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우, 유현미, 임창민 | 사진·미술·영상 융복합 이미지


 

현대 시각예술의 경계는 그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고, 시각매체간의 구분 역시 모호해졌다. 탈장르화는 새로운 예술작품의 신선한 재료가 되었으며, 예술의 다양성을 제공해주었다. 이번 스페셜이슈에서 「사진예술」은 서로 다른 장르가 만나고 부딪히면서 창작되는 융복합의 작품을 소개한다. 고상우 작가의 ‘오리지널과 디지털’, 유현미 작가의 ‘사진과 회화’, 임창민 작가의 ‘사진과 영상’ 작품을 감상하면서 현대 시각예술 안에서 사진의 예술성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고상우 | 푸른 세상의 이면

현실의 결핍이 낳은 소망, 현실의 욕망이 내재한 환상을 살피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때가 있다. 뻔히 드러나는 것에 감춰진 것들, 익숙하게 드러내는 것에 숨겨진 것들을 감은 눈으로 바라본다.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반전(네거티브 필름)에 반전(포지티브 인화)을 거듭했던 필름 사진에서, 너무 당연해 무심했던 그 전도의 순간에 작가 고상우는 사진을 멈췄다. 현실을 바꾸고 싶은 소망을 환상 같은 푸른 세상으로 펼쳤다. 고상우의 푸른 세상은 퍼포먼스와 페인팅 그리고 사진으로 피었다. 가장된, 투영된, 반영된, 변형된 푸른 세상에서 진실이 떠오르는 것은 결국 그 과정의 끝이 반전된 색임에도 불구하고 선연한 사진이기 때문이다.

