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남아 역사가 되다 ⑤ : 학도병, 60년만의 역사귀환


〈사진1〉 1950년 7월 대구역. 전선을 향해 기차에 먼저 오른 학도병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까,
홀로 남겨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깊은 수심에 잠겨있다.
어느 학도병이 든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학도병들이 줄지어 기차에 오르고 있다. Ⓒ 임인식


1950년 7월 대구역. 전선을 향해 기차에 먼저 오른 학도병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까, 홀로 남겨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깊은 수심에 잠겨있다. 어느 학도병이 든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학도병들이 줄지어 기차에 오르고 있다. 그들은 죽음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그 길이 조국을 위한 길이라 믿었기에 기꺼이 나섰다. 사실 그 기차를 탄 학도병은 대부분 전사하였다. (사진1) 전쟁 당시 학도병은 대부분 대한 학도 의용대를 거쳐 군에 입대했고 국군 10개 사단과 예하 부대에 배속되어 임무를 수행했다. 27,700여명의 대한 학도 의용대가 전투에 참가했다.  

경기도 경기문화재단과 한국전쟁 60주년 사진집 ‘1950 0625’ 발간을 준비하면서, 필자는 2년에 걸쳐 국내외 자료를 발굴, 수집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에 관련된 자료를 찾느라고 동분서주하고 있을 무렵 한국전쟁 당시 종군사진가로 참전했던 사진작가들의 유족과 자연스럽게 만나며 신뢰를 쌓아갈 기회를 가졌다. 그 가운데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의 책임자로 활동했던 임인식중위의 자제분인 임정의씨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임정의씨는 선친인 임인식 중위의 사진뿐만 아니라 필름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귀한 필름을 볼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해 주었다. 필름의 일부가 부서진 것들도 있었지만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혹여 힘주어 만지면  필름이 바스락 부서질까 손가락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힘을 뺀 채 조심조심 며칠 동안 면밀히 살핀 끝에 학도병의 이미지를 발굴하였다. 일순간 숙연해지면서 장엄한 슬픔이 밀려왔다. “60년 만에 그들을 만난 것이다. 비로소 역사가 그들을 맞이하는구나!” 우리 역사는 늘 이런 빛나는 젊은이들의 용기와 희생이 있었다.


 

〈사진2〉 스리쿼터 트럭에 몸을 싣고서 낙동강전선으로 떠나는 학도 의용군의 결연한 모습이다. 자원입대한 그들은
군번도 없이 군복대신 교복과 모자를 착용하였고 변변한 무기도 없어 일제 소총을 들어야 했다. Ⓒ 임인식

학도병 사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진 또한 임인식 작가가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2)는 스리쿼터 트럭에 몸을 싣고서 낙동강전선으로 떠나는 학도 의용군의 결연한 모습이다. 자원입대한 그들은 군번도 없이 군복대신 교복과 모자를 착용하였고 변변한 무기도 없어 일제 소총을 들어야 했다. 전쟁초기 학도 의용군은 북한군의 낙동강 교두보 동부 지역 돌파작전에 맞서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 〈포화 속으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임인식작가는 역사적으로 증언가치가 있는 소중한 다큐멘터리작업을 남겼다. 새롭게 발굴된 그의 사진 또한 역사 기술의 주요한 증거들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은 시간을 보존하기 때문에 매체조건이 역사에 가깝다. 역사연구의 목적이 과거의 교육을 통해 현재를 이해하는 데 있다면 바로 사진이 그 몫을 담당할 수 있다. 항상 사진은 과거시제로 해석되는 사회적 인식체이기에 은연중에 사회의 갈등과 구원을 담고 있다. 이러한 기능을 지닌 사진이 과거시제의 사진과 시간과 장소 등 문안과 어울려 의미를 형성함으로써 독자에게 충격을 주게 되는 것이다. “아, 그랬었구나!” 이것이 시간으로 해석되는 사진 언어요 구원의 사진미학이다. 구원의 사진미학은 역사교육의 기능을 지닌 범속한 깨우침의 불씨가 된다. 바로 과거시제로 해석되는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인식체가 사진이며 나아가 사진이 문안과 어울려 정확한 의미를 형성할 때 비로소 올바른 역사 교육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글 이기명 발행인 겸 편집인
해당 기사는 2017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