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제 & 언캐니

 

『사진예술』의 이번 스페셜이슈는 ‘오브제&언캐니’로, 표현 대상으로써 오브제가 갖는 의미와 오브제가 달리 느껴지는 순간에 발생하는 감정을 살펴본다. 김수강, 윤진영, 이지영 작가는 오브제를 통해 익숙한 두려움과 낯선 평범함을 모색한다.
김수강은 일상에서 발견되는 과일, 신문 등의 오브제를 자신만의 감각으로 정지된 시간과 막막한 공간 속에 재배치한다. 윤진영은 일반적으로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곰팡이에 작가만의 미적 요소를 삽입하여 미와 추 사이에서 긴장감을 유발한다. 이지영은 개인적인 감정과 경험에 기인한 오브제를 반복 배치하여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을 시각화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해 탐구한다.

 





김수강 | 단순함 속에서의 미묘한 풍부함

글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김수강의 사진은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을 오랜 시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데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아름다움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이 격조 있는 정물화는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몇 가지 단출한 오브제를 화면 정중앙에 위치시킨 채로 각각 높이를 달리하는 테이블의 수평선이 그 뒤를 가로지른다. 1998년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그간 다양한 소재로 이어졌다. 일상에서 사용되는 여러 기물에서부터 과일과 곡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사진에 등장하는 대상의 차이와는 달리 전체적인 화면의 구성은 거의 변함이 없다. 그저 주어진 대상을 가능한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그 존재의 외관을 일차적으로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별다른 수사나 수식은 배제되고 특별한 연출과 드라마 역시 배제하고 있다. 관념이나 주제, 의도된 개념 없이 오브제를 보여주려는 것에 가깝다. 선입견이나 상식에 의해, 분별심에 의해 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할까, 하여간 그러한 마음이 느껴지는 사진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와 안정감을 주는 구도가 기본으로 설정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소재로 선택된 오브제 자체가 이미 충분히 조형적으로 매력적인 것들인데, 그러니까 미적으로 완성도가 높다는 또는 심미적으로 충분히 깊이가 있다는 작가의 판단에 의해 선별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작업에서 핵심은 흔하고 일상적인 소재들이지만 그것들 안에 잠재된 조형성, 아름다움을 조심스레 들추어내고 은밀하게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그래서 그렇게 보여주는 방식, 방법론으로 사진과 검 프린팅 기법이 무척 효과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김수강의 사진은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그 차이를 은연중 문질러내고 있다. 사실 그 장르의 차이란 것도 무의미해 보인다. 나로서는 그저 멋진 정물화로 다가온다. 마치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 1890~1964)의 적막하고 매력적인, 한정된 색채와 촉각적인 질감 안에 용해된 몇 가지 오브제들의 절묘한 구성으로 빚어내는 그림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을 접한다. 모란디는 평생 자신의 스튜디오에 자리한 테이블 위의 몇 가지 오브제들만을 소재로 해서 정물을 그렸고 형태가 갖고 있던 모든 디테일을 모두 제거하고 본질만을 보여주는 그의 색채와 질감은 또한 이탈리아의 오래된 건축물에서 연유하고 있음도 흥미롭다. 그것은 정물화이지만 동시에 이를 빌어 고대 건축물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기도 한 셈이다. 하여간 모란디의 정물화는 제한된 소재, 단순함 속에서도 얼마나 풍부하고 흥미로우며 강한 개성이 가능한가를 보여주었고 따라서 정물화가 현대미술에서도 의미 있는 것으로 환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모란디의 특별한 명상과 관찰의 결과에 기인한다. 이는 김수강 사진과의 유사성이기도 하다.