반전된 이미지가 꾸는 푸른 세상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감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진실을 사진에서 꿈꾼다. 어긋나고, 부서진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기 위해 애써 감은 눈이었다. 세상의 빛에 감광된 사진의 잠상이 암실에서 의도하지 않은 강한 빛에 의해 반전돼 보였을 때, 작가 고상우는 자신이 그리던 세상을 찾았다. 필름 사진의 솔라리제이션(solarization)으로 만난 전도된 세계였다. 흑백 사진에서 흑과 백이 반전되고, 컬러 사진에서 노랑이 남색으로, 연두가 보라로 세상의 색이 반대(보색)로 바뀌었다. 이후 디지털 사진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의 인버트(Invert) 기능으로 옮겨졌으나, 고상우의 반전된 세상은 작가 내면의 빛으로 현실에서 치밀하게 색을 구성하고 완성해 비춘 세계이다.
세상이 노란 것도 아닌데, 고상우의 전도된 세계는 푸른색으로 시작했다. 미국 사회에서 차별받은 황인종의 피부색이 파랗게 반전된 자화상이었다. 동양인 남성에게 가해진 편견과 폭력과 소외, 그로 인한 청소년기 상처는 벗겨낼 수 없는 피부처럼 깊은 흉터로 남았다. 그러나 정작 암실에서 필연처럼 만난 반전된 사진에는 흑인과 백인, 황인이라는 인종의 색은 사라지고 개개인의 밝기 차이만 있었다. 전도된 사진의 세계에서 이방인, 이주민, 아웃사이더, 타자라는 현실의 틀은 무너졌다. 사라진 편견과 차별의 경계에 고상우는 자유로운 영혼의 나비를 날게 하고, 사랑과 열정 그리고 생과 함께 소멸을 상징하는 꽃을 피워냈다. 인물의 몸과 배경과 소품에 반전될 색을 입히고 재구성해, 소망과 환상으로 이뤄진 푸른 세상을 만들었다.
고상우의 푸른 세상은 지난 20여 년간 사회가 규정한 가치와 경계, 기준과 평가를 전복해 왔다. 작품 “Rose thorn II”(2006)(p.46)에서처럼 비대한 여성은 자연의 풍만함으로 아름다움의 기준을 흩트리고, “Kiss II”(2008)(p.47)에서는 보디 페인팅한 인간의 몸이 이성애를 뛰어넘어 사랑의 경계를 무너트린다. 또 과도한 물질사회에 감춰진 욕망의 전라를 상품에 에워싸인 나약한 인간으로 작품 “My Choice II”(2016)(p.49)에서 내보이고, 유한한 인간이 꿈꾸는 영원한 사랑을 죽음 이후의 순간으로써 생생하게 “Join me there”(2012)(.p48) 등의 작품에서 부활시켰다. 고상우의 푸른 세상은 차별과 소외, 정상과 비정상의 판단과 편견을 넘어 변하지 않을 사랑을 꿈꾸며, 현실의 절망을 극복하는 희망의 세계로 확장했다. 하늘과 바다의 푸른빛처럼 너무 찬란하기에 인간의 손이 닿기 요원한 비애를 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희구하는 푸른 꿈과도 같다.
고상우의 찬란한 사진에 스민 비애는 비단 전도된 색 때문만은 아니다. 사진 속 인물의 감은 눈과 처연한 제스처, 순수하지만 연약한 나비와 꽃, 그 위에 흘리거나 뿌려진 페인트에는 화려함 뒤로 슬픔이 배어 있다. 소망이 결핍 위에, 희망이 절망 위에 피어난다는 것을 작가는 사진 속 모델과 장시간이 아닌 장기간의 소통 속에서 시각화한다.(p.45) 예측 불가한 삶에서 떠안은 깊은 상처를 비명이 아닌 환상으로 드러내고 싶은 모델은 카메라 아래에서 눈을 감고 치유와 회복을 꿈꾼다. 작가는 모델의 감은 눈 위에 자신의 상처와 사랑을 투영해 함께 꿈을 꾼다. 촬영하다 잠든 모델의 몸에 눈물 같은 페인트를 흩뿌리고, 펄럭이는 나비의 영혼을 붙이고, 그 영혼이 영원한 사랑에 가 닿기를 색을 입힌 꽃으로 소망한다. 작가의 행위는 지켜봐 주지 않는 퍼포먼스로, 씻겨 사라질 그림으로, 그리하여 환상 같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푸른 세상에 남겨진 얼굴들
작가 고상우에게 몸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오브제이자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세계이다. 차별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색을 칠한 몸부림으로 표현하고, 폭력으로 인한 기억의 상흔은 시의 읊조림으로 써 내려갔다. 몸은 오롯이 자신만의 것으로, 스스로 드러내고 싶은 것과 선택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도구였다. 대중 앞에서 펼치는 퍼포먼스보다 오로지 한 장의 사진을 위해 펼치는 퍼포먼스에서 그는 더욱 내밀한 자신을 표현했다. 지난 20년간 많은 작품 속에서 자기 얼굴을 드러내며 이어지고 있는 셀프 포트레이트는 삶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의 결과이자, 세상의 소멸해가는 존재에 대한 사랑이 성장하는 기록이다.
2001년 백인과 황인, 남성과 여성, 아름다움과 추함의 기준과 가치를 전복하고자 한 노력은 긴 머리의 셀프 포트레이트를 반전한 “Martha”(2001)(p.50) 등의 작품으로 남았다. 날카로운 가위로 여장한 긴 머리를 잘라내는 순간은 붉은 고통과 슬픔을 끊어내는 행위이자 극복의 결심이었다. 또 눈을 감은 얼굴에 색을 칠해 우는 듯 웃고 있는 피에로가 되어 반전한 작품 “Pierrot”(2012)에서는 여전히 지속하는 고통을 스스로 추스르려는 의지를 손의 제스처와 눈가의 하트로 남겼다. 2017년 “The True Voice” 시리즈에서는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이성과 영혼, 인지와 감각, 삶과 죽음을 탐색하기 위해 얼굴에 색을 칠하고, 글씨를 쓰며,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2018년 작품 “The Man in the Box(나는 상자 속에 갇힌 사람)”에서는 조선에서 숨이 끊긴 마지막 범으로 자신을 탈바꿈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폭력 앞에 절멸한 존재의 슬픔을 표현했다. 민머리의 벗은 몸에 범의 무늬를 칠하고 인간이 들이댄 총구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인간이 포획하는 영광을 위해 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퍼포먼스로 표현해 영상과 사진에 담았다. 반전한 피에로 얼굴에서 멸종된 조선의 범으로 변화하고, 마침내 피에로 사자로 변형한 작품 “Pierrot Lion”(2019)에서 작가는 감은 눈을 뜬다.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의 눈에서 원하지 않아도 자라고, 잘라도 아프지 않을 머리카락에 고통을 느껴야 했던 이십 대 고상우의 눈빛을 본다. 또 반전된 세상을 꿈꾸며 노란 눈가에 분홍빛 소생과 부활을 기원하는 초록색 하트를 그리던 작가의 얼굴을 마주한다. 자화상은 물론 눈을 감은 타인의 얼굴과 눈을 뜬 동물의 얼굴에서 일관되게 유사한 환상과 비애의 분위기가 드러나는 것은 그 모든 얼굴에 그의 얼굴과 삶이 깃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 고상우가 감은 눈을 뜬 최근작 “Animal” 시리즈는 유의미하다. 인간에 의해 위기에 처한 순수한 존재의 두려움과 슬픔 가득한 눈에서 발하는 생명의 빛이 작품을 보는 인간들의 눈빛과 조응한다.
동물원과 농장에 갇힌 동물에게서 자기를 닮은 눈빛을 찾아 사진으로 촬영하고, 그 사진을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반전해 털 한 올 한 올, 눈동자 하나하나를 디지털 드로잉했다. 애초 사진인지 알아채지 못할 만큼 그림 같은 작품에 굳이 사진이 필요했던 이유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다. 그에게는 바꿔야 하는 현실의 무엇인가가, 바꾸고 싶은 세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환상이 현실에서 피어나듯, 고상우의 환상은 현실의 사진에서 피어나야 했다. 집요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바꾸고 싶은 것은 정작 사진의 색이 아니라 사진에 박혀 있는 냉혹한 현실이다. 사회가 규정한 정상의 기준과 가치평가에 무너진 인간, 난무하는 권력과 폭력에 상처 난 인간은 인간의 욕망에 파괴되는 동물과 자연으로 그 존재를 확장해, 사진 속 푸른 세상의 이면에서 인간 세계의 진실을 환기한다.

