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엄상빈

보통사람으로 태어나 작은 행복을 꿈꾸며 살던 사람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정과 고향을 뒤로 하고 국경선을 넘었다. 그 순간, 평범한 삶에서조차 멀어졌다. 실향민, 이방인, 혹은 소수민족으로 분류되는 평범치 않은 운명을 선택한 그들, 사진가 엄상빈은 경계를 넘은 그들을 오랜 시간 찬찬한 시각으로 기록해왔다.
 


ⓒ엄상빈, 두만강, 2003, 훈춘


삶은 선택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을 한다. 그리고 한 번의 선택이 때로 한 사람의 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속초 ‘아바이 마을’의 사람들이나 연변의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처럼 국경선을 넘는 일생일대의 큰 선택은 아닐지라도 사진가 엄상빈(1954~ ) 역시 수학교사로 20년을 살다가 전업사진가의 삶을 선택하는 큰 결단을 내렸다. 사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법한데,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도 엄상빈 작가는 ‘참 잘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사진은 운명처럼 극적으로 다가왔다기보다 학창시절부터 천천히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그래서 떨쳐버릴 수 없는 그 자신이 된 것 같다. 대학시절 산악반에서 활동하면서 월간 「산」을 열심히 구독하던 당시, 산사진의 대가였던 김근원 선생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춘천에서 사범대학을 다니던 그는 〈김근원 사진전〉을 보기 위해 서울에 다녀갈 정도로 선생을 흠모했고 사진에 대한 관심도 점점 더 커졌다. 마침내 졸업 후 ROTC 소위로 임관하여 제대할 때, 그는 그간 모아진 월급으로 서울 남대문 지하상가에서 아사히펜탁스 카메라부터 샀다.

1980년 9월, 그는 삼척 도계고등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동시에, 가까운 사진현상소를 들락거리며 사진에 빠져들었다. 집안에 확대기를 들여놓고 암실작업을 시작했고, 주변에 사진하는 교사와 촬영을 다니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건은 첫 근무처에서 아내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부부교사가 되면서 1983년에 속초로 발령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속초 ‘아바이 마을’을 촬영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고, 그 작업은 그를 사진가로 성장시키며 훗날 대표작으로 남는 결과로 이어졌다.

점점 더 사진에 몰두하게 되면서 90년대 후반에 상명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하기에 이르는데, 그는 더 이상 수학교사와 사진가의 길을 병행할 수 없음을 느끼면서 아내와 의논 끝에 사직서를 내게 된다. 아마도 교사였던 아내가 그의 홀로서기를 가능케 한 든든한 후원자였을 것이다. 결국,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마흔 일곱의 나이로 전업 사진가임을 천명하면서 그는 호기롭게 말했다. “강원도에 수학교사는 나 아니어도 많이 있지만 나는 강원도의 사진가로서 한국사진의 한 축이 되어보겠다.”고.


 


ⓒ엄상빈, 두만강, 2001, 훈춘


ⓒ엄상빈, 두만강, 2002, 도문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
속초의 아바이 마을은 남북분단의 산물이지만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길다. 만주의 넓은 벌판이 우리의 땅이었던 아득한 옛날의 이야기는 접어둔다고 해도 두만강은 나라 잃은 식민지에서 가난과 탄압에 못 이겨, 또는 나라를 찾겠다는 결기로 강을 건넌 숱한 사람들의 사연을 알고 있다.

엄상빈 작가는 2018년 9월에 다시 연변에 갔다. 2000년대 초에 여러 번 방문하여 촬영을 했으나 2018년에 전시와 출판을 기획하면서 그동안의 변화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4년 만이었다. 생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연길과 훈춘시도 많이 변했고, 두만강을 따라가는 길도 예전보다 더 검색이 엄격하고 경직된 분위기였다.

잃어버린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두만강을 건넜던 많은 사람들이 살아서 다시 강을 건너오지 못했고, 그 이후엔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 또는 하루의 끼니를 위하여 조국을 등진 많은 사람들이 다시 강을 건너지 못한 아프고 서럽고 안타까운 두만강은 엄상빈 작가의 사진 속에서도 차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으로 펼쳐진다. 강 자체도 경계의 이쪽과 저쪽을 가르고 있지만, 두만강 사진조차도 차창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으로 나뉜 장면은 두만강이 단순히 영토만 경계 지은 것이 아니라 사상과 이념과 정서를 포함한 많은 것들을 갈라놓고 있음을 시사한다.