김수강의 지난 전시《모든 날의 숨》(21.12.2-21.12.28 | 스페이스22)는 1998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시리즈 중에서 엄선한 작업을 모은 것이다. 다양한 작업이 함께 하지만 최근작인 ‘Fruits and Grains’가 중심을 이룬다. 유학시절과 초기에는 일상의 여러 기물, 김치통, 베개, 화장지, 옷, 접시, 보자기 등을 소재로 했지만 최근에는 주로 과일과 곡물을 다루고 있다. 하나 혹은 몇 개가 적조하게 배치된 구성과 단색조로 물들인 화면 아래 근작인 과일과 곡물들은 공허를 두르고 화석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것들은 적당한 크기의 접시에 담겨있거나 바닥에 놓여 있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차분하게 바라보며 촬영했는데 그것은 관심과 무관심의 사이에 놓인 시선이다. 작은 오브제, 몇몇 대상만이 적막하게 존재한다. 본래의 형태를 그저 가만히 부감시켜 줄 뿐인데 그 위로 아주 오래도록 그것을 응시한 결과물로서의 침전과 관조가 내려앉아 인화지의 피부를 고요히 물들이고 있다. 작고 가볍고 흔한 이 일상의 오브제들은 세상과의 연관성을 홀연히 지우고 마냥 고독하다. 그것들은 자신의 생애를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 제각기 자신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분명 그렇게 존재한다. 사진은 그 존재성을 각인시키는 훌륭한 도구다. 그렇지만 모든 사진이 그 존재성을 방증한다 하더라도 작가들마다, 그들의 사진마다 오브제의 존재성이 외화 되는 방식, 느낌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김수강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오브제의 존재감, 오브제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기억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은 차분한 명상과 오랜 관찰과 고요의 시간 속에서 오브제를 길어 올리는 그만의 표현 방법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때 검바이크로메이트기법(검 프린팅 기법)이 작가에게는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작가는 꼬박 2~3일이 걸리는 인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농도와 질감을 끌어내기 위해, 담그고 칠하기를 거듭 반복한다. 이 수공예적인 손작업은 사진이라는 기계적 매체와 손의 노동을 요구하는 프린트 기법과의 만남 아래 가능해진다. 보통의 사진 작업이 촬영과 현상, 인화로 그 과정을 크게 설명할 수 있다면, 검 프린트는 촬영이 끝난 후 밀착을 위한 필름을 새로 만들고, 인화지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모종의 까다로움이 남아 있다. 아울러 물감이 섞인 유제를 바르고 마르기를 몇 번씩 반복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얻는다. 그것은 기계복제로서의 사진의 간편함과 효율성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여전히 고전적이면서도 수공적이고 그런가 하면 회화도 아니고 판화나 사진도 아닌, 그 사이 어디선가 서식하는 기이한 중성의 지대에서 미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그런 독특한 아우라를 지닌 이미지로서 자존한다.
사실 이 작업은 상당히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이다. 검 프린팅으로 이루어진 김수강의 작업은 대상의 기계적 재현인 사진과 회화 사이에서 유동한다. 그것은 사진의 명확한 윤곽선을 뭉개고 회화가 미치지 못하는 객관세계의 재현을 실현한다. 동시에 서정적인 여운이 동반되는 색채를 힘껏 우려내면서 차가운 사진의 기록성을 넘어서고자 하며 소묘에서 접하는 자연스러운 맛을 끌어들인다. 오브제를 통제해서 있는 그대로를 재현한 사진이지만 동시에 주변배경을 지우고 오로지 대상에 세밀하게 달라붙어 역설적으로 추상적인 공간에 놓인 기이한 오브제와 맞닿도록 한다. 또한 오브제가 지닌 고유색이 아니라 추상적인, 임의의 단색이 칠해진 표면은 객관적 대상을 그로부터 독립된 또 다른 세계로 감지시킨다. 모노크롬으로 착색된 이 사진은 비현실적인 공간에 영원처럼 자리한 한 생명체를 오랫동안 응시하게 해준다. 사진이지만 사진이기를 그치고 회화이지만 회화에서 미끄러지면서 그 둘의 장점을 끌어들여 응고시킨다. 감광제와 물감을 혼합해 필름과 함께 빛에 노출시키면 빛에 노출된 부분은 물감이 굳고 노출 정도에 반비례해 물에 씻겨나가면서 상이 맺히는, 다분히 회화적인 이 인화기법은 까다롭고 집요한 노동과 지난한 시간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작가가 수집한 간절한 대상/생명체를 다시 재현하는 이유와 긴밀히 맞닿아있다. 사라지는 것, 죽은 것을 환생할 방법은 없다. 다만 이미지를 빌어 그것의 존재성을 불멸의 것으로 대치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자 이미지의 근원에 자리한 욕망이다. 스스로 그렇게 된 형상들이고 경이로운 아름다움과 신비스런 생명의 결정으로 환하게 눈을 끄는 것들이다. 가벼운 식물은 제 작은 몸으로 생명체의 존엄함을 스스로 발설한다. 오묘하고 기특한 형태와 아득한 이치들이 저 작은 몸에 잔뜩 웅크리고 있다. 단독으로 설정된 이 작은 생명체는 일종의 미라다. 죽은 것들을 기념하는 것이고 그것들에 대한 애도이다.