작가 고상우는 세계 속 자신을 가장과 투영, 반영과 변형의 전략으로 표현하며, 삶의 현실을 극복해가는 힘을 작품에서 보여준다. 가장한 얼굴로 편견과 차별에 도전하고, 사진 속 인물의 감은 눈에 소망과 환상을 투영해 상처를 치유하고, 거울에 반영된 자기 얼굴에 색을 칠하고 글씨를 써 사랑을 회복하며, 변형한 동물의 얼굴과 눈빛으로 그 사랑을 확장한다. 인간이 평안 속에 온전한 사랑을 느끼며, 평화를 오롯이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그 시작은 작품 “Mother I”(2014)(p.44)에서처럼 어머니의 젖을 물고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던 아기 때 순간이다. 고상우가 한 명의 작가이자 하나의 생명으로서, 부서지는 장미의 빨간 눈물로 써 내려간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Love Never Fails),”라는 생의 모토를 눈을 뜨고 꿈꾸는 세계에서 다시 만난다. 꿈꿀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명이고, 소망한다는 것은 어른의 세계에도 희망이 남았다는 증거이다.

 



유현미 | 상상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리는 수고스러움을 담은 사진이야기

초록색 문과 빨간 문이 있다. 그림 같은 문. 사진은 그림을 ‘찍었다’ 그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을 알고, 그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머리는 아는데, 머리와 상관없이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긴장하게 된다. 그 문 앞에서 서성이게 된다. (〈두 개의 문〉, 2007)(p.53)
〈두 개의 문〉은 유현미의 작품 중에서도 아주 단순한 구성의 사진이지만, 작품이 관객이 맺는 관계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작품 안으로 관객이 개입하게 되는 지점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단순해 보이는 두 개의 문이 있다. 사진이지만, 사진 속 두 개의 문은 그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렵지 않다. 그림의 흔적을 애써 감추지 않은  그림으로써의 문이 사진에 포착되는 순간, 그리고 그 사진이 사진으로 관객과 만나는 순간, 유현미의 작품은 여느 사진작품들과는 다른 프로세스로 관객을 만나게 된다.

