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기록하는 순간 역사가 된다, 김녕만

머나먼 우주를 향해 날아갈 수는 있지만 단 한 발자국도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 다만 사진이 있어 과거를 소환하고 기억을 환기시킬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진의 힘을 정확하게 꿰뚫고 가장 잘 활용하는 사진가 김녕만.
그가 휴전협정 65주년에 맞추어 사진집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를 출간했다. 1983년부터 2018년 봄까지 35년의 분단기록이다.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 눈 앞에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는 실향민. (2017)


오늘은 결국 과거가 된다

지난 25년 동안 숱한 사진가들을 인터뷰 했지만 사진가 김녕만은 필자가 가장 글쓰기 거북스러운 상대이다. 너무나 가까운 사이여서 요즘 유행어로 ‘패싱’을 해왔다. 아마도 지난 7월에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라는 사진집을 출간하지 않았더라면 의도적인 ‘패싱’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우선 그가 필자의 남편이라는 고백부터 하고 이 기사를 시작한다.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 남북 경비병. 판문점 (1984)


2018년 봄은 영화 같은 한 장면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판문점에서 남북정상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은 눈을 의심케 한 역사적인 씬(scene)이었다. 그 장면의 전과 후가 어떻게 해석되고 전개될지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지언정 그 순간만큼은 눈물이 핑 도는 감동이었다. 1983년부터 판문점을 출입하기 시작하여 35년 동안 남북분단이라는 주제로 작업해온 사진가 김녕만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 같다. 그 순간에 사진가로서 그는 직감했다고 말한다. 이제는 자신의 분단 작업을 세상에 내놓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그동안 남북관계를 떠올리면 다시 뒷걸음질 칠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한 번 벌어진 사건은 잠시 후퇴한다 하더라도 그 순간까지 지워지는 건 아니죠. 결국은 그 지점에서부터 나아갈 수밖에 없어요. 이번 봄처럼 언제 갑자기 새로운 변화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남북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갈 것이란 예상 아래 지금까지의 내 작업을 정리할 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사진집을 출간하게 된 배경이다. 이 사진집의 출발은 당시 동아일보에 근무했던 김녕만 기자가 판문점 출입을 하게 되면서였다. 처음에는 기자로서 신문에 쓸 뉴스만 촬영했으나 곧 판문점이야말로 기록으로 남겨야 할 가치 있는 이슈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때부터 기자의 업무에서 더 나아가 사진가의 시각으로 판문점을 바라보고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판문점은 아무나 들락거릴 수 없는 특수지역이므로 사실 제가 특혜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조금 더 진지하고 충실하게 기록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 판문점 (1991)
 

그런 생각을 하자 판문점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 철조망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이 책의 표지로 쓰인 북한경비병과 제비 한 마리의 뒷모습사진에서도 봄의 전령으로 상징되는 제비를 통하여 남북의 봄을 고대하는 그의 소망을 읽을 수 있다.


“책을 내고 보니 아쉬운 점이 많아요. 조금만 더 관계기관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면 더 내밀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죠. 그러나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려고 노력했어요. 부족하지만 이 사진들이 먼 훗날에는 지난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앞으로 종전선언이 된다면 휴전상황 아래 판문점과 비무장지대의 환경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미래에는 이 사진들로 과거를 들추어 보고 회상하게 될지 모른다. 그는 머지않은 미래를 예측하며 분단사진집을 준비했다고 말한다.    


기록 역사 사진 

그에게 사진은 운명이었다. 전북 고창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그는 자신이 평생 사진가로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방황할 때 마침 고창군에서 고창읍성인 모양성 축성연대 찾기를 공모했다. 허실삼아 도전한 이 과제는 그에게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어디 한 구석에라도 축성연대 기록이 남아있었다면 전혀 필요 없었을 수고를 하는 과정에서 증거자료용 사진을 찍게 되었고, 그러면서 어렴풋하게나마 기록, 역사, 사진의 상관관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축성연대를 찾는 데에 성공하여 그 상금으로 본격적인 사진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고향시리즈> 전라북도 고창(1976)

 
그때 그의 나이 스물한 살,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란 말이 있듯이 그의 삶에 뚜렷한 방향이 정해지자 사진으로 나아가는 길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 전국에 불기 시작한 새마을 운동의 바람이 그의 고향에도 밀어 닥쳤고, 그는 새마을운동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농촌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그의 첫 작업이 된 “고향시리즈”다. 20대에 벌써 따뜻하고 토속적인 농촌사진에 몰두한 그는 서른 살에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입사하기까지 한국의 70년대 농촌을 정감 있는 사진으로 남겼다.

 

<광주, 그날>계엄군의 도청 진입 이후 광주에서는 젊은이들에 대한 검거가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 고등학생도 예외가 아니다. 광주(1980)

 
1978년에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새내기 사진기자로서 맞닥뜨린 서울의 봄,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 80년대 한국사회를 관통한 민주화운동은 그가 다시 한 번 기록과 역사의 가치를 실감케 만들어준 주요사건들이었다. 당시의 기록은 그의 사진집 <광주, 그날>, <격동 20년>으로 남아 우리의 현대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광주, 그날>이 어린이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누가 닦아 줄 것인가? 광주(1980)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기록의 가치는 소중합니다. 다행이 사진기자로서 그 현장에 있었고, 광주민주화운동의 경우 그 당시에는 보도할 수 없었지만 훗날 언젠가는 공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예상대로 90년대 들어와 우리나라가 민주화 되면서 <광주, 그날>이라는 사진집이 나올 수 있게 되었어요.”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 영화 〈공동 경비 구역 JSA) 주요장면의 모티프가 된 사진. 판문점은 긴장의 상징이다.
견고하게 선 병사의 뒷모습에서 엄위함과 냉정함이 느껴진다(1992)


기록이 없으면 역사가 잊혀지거나 왜곡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현장에 서면 열성을 다했다고 한다. 사진기자야말로 붓 대신 카메라로 이 땅의 오늘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과 함께 판문점은 1980년대와 90년대에 집중적으로 촬영되었다. 10년 동안 판문점을 출입했고 수시로 비무장지대(DMZ)를 취재하면서 미래를 위해 반드시 남겨야 할 기록임을 확신했다.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과 그 이듬해 평양고위급회담 취재차 평양 방문 등을 통해 그의 분단기록은 더 다양해지고 탄탄해졌다.


