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조 | 화순에서 누리는 남도 문화


자신의 사진작업에 가장 접근성이 좋은 화순에 정착하여 부지런히 남도문화를 촬영하고 있는 오상조 작가의 집. 작가의 뒤로 차를 마시는 공간이 보인다.


최적화 된
삶의 터전에서 일상적으로 작품의 소재를 접할 수 있다면 사진가에겐 큰 행운이다. 작업초기부터 남도의 전통문화를 촬영해온 오상조 작가는 2001년에 전남 화순에 터를 잡음으로써 평생 작업의 소재인 남도사람들과 운주사, 당산나무, 고인돌, 남도문화풍경 등에 아침산책을 나가듯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최상의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광주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2007년에 아예 광주의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전남 화순군 도곡면으로 이사했다. 위치상으로 화순은 전라남도의 중앙이어서 남도의 웬만한 곳은 자동차로 한 두 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데, 그가 오랫동안 작업해온 화순의 고인돌 단지는 그의 집에서 겨우 3km, 운주사는 10km 떨어져 있다.

오상조 작가는 사진가로서 50년 세월을 남도의 문화를 사진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사진으로 그리는 남도의 산수화, 풍속화라고 할까. 그의 고요한 흑백사진은 전통적인 수묵화 속 먹의 느낌을 주는데, 그러고 보면 오상조 작가와 먹의 인연도 깊다. 전북 장수 산골 마을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에 형들을 따라 동네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과 붓글씨를 익혔고, 이는 그가 고등학교 시절에 서예가를 꿈꾸는 단초가 되었다. 결국 그 꿈 대신에 사진가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붓글씨를 즐겨 쓴다. 어쩌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먹의 오묘함이 그가 지고지순하게 흑백사진을 고집하는 감성을 끌어낸 것은 아닐까.

게다가 사진학과 학생이던 20대 청년 시절에 방학이면 고향 장수에 내려와 간간이 찍은 동네사람들과 일가친척의 결혼식, 장례식, 환갑잔치 같은 사진을 보면 굳이 흑백필름으로 찍지 않았더라도 흑백사진이 되었을 장면이 펼쳐진다. 하얀 저고리에 검정치마, 하얀 바지저고리에 검정 고무신... 도시가 화려한 컬러의 색감으로 칠해질 때도 여전히 흑백의 단순함으로 남아 있던 고향의 원풍경은 그가 남도의 전통적인 문화를 사진으로 담을 때 자연스럽게 흑백을 선택하게 했을 것이다. 물론 청학동이나 운주사를 찍으면서 때로는 컬러필름을 쓰기도 했지만, 이 예외적인 경험이 오히려 그가 흑백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마찬가지로 흑백사진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흑백에서 컬러로, 다시 디지털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흑백작업을 하기엔 까다로운 제약이 도사리고 있다. 재료를 구하는 문제부터 암실을 갖거나 암실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런데 오상조 작가는 운 좋게도 암실작업에 최적화 된 공간을 갖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이러한 상황들이 모두 ‘화순’이라는 키워드로 일치된다.

 


대형 롤지 작업도 가능한 암실 공간



그가 직접 작업한 롤지 프린트를 보여준다.


운주사와 천불천탑사진문화관
오상조 작가의 대표 작품은 청학동과 남도사람들, 당산나무, 운주사와 돌 문화, 즉 사람과 나무와 돌이다. 물론 처음부터 작가가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작업했다기보다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인 결과인데, 그렇게 작가의 마음이 가닿은 공간 중 한 곳이 운주사였다.