유현미의 사진은 관객을 꽤나 곤란하게 한다. 유현미의 사진은 조각과 회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작품은 사진이지만, 회화이고, 회화이지만 조각이기도 하다. 확실히 그녀의 작품을 ‘사진’이라는 매체에 한정 지어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때문에, 그녀를 두고 사진과 조각, 회화를 넘나드는 작업을 하는 작가라고 부른다. 하지만 융복합의 시대에 그저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라고만 하기에는 여전히 어딘가 부족하다.
분명 그녀는 있지 않은 공간을 찍는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사진은 허구를 담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허구라고 하기에는 그녀가 공간을 만드는데 들인 수고로움을 너무 간과하는 느낌이다. 조소과 출신답게 그녀는 사진으로 찍힐 공간을 꼼꼼히 ‘제작’한다. 창문과 테이블, 의자와 같은 가구는 물론 공간 안에 인물도 직접 제작해서 넣는데, 〈그림이 된 남자〉라는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을 통해서 그녀가 어떻게 인물을 만들어 넣는지를 공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공간이나 사물을 제작하고, 그 위에 그림을 더하는 그녀의 작업과정은 언뜻 갈라테이아를 사랑했던 조각가 피그말리온을 떠오르게도 하고, 장구한 회화의 역사를 되돌려보게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진으로 ‘캡처’되는 순간, 기계의 눈으로 포착되어 박제되는 과정은 사진매체에 대한 진부한 고정관념에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사진은 사실/현장의 기록인가?

〈Bleeding Blue〉 전시에서 유현미는 깃털로 만든 의자, 공중에 붕 떠 있는 계단 등 비현실적인 상상의 공간과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했고, 기하학적 추상의 공간을 그려찍기도 했다. 처음 그녀의 작품 앞에 선 관객은 작품이 회화인가 사진인가 잠시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사진 속 이미지는 작가가 만들어낸 상상의 공간이고, 그것이 그림임을 알아차린다. 친절하게도 작가는 이것이 그림이냐 사진이냐라는 혼란 속에 관객을 오래두지 않기 위해 붓 자국의 흔적을 그대로 남겼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색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과정은 그녀의 사진 속 그림에서 시간을 삭제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곳에는 중력도 없고,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마치 영원하고 무한한 우주처럼.
일우사진상 수상 기념 전시였던 〈코스모스〉는 이러한 유현미 작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전시였다. 깨진 거울, 구겨진 종이 등 실제 사물을 배치하고 그 표면에 그림을 그렸다. 실재하는 오브제 위에 색을 입히고, 빛과 그림자까지 그려 넣었다. 사물은 캔버스가 되었고, 작가의 붓질이 더해진 후 기존의 사물로서의 기능이 상실된 채 그림이 되었다.
이처럼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한 장의 사진이 만들어진다.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상상의 이미지라는 것을 안다. 허구임을 알고 있지만, 자꾸만 이야기에 빠져든다. 산타클로스가 허구라는 것을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그것이 허구 이미지라는 것을 알지만, 어딘가 저런 우주와 공간이 있을 것만 같다. 회화냐 사진이냐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관객은 이미 작품 속 상상의 공간에서 작가가 한 땀 한 땀 만들어낸 이미지와 그림 사이를 여행 중이다. 다시 〈두 개의 문〉으로 돌아가 보자. 사진 속 공간이 잘 만들어진 상상의 공간, 허구라는 것을 너무나 명확하게 알지만, 어딘가에 그런 공간이 있을 것만 같다. 빨간약과 파란약 사이에서 고민하던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갈등한다. 저 문 중 하나를 열어젖이면, 전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다. 그렇게 상상하는 사이. 눈은 바쁘게 사진을 훑고 다닌다. 사진 속 그림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조각적 공간구축, 회화적 처리, 사진으로의 매체전환 이 몇 가지 구절로 유현미의 작업을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을 무렵 〈수의 시선〉이라는 전시로 관객을 찾았다.