 

“연길 수산물시장에서 한 상인이 ‘이 조개는 한 시간 전에 나진에서 잡아온 신선한 것’이라는 말을 하는데 기분이 참 묘했어요. 사람은 분단 70년이 지나도록 가족조차 자유로이 만나지 못하는데…”  


작가노트에서 밝힌 엄상빈 작가의 안타까움은 사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언제나 저만치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하는 풍경은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카메라 앞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조선족 동포의 표정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납득케 한다. 마치 우리의 지난 6, 70년대를 보는 것 같은 흑백사진 속 인물들의 순수한 모습은 우리의 본래 얼굴을 상기시켜주면서 자본주의 그늘 아래 그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두만강변 사람들』이라는 사진집 출간과 함께 1월 7일부터 아트스페이스 애니꼴에서 40일간 전시된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은 1997년 서울 코닥포토살롱에서 전시된 〈청호동 가는 길〉, 그 이듬해 출간된 『속초 아바이 마을, 청호동 가는 길』과 짝을 이룬다. 두만강변 사람들이 북쪽 경계선을 넘었다면, 속초 청호동 사람들은 남쪽 경계선을 넘어온 사람들이다. 북쪽으로 간 사람들은 연변의 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고 남쪽으로 온 사람들은 실향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엄상빈, 또 하나의 경계 2, 2001, 양양


ⓒ엄상빈, 또 하나의 경계 1, 1997, 속초
 

“처음에 속초 청호동, 속칭 ‘아바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그 회색빛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마을 자체가 흑백사진의 톤이었어요. 아마 컬러 필름으로 찍었어도 흑백사진으로 보였을 거예요.”


생경하고 강렬한 첫인상은 그가 남북분단에 관심을 갖고 지금까지 계속하여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한 시발점이 되었다. 그 이후 실향민과 동해의 철조망, 연변 등지를 촬영했는데, 특히 1980년대부터 시작한 “또 하나의 경계”라는 철조망 작업은 일상적인 생활에 경계를 만들어내는 남북분단의 현실을 보여준다. 작가는 7번 국도변에서 자란 탓에 어려서부터 보아온 낯익은 바닷가 풍경이었다고 말하면서 철조망을 이용해 호박넝쿨을 키우고 빨래나 오징어를 널어 말리기도 하는 이 구조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묻고 있다. 철조망조차 생활주변에 너무 가까워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을 들춰내 인위적인 경계의 의미를 꼬집고 있는 것이다.
 


ⓒ엄상빈, 학교이야기, 1999


ⓒ엄상빈, 학교이야기, 1997

낮고 약한 사람들에게 향하는 시선
그는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교이야기”라는 작업을 남겼고, 그밖에도 “창신동 이야기”와 “들풀 같은 사람들”이란 작업을 통해서는 사진과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함께 기록했다. 이 사회에서 약자인 사람들에게 카메라가 향하는 건 그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털어놓기 힘든 과거를 이야기하게 만드느냐며 신기해해요. 물론 만나서 다짜고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아니지만 한두 시간쯤 지나면 살아온 이야기들을 꺼내놓는데 그런 상황이 되면 사진도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워집니다. 사실, 내가 촬영하는 기본자세는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대상을 존중하면서 찍는 것이거든요.”  


엄상빈 작가는 극적인 사진보다는 자연스러운 사진을 추구한다.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진, 과장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진솔한 사진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의 사진 속 인물들은 긴장감 없이 편안해 보인다. 사진에 찍히는 대상과 눈높이를 맞추고 낮은 자세로 다가가기 때문에 속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이리라.

마른 외모에 조용한 분위기라서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고등학교 교사 시절에 17년간이나 학생주임을 맡았다고 한다. 날마다 사고뭉치들과 함께 지낸 셈인데 그런 시간들이 그가 2006년에 발표한 『학교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1980년대와 90년대 시골 고등학교 아이들의 현주소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데, 작가는 사진집 발표 후에 감동을 받게 된 일화를 이야기해주었다.