김수강은 세상의 작은 오브제들과 조우한 기억, 그 만남을 사진으로 품는다. 그것은 일회적인 삶의 흐름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그 모든 것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자의 마음에 잠긴 풍경이다. 그 풍경은 고독하고 다소 아련하다. 작고 소소하지만 우리네 일상 속에서 함께 하고 있는 대상들을 적막하게 떠올려 보여준다. 우리는 매번 그 대상들을 보았지만 단 한 번도 그것 자체를 하나의 고귀한 존재로, 오랫동안 응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김수강의 사진은 새삼 우리가 보고 접해왔던 이 세상의 모든 오브제를 다시 보게 하고 다시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 아래 도구화되거나 사물화된 대상들을 홀연 단독으로 위치시켜 그 오브제에 부여된 선험적인 인식이나 관계의 끈들을 끊어내고 오로지 그것 자체만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게 하는 배려를 두텁게 두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대상의 진실이나 사실성을 기록하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미감이나 주제를 재현하거나 드러내는 사진도 아니며 특별히 선택되고 공들여 꾸민 사진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일상에서 우연히 발견한 오브제를 자신의 감성의 결과 감각의 톤으로 슬그머니 매만져 다시 올려놓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사진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전적으로 오브제만을 독대하게 하고 그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한다. 정지된 시간 속에, 막막한 공간 속에 홀로 남은 저 오브제가 나에게 처음 찾아온 낯설고도 신비한 존재인 듯 하다.




 



윤진영 | 경계 너머, 존재에 관한 시선

글 손영실 경일대 사진영상학부 교수

지구상의 생명체는 그것이 미시적 수준이건 혹은 거시적 수준에 있던지 간에 끊임없는 진화의 과정을 거쳐 살아남았다.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는 자신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인간의 문명과 역사를 유전자를 중심으로 논의하며 동물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행동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고 여기서 인간은 한낱 유전자 조합과 운반의 기계임을 상기시키면서 인간의 존재 이유를 되묻게 만든다.

윤진영의 작업은 생물학적 요소들을 예술 창조 과정에 활용하는 바이오 아트(Bio Art)에 속한다. 이것은 브라질 출신의 예술가 에두아르도 칵(Eduardo Kac)이 1997년 생물학(Biology)과 예술(Art)의 협업을 통해 제작한 자신의 작품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

작가의 《분해자(Decomposer)》 (2016) 는 자신이 배양한 곰팡이를 주재료로 사용하여 여러 대상 혹은 표면에 물감처럼 바른 후 시간이 경과한 후 생성된 결과물을 사진으로 찍은 작업이다. 여기에 속한 작품들은 크게 네 부류로 구분되는데 동물의 잘린 머리 형상을 보여주는 <침입종 (Invasive Species)>(p.54-55), 여러 종류의 동물 표면을 덮고 있는 <곰팡이 동물계 (Fungal Animalia)>(p.58-59), 미세한 디테일이 모여 생명력을 간직한 죽음의 풍경처럼 재현된 <곰팡이 아포토시스 (Fungal Apoptosis)>(p.62), 두 종류의 곰팡이를 나란히 접종하여 배양했을 때 경계 부위에 나타나는 생물학적 힘의 작용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경계(The Boundary)>(p.56, 60)가 그것이다.