“숫자는 번역이 필요 없죠.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일 년 365일, 존 케이지의 〈4분 33초〉처럼 숫자로만 소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침마다 주식시장의 숫자를 확인하며 세상 돌아가는 것을 집착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숫자의 지배는 더 커질 것 같아요. 주민등록번호와 핸드폰 번호만 알면 저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듯이 말이에요”

전시 즈음 유현미는 한 인터뷰에서 숫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했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기존의 작품제작과정은 견지한 채, 사진, 영상, 설치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초대했다(〈수학자의 시선〉). 그녀가 작업한 숫자들을 보고, 숫자들 안을 거닐다가 문득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 〈나무〉에 나오는 ‘수의 신비’라는 부분이 떠올랐다. 주인공 뱅상은 세상의 이치를 숫자로 파악하던 것처럼, 유현미의 ‘숫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상상을 펼칠 수 있었다.

“1은 인간이 살고 있는 우주를 뜻한다.
2는 1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난다.
2는 분할이며 상호보완적다.
2는 대립하며 보완하는 남성과 여성을 나타낸다.
3은 만물이 정한 정/반/합을 거쳐 발전해 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3은 1과 2의 결함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4는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4는 남녀 한 쌍에서 두 자녀나 친구 한 쌍이 결합하는 것이다.
4는 마을이 생겨나게 한다.
4는 인간의 사지이다.
4는 안전한 상태이다.
5는 신성한 숫자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나무〉에서 발췌

사진은 사실/현장/사건의 기록이라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사진이 있지 않은 공간을 만드는 것은 이제 더이상 놀랄 일도 새로운 일도 아니다. 클릭 몇 번 만으로도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시절에 실제로 목공을 하고, 사물을 가져와 색칠을 하는 유현미의 작업과정은 미련스러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미쉘 공드리의 영화에서 관객이 수공의 매력에 빠지듯 그녀의 작업과정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그래서 클릭 몇 번으로 만들어낸 매끄러운 공간은 작가의 붓질이 겹겹이 쌓여서 만들어내는 공간과 비교할 수 없다. 유현미의 사진은 한군데 머무르지 않는다. 회화와 조각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순식간에 사진으로 넘어간다. 그 안에서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관객을 초대하여 이미지 안에서 상상하게 한다. 누군가 그녀의 작품을 장르로만 이야기하려 한다면 작품의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하는 것이다. 회화의 출발에서부터, 공간, 우주, 숫자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품은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회화에서 시작하여 사진으로 남은 그녀의 작품이 유독 시선을 끄는 이유이고, 발걸음을 잡는 이유이다.

 




