin silver print.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Alfred H. Moses and Fern M. Schad Fund ⓒ Sally Mann



12. Sally Mann, Triptych, 2004, gelatin silver print. The Sir Elton John Photography Collection ⓒ Sally Mann



13. Sally Mann, The Turn, 2005, gelatin silver print. Private collection ⓒSally Mann



14. Sally Mann, Bean’s Bottom, c.1991, silver dye bleach print. Private collection ⓒSally Mann


〈천 개의 교차점〉 전시는 근육위축증으로 쇠약해진 남편의 모습(사진10, 11)과 성인이 된 두 딸의 얼굴 클로즈업(사진12), 그리고 ‘전환(The Turn, 사진13)’이라는 제목의 사진 등으로 마무리된다. 샐리 맨 작업의 출발점인 가족으로, 말하자면 맨의 삶과 함께 지속되어 왔던 “천 개의 교차점”들은 다시 그 시작을 향하고 있다. 이 시간의 미로로부터, 그 불안과 침묵의 절정으로부터 맨은 새로운 시작을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전환”에서 우리의 시야를 방해하는 안개는 풍경을 바라볼 수 없게 하지는 않는다. 그녀를 짓누르던 침묵의 무게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맨은 “Bean’s Bottom”(사진14)처럼 모든 가능성이 열린 ‘다른’ 에덴의 시간을 갈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마디로 그녀의 전작으로부터 조금씩 배어 나오는 이 ‘다름’의 갈구는 지난했던 시간의 정점에서 우리가 서 있는 ‘지금-여기’의 물줄기를 새로이 바꾸는 계기를 제공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글 정훈(계명대학교 사진미디어과 교수)
해당 기사는 2019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정훈은 뉴욕대학교(NYU)에서 시각문화이론과 예술경영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중앙대학교에서 사진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 포토트리엔날레 주제전〉(서울시립미술관, 2005) 큐레이터, 〈전주포토페스티발〉(2013) 전시감독, 〈아트:광주:14〉의 예술감독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사진미디어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