곰팡이는 본체가 가느다란 실 모양의 균사로 이루어진 균계(fungi) 생물이다. 지구의 생명은 현재 그 이유를 완벽히 알 수 없는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우선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어떤 존재다. 살아남으려 하지 않는 생명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생명은 후손을 가지기 전에 죽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다 후손을 가지더라도 그 후손은 부모처럼 생존의 지향성이 약하거나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생명은 멸종할 것이다. 살아남으려한다는 것은 여러가지인데, 이를테면 맹수를 만나 공포감을 느끼고 도망가는 것도 살아남으려는 지향일 수 있다. 사자를 만나 공포심을 못 느끼고 같이 놀려던 토끼는 후손이 없을 것이다. 그런 토끼의 종이 멸종했을 거라는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생명은 끈질긴 생명력, 즉 살아남으려 하는 지향성이 강한 존재들이고, 그 지향성은 생명의 대를 이어 본능으로 상속되고 탑재된다. 곰팡이로 가득한 동물 두상인 <침입종(Invasive Species)>과 하나의 표면에 나란히 놓여진 두 종류의 곰팡이가 퍼져나가는 <경계(The Boundary)>에서 우리는 곰팡이의 생명력을 냉정히 확인한다. 그런데 그 생명력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감동할 수 있을까.  
생명력으로 무장되어있음에도 생명이 살아남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생명에게는 야속하게도, 생명이 사는 공간 즉 서식환경이 종종 적대적이다. 생명을 가차없이 죽음으로 내모는 곳이 환경이다. 환경은 전일적이지 않고 여러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생명 종도 그것이 사는 환경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인간이 사는 환경에는 곰팡이도 산다. 인간에게 곰팡이는 환경의 요소, 즉 환경 그 자체다. 이는 곰팡이에게도 마찬가지다. 즉 곰팡이가 사는 환경을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두 번째 사실은 잘 인지되지 못한다. 곰팡이의 관점이나 생태계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곰팡이를 멸종시키는 악당일 수도 있지만 생태계에서 유리된 인간의 관점에서는 곰팡이가 악당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곰팡이의 생명력을 논리적 사유를 관장하는 전두엽을 통해 확인함에도, 정서적 뇌를 통해서는 곰팡이를 불편하게 보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팡이가 가득한 예술작품은 어떨까.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려면 “곰팡이가 가득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특정해야 한다. 작가는 곰팡이가 어떻게 가득하게 했는가. 벽지에 핀 곰팡이는 인간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지만, 작품 속 곰팡이는 어느 정도는 작가 의지의 산물일 수 있다. 작가는 배양한 곰팡이를 특정한 팔레트 위에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펼쳤다. <경계(The Boundary)>를 생각해보자. 하나의 표면에서 두 종류의 곰팡이가 퍼져나가면서 서로 만난다. 그 경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물학으로 무장하지 않고 맨눈으로 그 부위를 본다면, 우리는 그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현미경으로 보면 그곳에서 세번째 종의 곰팡이가 생성되었는지, 즉 두 종이 그곳에서 만나 새로운 종을 낳았는지, 아니면 여전히 무대 위에 두 종의 곰팡이들이 병렬되어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없는가? 있다. 경계 부위와 다른 부위 상의 시각적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차이가 미학적 평가의 대상일 수 있다. 아마도 색감의 차이와 밀도의 차이 등을 우리는 미학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추, 불편함, 역겨움 같은 정서가 예술적이거나 미학적인 경험이라면 사정은 또 달라진다. 경계 지역과 비 경계 지역의 색감 차이와 밀도 차이의 인식 속에 곰팡이에 대한 부정적 정서가 결합할 수 있다. 색감 차이와 밀도 차이 인식의 기저에 곰팡이의 존재를 지울 수 있을까? 있다. 작품을 멀리서 보면 된다. 그러면 색감 차이와 밀도 차이는 보이되, 색감 차이와 밀도 차이의 구성요소, 즉 곰팡이는 안보일 것이다. 작가가 <경계>를 늘 멀리서 보라고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멀리서 볼 수 있고, 그 다음에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가까이서 보다가 나중에 멀리서 볼 수도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 어떤 아름다움도 미시적으로 관찰하면 아름다움의 세계가 추의 세계로 바뀌거나,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세계로 바뀔 것이다. 작가는 이 원리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경계>는 이러한 보편적 원리를 특정한 요소인 곰팡이를 이용해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거리로서의 공간에 주목한 발상이다. 세상 만사는 거리의 함수다. 언뜻 보면 색상으로 인해 아름다워 보이던 대상이 곰팡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 역겨움 혹은 불편함의 언캐니 (uncanny)한 감정이 생겨나다가 사라지는 것, 모두 거리의 함수다.