임창민 | The Place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경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 생겨나는 변화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매체, 방식은 물론 시공간에 이르기까지 최근에는 메타버스, NFT등 아날로그적 방식과 디지털방식, 정지된 평면과 움직이는 영상 등의 다양한 매체의 결합은 다양하게 존재하면서 오히려 경계는 사라지고 혼성적인 현대 사회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방식과 가치들이 만나 부딪히고 융합하는 가운데 새로운 시대적인 예술의 모습이 탄생된다.
크로스오버적인 타장르와의 관계성과 혼성과 혼용의 예술적 개념에 대한 변주는 시대적인 당연한 결과물이며 융복합개념으로의 확장으로 인해 예술의 진정한 고부가가치를 창출해내고 있다. 장르와 장르, 형식과 형식, 전통과 현대, 순수와 실용의 경계가 자유롭게 뒤섞이고, 작가들의 사고의 유연함과 변화무쌍한 기술의 발전, 아티스트와 엔지니어의 협력관계, 다양한 새로운 매체의 생성으로 교묘하게 서로 만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으로 예술은 시대적 코드를 읽어내는 시대언어의 통찰로 제3, 제4의 가치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미디어 아티스트인 임창민의 작업은 스틸사진과 동영상이 한 화면에 공존하게 하는 작업으로 어쩌면 시대적 감각을 앞서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차원의 평면을 유지하면서도 움직이는 동적인 요소가 함께 함으로써 가치는 증폭된다. 이는 시공간의 융합이며 안과 밖 두 공간의 융합, 靜과 動의 융합, 감각적 경계의 융합이다. 멈춰있는 사진과 시간이 흐르는 동영상의 상호 작용은 보는 이의 감각의 경계마저 확장시키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두 매체의 상이함에 비해 아주 평이하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감각에 스미게 되므로 편안함을 주는 특징이 있다. 그리하여 한 화면에서의 안과 밖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허물어지고 보는 이들의 감성에 스미게 하는 매력을 발산한다.
임창민의 작업에서의 안과 밖은 실제의 같은 장소가 아니고 편집된 두 개의 공간이 만나는 기호적 공간이다. 즉 의도된 공간학적 해석의 공간기호로써의 새로운 시공간이 생성 되어지는 것이다. 2차원의 평면을 유지하면서도 움직이는 동적인 관계 설정과 상호 작용의 작동으로 인해 사실적 공간보다 더 자연스러운 리얼리즘이 살아있는 고유공간(The Place)으로 재탄생 된다. 우리의 실제 현실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정적인 실내 풍경과 창을 열어 놓았을 때의 움직이는 밖의 풍경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재현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적인 실내와 소담하게 내리는 눈 내리는 풍경이나(p.66), 실내에서 바라본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의 출렁이는 파도 풍경(p.66), 창을 통해 보는 벚꽃의 살랑거림(p.64) 등이 바로 이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지 않은 스틸사진과 동영상 두 매체를 통해 가상과 인위적 예술작품이라는 느낌을 벗어나게 해서 마치 현실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즉 보는 이의 감각이 전환되어 절묘한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임창민의 작업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최상의 시공간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생겨나는 변화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이끌어 낸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창은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하기 위한, 즉 상호작용을 위해 구성된 공간으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는 고유의 장소성이 생성된다. 즉 보이지 않는 경계가 중첩되는 지점에 새로운 에너지가 발생되어 지는 것이다.
모든 공간적 에너지는 순환 구조 속에서 영원성을 갖는다. 경계 영역으로서 창은 이러한 순환 구조 속에서 두 개의 공간들이 서로 만나고 에너지가 교류되면서 순환하고 소통하는 제3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벤야민의 주장에 의하면 “경계 영역은 특정한 한계점을 갖는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 한계점이 없는 무한한 영역이기도하여 동시에 무한 재생산되는 순환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동양사상에서 역시 시공간이 소통하는 유기적 발상 또한 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한옥의 문을 들어 올려 여러 개의 공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 할 수 있는 등 한국적 사유 체계에도 생명 에너지의 무한한 순환의 철학이 담겨있다.(p.67) 임창민의 작업에서 역시 한옥에서의 차경철학과 같은 선조들의 공간 철학이 유기적으로 소통되고 순환하는 영원성이 느껴진다. 임창민의 작업은 공간과 공간이 맺는 관계에서의 상호작용은 새로운 공간의 의미가 생성되어 또 다른 시·공간적 기호 공간으로 완성된다. 누구나 기억의 시간이 있고 기억의 공간이 있다. 오래된 기억은 마치 한커트의 스틸사진처럼 한 장면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임창민의 작업에서는 개개인의 추억을 건드린다. 보는 이들 각각의 추억의 시·공간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상징적 시·공간으로 변환되어 이입된다.

멈춤은 동적인 것을 전제하고, 움직임은 멈춤을 품고 있지만 그 둘은 공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임창민의 작업에서 한 화면에서 만나는 기쁨은 더없는 가치를 선물한다. 짜장면을 시키면 짬뽕이 먹고 싶고, 짬뽕을 시키면 짜장면을 먹고 싶은 것 같은 두 가지 욕구를 한방에 해결해 주고 있는 셈이다. 온갖 기호들을 숨 쉬고 부대끼며 현대적 공간에서 우리가 무엇으로 숨쉬고 있는가를 새삼 일깨워주는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임창민의 작업은 이 현란한 시대의 위로로 존재한다. 노마드 시대를 관통하는 노마드작가로서 오래오래 존재하기를 기대한다.

 
 
해당 기사는 2011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