오상조 작가는 1980년대부터 운주사를 드나들며 눈이 오거나 꽃이 피거나 각양각색의 표정을 짓고 있는 석불을 마치 남도사람들을 촬영하듯이 애정을 갖고 찍었다. 운주사란 제목으로 두 권의 사진집이 출간되었고 개인전을 열기도 했는데, 운주사의 석불과 석탑 사진은 장승, 고인돌, 성곽과 돌담, 매향비, 징검다리에 이르기까지 돌로 형성된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운주사와 인연이 작업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화순군에서 운주사 앞에 천불천탑불교박물관을 지었는데 개관을 못한 채 썰렁하게 빈 공간으로 남아 있던 차에 오상조 작가의 제안으로 천불천탑사진문화관으로 용도 변경, 2017년 4월에 문을 열었다.

“당시에 이 건물의 사용처를 놓고 고민하던 화순 군수님이 마침 마을을 지나다가 우리 집에 들르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어요. 제가 화순에 살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죠.”

마치 준비된 것처럼 일이 진행되어 국내에서 최초로 군립 사진문화관이 개관되고 당시 광주대에 재직 중이던 오상조 교수가 명예관장을 맡았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사진가를 초대하여 초대전을 열고 한편으로는 화순의 지역 작가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만들어 화순의 정자, 화순의 사계 등, 지역의 문화와 자연경관을 알리는 촬영을 지도하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원고로 화순의 사진 아카이브를 쌓아가고 있다. 또한 그가 애정을 갖고 모았던 책을 기증하여 문화관 내에 ‘오상조 도서실’이 들어서는 마중물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사진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자료를 찾아보기 위해 그곳 도서실을 찾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작가 개인에게는 대형 롤지 작업도 가능케 하는 문화관의 암실이 보물이다. 1년 내내 섭씨 20도로 온도가 일정하고 오폐수처리가 완벽한 암실인데다 롤지, 전지, 소전지 등 그가 원하는 사이즈대로 프린트를 할 수 있다. 특히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어차피 야외촬영이 어려우니 암실에 틀어박혀 현상과 인화에 몰두한다고 말한다.

“여기 암실처럼 넓고 쾌적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흑백작업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인데 이렇게 마음껏 작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선물입니다.”  

운주사가 인연이 되어 화순에 정착했고 화순에 살다 보니 천불천탑사진문화관으로 이어져 지금 사진가로서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당산나무, 완도 청산 여서도 ⓒ오상조


운주사 ⓒ오상조


운주사에서 대형카메라로 촬영 중인 오상조 작가


산수가 어울리는 랜드스케이프
오상조 작가의 첫 작업실은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 1981년에 전주에서 문을 연 ‘오상조 사진연구소’였다. 84년에 광주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그는 전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전라북도 지역의 국보와 보물을 촬영한 《향토유물 유적 사진전》을 연거푸 2회 개최했는데 이 전시는 오상조 작업의 미래를 예고한 것이었다.

“촬영을 다니다 보면 몇 년 전에 있던 것들이 어느새 사라져버린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귀한 것을 귀한 줄 모르고 없애버리는 게 참 안타까웠어요. 오랜 세월이 묻어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건 한순간이거든요. 내가 그걸 막을 힘은 없고, 사진가니까 사진으로라도 남기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지금은 좀처럼 만나기 힘든 징검다리나 돌다리, 장승과 당산나무, 돌담과 성황당 등이 그의 사진 속에서 살아 있다. 특히 논 가운데나 밭에 있던 고인돌은 농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파내서 대부분 없어지고 성황당과 장승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곳이 많다.

“요즘은 전남 일대의 섬에 자주 가요. 작은 섬에는 아직도 옛 자취가 많이 남아 있거든요. 서울에서 접근하면 하루가 걸릴 곳이지만 화순에 사니까 접근성이 좋지요.”

그는 최근에는 대형카메라로 멀리서 풍경을 찍는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찍고자 하는 대상만 강조했는데 이젠 주변의 산과 들, 마을까지 다 아우른 한국적 랜드스케이프를 시도하고 있다. 산수가 어울리는 풍수적인 한국 풍경, 거기에 당산나무라든지 장승이 있는 설화적 풍경을 찍는다는 것.