시간에 주목한 발상도 작가에게서 확인된다. 작가는 곰팡이를 배양했는데, 배양이 곧 시간 함수와 관련된 일이다. 곰팡이를 배양하는 플레이트에서 어떤 곰팡이는 먼저 배양되었다가 일찍 급사할 수 있다. 늦게 배양되었다가 오래 살아남은 개체도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세계에서 생명력을 가진 개체, 플레이트라는 환경에 잘 적응한 개체만이 살아남아 물감으로 쓰인다. 오브제 위에 물감처럼 발라진 곰팡이를 작가는 다시 놔둔다. 시간이 흐를 것이다. 플레이트 안에서나 오브제 위에서나 곰팡이들은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른다. 다윈(Charles Darwin)의 이론은 가차없다. 다만 그 원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현미경으로 보더라도 어떤 것이 살아남는 결과만 보일뿐, 그 원인은 알기 어렵다. 원인을 모르니 어떤 것이 살아남을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학자가 아닌 예술가에게 원인, 예측보다는 유일무이한 결과만이 중요하다. 어느 시점에서 작가는 자신에게 미학적으로 의미가 있어 보이는 상태를 사진으로 찍었을 것이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시점이다. 시점은 시간 함수 상의 어떤 지점이다.

작가의 작품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과정을 되돌릴 수 없다. 동일한 과정을 반복할 수는 있다. 반복하더라도 같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유일무이한 결과, 재현이 어려운 사건은 예술가에게 중요하다. 쉽게 재현되는 작업을 하는 과학자가 개체를 넘어서는 종의 패턴을 알려준다면, 예술가는 존재의 개별성과 소중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작가는 유일무이함을 통해 인간 삶의 존재적 불확실성에 접근한다. 이런 점에서 사진은 불확실한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경계(The Boundary)>의 피사체인 곰팡이들은 사진이 찍힌 후에 꽁꽁 얼려지지 않는다면 그 형상이 계속 바뀔 것이다. 사진은 꽁꽁 얼리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꽁꽁 얼린 어떤 것에서 과거와 미래를 본다. 사진은 과거와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다.

지난 2년간 인류는 일상적 삶에서 당연히 누려야 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잃었다. 보이지 않는 곰팡이나 유전자들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는 현대 사회에서 작가는 우리 삶의 존재 방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이지영 | 낯익음과 낯설음이 공존하는 이지영의 <마음의 무대(stage of mind)>

