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앞과 뒤의 여성들 ② : 더 발랄하게, 더 가볍게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지만, 요즘같이 인터넷 가상 세계가 현실을 압도하는 시대에는 “나는 (넷에)접속한다. 고로 존재한다”거나 “나는 내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진이 더 이상 종이로만 유통되는 시대가 아니기에, 인터넷 상에 업데이트된 사진 이미지들은 불특정 다수에 의해 유통되면서 확산된다. 그 과정을 통해 이미지는 본래 의도나 맥락과는 달리 제 3의 실체를 갖게 된다.

페미니즘의 확산은 이런 인터넷의 급진적 확산과 자기 복제, 한시적 공동체라는 개념과도 맞닿아있는데, 분절된 개개인이 공통의 카테고리에 빠르게 모였다 흩어지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의 특성을 가진 넷 공간에서, 페미니즘은 하나의 이슈에 대해 각 지역 여성들의 공감과 연대를 이끌어내고 이를 빠르게 집단행동으로 이끌어내기도 한다. 2016년 국내 문화계에서 시작해 각 영역으로 파급된 성폭력 및 성추행 폭로 해쉬태그 운동은 인터넷상에서 들불처럼 번지며 그간 오랜 관습과 권력 구조에서 암암리에 발생하던 성폭력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는 비단 국내에 한정된 현상은 아닌데,  미국 문화계의 거물인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행 파문이 불거지면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익명의 뒤로 숨지 않고 인터넷상에서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운동(#Me Too 해쉬태그 달기 운동)이 전 세계 여성들의 호응을 얻으며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만큼 인터넷이란 공간이 현실 세계에서 은폐되는 문제들을 수면 위로 끌어내고, 지지를 얻는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작가들은 이런 인터넷의 특성을 활용해 자신의 작업을 선보이는데 그치지 않고, 인터넷 유저들과의 피드백을 통해 기존의 사회 통념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있다. 다만 인터넷 시대의 페미니즘 작가들의 작업은 관습에 도전하던 전투적인 이전 세대 페미니즘과 비교해서 좀 더 가볍고 발랄해졌으며, 때론 일종의 유희성을 띄기도 한다.

 


Izumi Miyazaki, Measure, 2014 ⓒ The Artist



Izumi Miyazaki, Tomato, 2015 ⓒ The Artist


독일 Museum der bildenden Kunste Leipzig에서 오는 4월 8일까지 열리고 있는 〈Virtual Normality Women Net Artists 2.0〉 전시에서는 이와 같이 인터넷을 주요 무대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 작가들의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이 전시는 페미니즘 이슈가 소셜 미디어에서 어떻게 형성되며, 여기에 여성 작가들은 어떤 태도로, 영향을 끼치는지를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됐는데, 11명의 작가 (Signe Pierce, Molly Soda, Leah Schrager, Refrakt, Nicole Ruggiero, Stephanie Sarley, Arvida Bystrom, Nakeya Brown, Juno Calypso, Izumi Miyazaki, LaTurbo Avedon)가 참여했다. 전시 제목인 ‘Virtual Normality-가상의 정상성’는 이 작가들이 인터넷 상에서 마주치는 여성에 대한 편견 -이상적 아름다움이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성적 대상화 -을 함축하는 용어이다. 인터넷의 가상현실이 실제의 공간보다 더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인터넷 상에서 정상, 혹은 평균이라고 생각되는 성 역할이나 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현실의 여성들에게 일종의 억압기제로 작용한다. 텀블러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에 익숙한 세대의 여성 예술가들은 그런 소셜미디어로 공유되는 이상적인 여성상이 실제 현실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묻는다.

일본작가인 이즈미 미야자키Izumi Miyazaki (p. 60)는 소셜미디어에 자주 공유되는 여성들의 셀피사진을 비트는 유머러스하고 초현실적인 작업을 선보였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자신의 얼굴에 줄자를 가져다 대고 얼마나 얼굴이 작게 나타나는지 신경 쓰는 사진(Measure)이나, 마음에 안드는 얼굴을 버리고 새로운 얼굴을 찾아 떠나는 모습이 블랙 유머처럼 연출된 사진(Tomato) 등을 보면 인터넷 세대가 모니터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연출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경향을 정색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자하고 패러디하는 유희의 개념으로 접근한다.

인스타그램을 통한 셀피의 공유가 어떻게 페미니즘과 연대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면 스웨덴 작가인 아르비다 비스트럼Arvida Bystrom (p. 64)과 미국 작가Molly Soda (p. 65)의 작업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르비다 비스트럼은 자신의 여성 신체를 과감 없는 셀피로 공개하는데, 성기의 털이 그대로 드러나는 셀피나, 종아리 털을 제모하지 않은 채 유명 브랜드의 화보를 촬영한 셀피로 논란이 됐다. 몰리 소다 역시 자신의 누드를 공개하며 “여성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 모습으로 보여질 권리가 있다. 자신이 사진에 찍힌 그대로, 검열되지 않고 미디어에 노출할 권리 역시 여성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태도는 항상 여성의 성은 수동적이라 감추고, 은밀하게 보여진다는 성적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Nakeya Brown, Art of Sealing Ends Part II, aus der Serie Hair Stories Untold, 2014 ⓒ The Artist



Nakeya Brown, The Art of Sealing Ends, aus der Serie From Hair Stories Untold, 2014 ⓒ The Artist