“전라남도를 살살 다니면서 우리의 역사성이 있는 풍경을 찍고 있어요. 모내기를 한 논 가운데에 고인돌이 있고 커다란 당산나무가 뒤로 보이는 마을에서 밭을 매는 마을 풍경도 있어요.”

아름답고 장엄한 풍경이 아니라 삶과 역사가 녹아 있는 풍경을 찍고 있는 오상조 작가는 요즘 집을 가꾸면서 사진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마당에 나무를 심어도 똑같이 심었는데 죽는 놈이 있고 잘 크는 놈이 있다. 텃밭을 가꿔도 대충 하면 꼭 표가 난다. 정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사진도 마찬가지여서, 날마다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디지털 시대에 필름사진을 고집하는 이유도 한국의 원형적인 문화에 흑백 톤이 어울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성을 들이는 문제와도 상통한다고 했다. 정성을 들여서 촬영하고 정성을 들여서 현상 인화하고 수세하여 말리는 것까지 모든 과정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하고 싶다는 것. 마치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가꾸듯이 말이다.






오상조 작가가 명예관장으로 있는 천불천탑사진문화관에는 그가 기증한 책을 비롯한 사진관련 책이 수천 권 소장돼 있다.





오상조 작가가 직접 쓴 당산나무 서각. 그는 어렸을 때 서당을 다니며 붓글씨를 익혔다.



사진가의 저편
오상조 작가의 책 욕심은 대단하다. 그가 기증한 책을 바탕으로 사진문화관 내에 오상조도서실을 만들었지만 아직 그의 집 책꽂이는 책들이 빼곡하다. 해외 작가 사진집을 비롯해서 좀처럼 접하기 힘든 해외출판 책들은 그가 미국에서 교환교수로 있을 때와 틈틈이 해외로 나갈 때마다 사 모은 책들이다. 그 책들 가운데 『On the Other Side of the Camera』라는 책이 있는데, 사진가들의 작품집이 아니라 사진가들의 공간을 보여주는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미국의 사진가들이 넓은 공간에서 노후를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진가들도 이랬으면 좋겠다는 로망을 갖게 되었어요. 사진가에게 시공간은 참으로 중요한 조건이니까요.”   

그가 천 평쯤 되는 넓은 땅에 집과 갤러리를 짓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계기였다.  나중에 퇴직금을 타면 갤러리를 짓겠다는 목표로 일단 넓은 땅을 구하고 그 땅에 차례로 살림집과 차 마시는 방, 발을 담구고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연못과 텃밭, 넓은 잔디마당을 조성했다.

“갤러리를 지으려던 생각은 천불천탑사진문화관으로 대신하게 되었고 그냥 책 보고 음악 듣고 눈이 피곤하면 마당에 나와 잔디밭 잡초를 뽑고 농사를 짓는 그런 일상이 되었어요. 그러다 손님이 찾아오면 반갑고요.”

그는 50년간 사진을 하고나니 “필름, 프린트, 책이 남았어요. 후회가 없습니다. 앞으로 나 다운 사진을 하되 재미있게 살면서 재미있게 찍으려고 해요.”라고 말한다. 그 외에도 그는 사진으로 봉사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동안 사진으로 잘 살아왔으니 보답하겠다는 의미인데, 지금 사진문화관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화순과 광주에서 사진을 배웠거나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모아 사진을 가르치고 또한 계획을 짜서 사진을 찍은 결과물로 도록을 만들고 전시를 하도록 지도한다. 지난 3년간 해마다 화순의 고인돌, 화순팔경, 누정을 기록했고, 지금은 영산강을 찍고 있다고 했다.

화순으로 이사한 지 15년이 되면서 어느새 오상조 작가는 화순의 사진을 지키는 당산나무가 된 것 같다. 마침 화순군의 군목도 느티나무(당산나무)라니 그의 작업은 이미 오래 전부터 화순과 인연이 닿아 있었던 모양이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22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