글 김소희 한국사진문화연구소 연구원

사진, 설치, 조각, 페인팅, 비디오와 같은 현대미술의 다양한 매체를 혼합하는 이지영은 신화,문학, 영화, 꿈, 경험 등 미술 외부의 요소들을 차용해 확장된 예술을 선보여왔다. 대표적으로 2007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이지영의 <마음의 무대(stage of mind)>는 세트를 제작해 의도적으로 연출한 장면을 사진으로 완성하는 연출사진(staged photography)으로, 퍼포먼스와 영상 그리고 과정미술을 동반하며 탈경계적 미술에 위치한다. 나아가 여성을 대상화된 타자가 아닌 자아탐구의 주체로 설정하면서, 전통미술에 내재한 남성적 시선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런 측면에서 이지영의 <마음의 무대>는 모더니즘의 매체-자율성, 전통적 시선에 도전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지영의 <마음의 무대>는 드로잉과 페인팅, 오브제와 설치 작업 그리고 퍼포먼스를 거치며 사진으로 최종 완성된다. 이처럼 다층적인 프로세스로 이루어지는 이지영의 작업은 미국의 현대미술작가 샌디 스코글런드(Sandy Skoglund, 1946)의 연출사진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이지영의 무대는 종종 스코글런드를 상기시킨다. 일상의 사물이나 동물의 오브제를 강박적으로 반복한다거나, 양립할 수 없는 현실을 병치하여 초현실적인 장면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무대 설치와 오브제를 노동집약적이고 수공예적인 방식으로 제작하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스코글런드가 보색대비를 사용해 화면을 단순하면서 강렬한 메시지로 표현한다면, 이지영은 표상하는 장면과 암시하는 내용에 따라 섬세하고 풍부한 색감을 입체적으로 채색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사진적 배경이 되는 룸의 형태도 다르다. 스코글런드의 무대는 도시 및 자연 풍경으로 확장되지만, 이지영은 룸이라는 제한된 실내 공간을 엄수한다.
작가는 설치와 해체를 반복하며 “스스로 경험했던 어떤 순간의 상황이나 감정을 회상” 또는 환기시킨다. 작가에게 이 무대는 예술 작업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시각화하는 유희의 공간이자, 엄마의 자궁처럼 자신을 보호해줄 ‘퇴행의 공간’이며 외상에 대한 승화의 공간이 된다.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사진을 관통하는 주제에 있다. 스코글런드가 현대문명과 자연, 생명과 기계 사이의 경계를 탐구한다면, 이지영은 작가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해 모색한다. 작가는 개인의 문제에 천착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묻고 답하며 사진으로 풀어낸다. 작가에게 사진은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이자, 자전적인 무대가 된다. 그리하여 노인과 아이, 여성과 남성, 인형과 마네킹 등의 모델들이 다양하게 출현하는 스코글런드와 달리, 이지영의 방에는 그녀 자신 혹은 그녀를 대체하는 모델만이 등장한다. 사진에는 ‘찍는 주체’와 ‘피사체로서 대상’이 존재하는데, 이지영은 작가가 곧 지각의 주체이자 탐구의 대상이며 동시에 관찰자가 된다. 그리하여 <마음의 무대>에는 사진의 주, 객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이지영의 연출사진은 스코글런드의 그것과 결별한다.

<검은 새들(Black Birds)>(p.64)은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Joseph Hitchcock)의 1963년 영화 <새>를 차용해 재구성한 작품이다. <검은 새들>은 새떼가 출몰한 방의 구석에 몸을 피해 움츠린 한 여자를 보여준다. 여자는 방에서 탈출할 수 있는 문을 발견했지만, 검은 새 무리에 주저앉았다. 이러한 장면은 새떼가 일제히 인간을 공격하며 가공할만한 공포를 선사했던 영화 <새>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방은 검은 새떼에 지배당하자 금세 두렵고 기이한 공간으로 변모한다. 하얀 벽면과 검정 새 무리, 정적인 공간과 동적인 날갯짓은 서로 대비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작가는 예고 없이 찾아온 위기의 순간 앞에 자아가 느끼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마치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출해 극적으로 표현한다. 누구나 살면서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무력하게 주저앉기도 하지만 극복하고 나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는가? 예측불허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이다. 작가 개인의 이야기는 관람자의 기억, 경험을 환기하며 보편적인 감정으로 나아간다. 이지영에게 사진은 자신이 사회의 개체로서, 여성으로서, 작가로서 겪었던 주관적인 감정과 경험들을 보편적인 언어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사진의 외적인 것들, 설화, 신화, 영화, 관용구 등을 차용해 현실로 가공하는 것이다.