 

“방송국에서 이 아이들이 지금은 어찌 지내는지 취재하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10년 이상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그 아이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말썽꾸러기였던 한 학생은 아주 착실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그 학생은 오래전 이야기지만 창피하다며 일터에서 떨어진 곳으로 가서 촬영하자고 했다. 선생님과 풀밭에 앉아 이야기하는 장면을 찍을 때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더니 “선생님,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해 놀랐다는 엄상빈 작가는 대진에서 교사가 된 제자를 찾아가서는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어떻게 교사가 되었냐는 물음에, 그 학생은 “선생님이 복도에서 저에게 ‘너 수학 잘한다’고 칭찬해주셨잖아요. 그때부터 수학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되어 저도 선생님처럼 수학교사가 되었어요.”라고 답했다. 자신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지나가는 말이 한 사람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과, 그렇다면 어떤 학생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준 일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섬뜩했다는 것이다. 그런 막중한 책임이 있는 교사직을 일찍 그만두길 잘한 거 같다며 웃는 그가 이제는 사진가로서 옷깃을 여미고 더 겸손한 자세로 대상에게 다가가는 것도 그런 경험들과 무관치 않을 것 같다.

 


ⓒ엄상빈, 아바이마을, 1997


ⓒ엄상빈, 아바이마을, 1986


강원도의 힘
지금은 속초를 떠나 살지만 강원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군대생활을 하고 교사생활을 하며 또한 강원도의 사진가로 활동해온 엄상빈 작가는 한편으로는 강원도 출신이어서 남북분단을 더 가깝게 체감하며 촬영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고성산불로 촉발된 자연환경에 대한 깊은 고찰을 통해 생명과 환경에 대한 작업을 더 열심히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고성에서 산불이 나자 한 학자가 신문에 이런 글을 기고했어요. 앞으로 60년 동안 이곳에서는 생명체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요.”


그러나 인간의 얕은 예측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산불이 진압된 현장을 찾은 그는 채 한 달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고물거리고 꿈틀거리는 생명체들을 발견하고 감동했다. 그뿐인가, 땅 위에 있던 가지는 불탔지만 땅속의 뿌리는 살아남은 나무들이 봄이 오자 새순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는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감동을 〈고성 오늘〉(1995), 〈고성 산불〉(1998), 〈생명의 소리〉(2008) 등을 통해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또한, 강원도의 자연을 보여주는 작업 외에도 “강원도의 힘”(2015)이란 전시와 책을 통해서 강원도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었다. 30여 년간 그가 촬영한 강원도 사람들은 강원도 대자연과 더불어 강원도를 지탱해온 ‘강원도의 힘’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작가의 말대로 애써 가꾼 밭이 가뭄으로 또는 홍수로 모두 망가져도 그다음 해 다시 씨를 뿌리는 끈질긴 저력, 그런 힘이 어떤 상황에 놓여도 살아남는 억센 생명력이 아니겠는가. 고성산불에도 살아남은 나무들처럼 말이다.

강원도 사람인 엄상빈 작가의 특기도 “무슨 난관이 있어도 끝까지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끝까지 하는 것은 자신이 있다며, 아마 스무 살부터 산에 다닌 덕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는 6,194m의 매킨리 정상을 등정한 기록을 갖고 있고, 정상 공격조는 아니었지만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경험도 있다. 북극에 가까워 제트기류가 심하기 때문에 체감으로는 거의 8,000m급에 해당한다는 매킨리의 정상에 섰을 때 그는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장 컸다고 말한다.

“호흡이 긴 작가”라는, 엄상빈 작가에게 향하는 평은 가장 적확한 표현일 것 같다. 긴 호흡을 갖고 뚜벅뚜벅 정상을 향해 오르는 산악인처럼 사진에서도 그는 한 걸음씩 차근차근 그가 목표로 하는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는 후배들에게 항상 “길게 봐라, 오래 봐라.”라고 말한다. 정상을 맛본 그의 말이므로 공허하지 않게 들리는 이 말은 엄상빈 작가가 앞으로 어디까지 나아가게 될지 모르지만 그를 버티고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될 것 같다.

 
엄상빈 작가 작업 모습
 

글 :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19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