Nakeya Brown, The Art of Sealing Ends, aus der Serie From Hair Stories Untold, 2014 ⓒ The Artist
 

이 두 작가의 사진들은 수위가 높아 인스타그램에서도 검열의 대상이 되는데, 이렇게 드러내놓고 자신의 육체를 보여주는 그들의 방식은 확실히 이전 세대 페미니스트들의 작업과는 맥락이 다르다. 전 세대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이 여성이 항상 보여지고 관찰되는 대상이고, 응시하는 시선의 권력이 남성에 있는 구조에 저항하기 위해 도발적이고 저항적으로 자신의 육체를 카메라 앞에 전시했다면, 아르비다나 몰리 소다는 자신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을 솔직하게 긍정하며 카메라 앞에 선다. 그들은 관음증적인 시선에 스스로를 수동적인 대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인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드러낸다. 여성의 몸이 소셜미디어에서 이상적인 미의 기준에 맞춰 부자연스럽게 수정되고, 소외되는 현상을 거부하며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낼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때문에 스마트폰과 태블릿폰이 이들의 주요 도구이고, 셀피는 단순히 나르시시즘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탐구하고 공유하는 도구이다.

시그니 피어스 Signe Pierce (p. 59), 레아 스크래저Leah Schrager 역시 자신의 셀피를 스스로 연출하고 후보정 작업을 통해 특정 부위를 부각시키며 일종의 이미지를 통한 놀이와 게임을 제안한다. 때론 이 이미지들은 매우 성적이고, 저속해보이기까지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몸을 찍은 이미지를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며 때로 이것이 성적인 유희이자 게임이더라도 그것을 제지받을 이유는 없다’고 주장한다. 노출과 과시, 피동과 수동, 대상과 응시 등 다양한 지점의 경계에서 이들의 작업은 해석되곤 한다.
스테파니 살레이Stephanie Sarley의 푸드 포르노(Foodporn) 시리즈는 소셜미디어에서 유행하는 동명의 해쉬태그 #Foodporn에서 영감받아 제작됐다.  #Foodporn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맛있게 보이는 음식 사진에 달리는 해쉬태그였는데, 그녀는 아예 배추나 자몽, 크림 케이크 같은 음식으로 성적인 이미지를 연출한 사진을 촬영하고 같은 이름을 달았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라 여겨진 요리를, 성적으로 발칙하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놓은 이 작업은 그 기발한 아이디어로 주목받았다.

나케야 브라운 Nakeya Brown은 〈The Refutation of Good Hair(좋은 헤어를 둘러싼 논란)〉 (p. 61) 시리즈에서 지극히 개인적으로 보이는 헤어스타일조차 성적, 인종적 정치에 영향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본래 곱슬곱슬한 머리를 가진 아프리칸계 여성들은 백인 여성들의 곧은 머리카락만을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제시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스트레스 받는다. 작가는 자신의 머리를 잡아 뜯거나, 불로 태우고, 또는 냄비에 삶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사회가 제시하는 아름다움의 일방적 기준에 맞추는 것이 폭력이 아닌지 역설적으로 묻고 있다.

 


Molly Soda, WRU, 2016, C-Type print on aluminium © The Artist


Arvida Byström, Untitled, 2014 © The Artist


이처럼 인터넷 세대의 페미니즘 여성 예술가들은 좀더 키치적이고 가벼워졌으며 유머러스하게 주제에 다가간다. 인터넷이란 망을 둘러싸고 가상과 현실의 경계는 종종 흐려지며, 고정된 여성상의 형태도 해체된다. 특히 이들의 작업은 분홍색이나 보라색 등 이전 세대에게 소녀취향이라고 배척받던 파스텔톤의 색채를 주로 활용하는데, 이는 그만큼 이들이 전세대보다 고정적 성역할에서 자유롭기에 오히려 스스로의 소녀성, 여성성을 부정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 세대 페미니즘이 남성의 권위구조에 맞서기 위해 전투적인 태도로 스스로의 여성성을 부정하고 억눌러왔다면, 인터넷을 통해 가볍고 빠른 공유와 연대에 익숙한 이후 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스스로의 여성성과 소녀 취향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이라는 전통적인 카메라를 둘러싼 권력 구조에 균열을 일으키며, 그녀들은 카메라의 앞과 뒤에서 찍거나 혹은 찍히고 이를 공유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이끌고 있다. 이들을 두고 제 4세대 페미니스트나 넷 페미니스트라는 평가도 있고, 너무 급진적이거나 때론 가벼워서 페미니즘과는 다른 맥락에서 해석돼야 한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또한 극단적으로 치닫기 쉬운 인터넷 환경에서 스스로 페미니스트 예술가임을 밝히는 작가들은 때론 여성 혐오론자나 극단적 반페미니스트들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의 모토를  “누구도 더 이상 자신의 성별 때문에 타인의 증오를 받지 않게 될 때까지,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작업을 끌어갈 것”이라 선언한다. 발랄하고, 가벼운, 그렇기에 더 강력한 이 인터넷 세대의 여성 예술가들은 과연 페미니즘예술의 영역을 어떤 지점까지 확장시킬 수 있을까?

 

글 석현혜 기자 이미지 제공 Museum der bildenden Kunste Leipzig
해당 기사는 2018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