이지영의 <마음의 무대>에서 오브제는 강박적으로 반복된다. 새를 비롯해 사탕, 클립, 부채, 꽃 등 일상의 사물들은 복제되고 증식되며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반복된 오브제는 현실에서는 공존할 수 없는 이질적인 상황이 하나의 공간 안에 발생하게 되면서 언캐니(uncanny)의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언캐니는 ‘섬뜩한’, ‘스산한’, ‘두려운’과 같은 상태의 의미에 기원한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언캐니」(1919)에서 언캐니를 ‘낯익은 낯설음’ 즉, ‘친숙한 것에서 출발하는 두려운 감정’으로 규정한다. 프로이트는 언캐니를 미술의 중요한 개념으로 언급하면서, 미술이 단순히 아름다운 대상만을 다루지 말고 기괴함, 두려움과 같은 감정을 이끌어내는 대상과 그 조건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언캐니를 불러일으키는 조건들을 설명하면서 분신에 주목하는데, 이를 “인간본능에 내재한 무의식적 반복충동”과 연관된 언캐니로 보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지영의 사진에서 중복되어 나타나는 오브제는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언캐니로 작용한다. 서류 정리에 쓰이는 클립이 수없이 증식해 현실을 파고드는 <Nightmare>(2010)(p.69)나, 옵티컬 아트의 착시효과를 도입해 무한 반복되는 패턴으로 요동치는 방을 구성한 <Panic room>(2010)(p.72)이나, 민들레 씨가 흩날리며 유년 시절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민들레 방 <Breeze>(2016)에서처럼 오브제가 반복되는 것은 익숙한 것의 두려운 감정을 연상시키는 언캐니인 것이다.

<La Vie En Rose II>(2016)(p.67)은 또 다른 패닉룸을 연출한 사진이다. 방의 출/입구에 들어선 여자가 곧이어 마주할 현실은 가시가 촘촘히 박힌 장밋빛 공간이다. 여기서 가시는 여자를 위협하는 공포로서 존재하며 반복된 형태로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작가는 <La Vie en Rose> 시리즈를 통해 유년 시절 가시에 찔렸던 기억을 상기하며 외상적 징후를 드러낸다. 언캐니는 무의식에 내재해 있던 ‘억압된 금기들이 낯선 형태로 변환’되어 나타나는 ‘낯익은 낯설음’의 감정이다. 예술에서 언캐니는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통해서 표출된다. ‘낯설게 하기’는 상투적 시각, 관습적 사고를 벗어나 ‘낯익음’과 ‘낯설음’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세상을 다양한 해석의 공간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지영의 작품에서 ‘낯설게 하기’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재현과 이질적 요소들의 공존에서 드러난다. 작가로 대변되는 여성의 신체는 종종 불완전한 상태로 묘사되는데, <La Vie En Rose II>는 한쪽 다리를 <I’ll Be Back>(2010)(p.66)에서는 한쪽 팔만 노출하고 있으며, <The Best Cure>(2007)(p.70)와 <Nightmare>에서는 상체가 잘려나간 채 일부로만 드러나고 있어 여성 신체에 대한 ‘낯설게 하기’ 혹은 시선에 대한 낯설음을 보여준다. 또한, 다리와 가시, 금속과 신체, 인체의 내부와 외부, 부채와 파도 등 친숙하지만 이질적인 요소들의 공존은 ‘낯익은 낯설음’을 동반하며 언캐니의 미학적 특징들을 상기시킨다.

이지영의 작업이 현대사진의 한 양상으로만 다뤄질 수 없는 이유는, 이렇듯 현대미학의 다층적인 면들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구축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해당 기사는 2022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