“2001년 봄 동아일보에서 퇴직하면서 사진기자에서 다시 사진가로 돌아왔어요. 분단작업을 계속하고 싶은데 신분이 바뀌니 접근이 허용되지 않아 고민하다가 밖에서 들여다보는 비무장지대와 접근이 가능한 지역을 찾아 분단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기자시절처럼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었던 점이 오히려 분단기록의 외연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그의 사진집은 모두 3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는 판문점, 2부는 비무장지대, 3부는 철책 앞에서 삶을 이어가는 접경지역을 다루고 있다. 


인간에 대한 애정 

20대 초반에 사진을 시작하여 46년을 사진과 함께 살아온 김녕만은 그 세월의 절반은 사진기자로, 나머지 절반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 어떤 측면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망설여지는 대목인데 사실 그가 사진기자였든 사진가였든 그의 일관된 관심은 ‘인간’이었다.


그의 사진은 항상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했다. 사실 사람을 빼고는 그의 사진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 특히 그의 사람 사진이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대상에 대한 정성스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진가가 대상을 바라본 그 눈빛을 우리가 읽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진을 바라보지만 실은 그 대상을 바라본 사진가의 시선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나와 사진가, 그리고 사진 속 대상이 삼위일체가 되는 순간 진정한 감정이입이 되는데 김녕만의 사진은 그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추구하는 휴머니즘은 그의 사진적 특성이기도 한 해학적인 시선과 맞물려 김녕만 특유의 사진세계를 형성한다. 그가 따로 해학적인 사진을 의도하고 촬영한 게 아니라 기존의 작업 가운데 해학적인 면이 두드러진 사진들만 모아서 <유머가 있는 풍경>이란 사진집(1991년)을 따로 냈을 정도로 해학은 김녕만의 사진을 설명하는 또 다른 키워드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머러스한 사진을 찍는 엘리엇 어윗(Elliott Erwitt)이나 로베르 드와노(Robert Doisneau)의 서양식 유머와 달리 우리의 토속적인 해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해학사진은 차별화 된다.


사진가 김녕만에게 해학은 단순히 재미있고 웃기는 사진이 아니라 고단한 삶에 여백을 만들어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의 해학은 여유로운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최루탄가스로 뿌연 데모현장에서까지 발휘된다. 최루탄가스를 맡지 않으려고 콧구멍에 솜을 틀어막고 있는 전투경찰, 얼굴에 비닐봉투를 뒤집어쓰고 지나가는 시민의 사진이나 긴장감이 감도는 판문점에서 자신의 작은 카메라는 애써 뒤로 두고 남한기자의 큰 카메라를 신기한 듯 들여다보는 북한군인 등,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나 보편적인 인간의 심성을 넉넉하게 바라보는 사진가의 시선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김녕만의 사진이 이렇게 보도사진에서조차 휴머니즘과 해학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그것이 그의 타고난 기질이고 개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격렬한 시위현장이거나 근엄한 대통령 앞에서거나 로봇처럼 딱딱한 북한군을 앞에 두고서나, 인간적이고 해학적인 그의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줌으로써 보도사진의 영역에서조차 작가정신을 잃지 않았다. 단순한 기록에 그치지 않고 그 이면을 슬쩍 비틀어 포착하는 김녕만의 방식은 더 큰 여백과 감동을 주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기록을 넘어 예술로


 

김녕만 작가


휴머니즘과 해학이 스며들어 따듯한 정서를 품고 있는 김녕만의 평생작업은 크게 구별하면 농촌사진과 보도사진, 분단사진으로 나눌 수 있다. 자신이 발을 딛고 선 자리에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소명에 답해온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기록과 아카이브 위주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작가의식에 방점을 찍는 미술관 양쪽에 작품이 소장된 것에서도 김녕만의 작업이 기록적인 면과 예술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이 예술이길 원하든 말든 극사실이 추상과 통하듯 때로는 가장 정직하고 사실적인 접근이 오히려 큰 울림과 감동을 유발하며 예술성을 획득한다. 수많은 언어 가운데에서 길어 올린 시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숱한 현상 가운데에서 시공간을 포착하는 한 장의 스트레이트 사진은 때로는 어떤 곡진한 언어보다 더 심장을 꿰뚫을 수 있어서이다. 김녕만의 사진은 때로는 은근히 변죽을 울리고 때로는 단도직입적으로 핵심을 찌르는 순발력으로 단순한 사실의 기록을 넘어서서 긴 여운을 남긴다. 


 
“다큐멘터리사진은 당장 보기에 화려하진 않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숙성되는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사진이 찍힌 순간과 정황을 되돌릴 수 없다는 감성이 작용하는 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실의 힘, 더 나아가 진정성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게 바로 다큐멘터리사진의 결정적인 매력입니다.”


바로 그 매력에 빠져 50년 가까운 세월 고난의 행군을 해온 그는 앞으로도 그 행군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젠 새롭게 달라지는 남북분단 상황에 대한 사진작업을 준비하면서 20대 초반에 했던 고향시리즈를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순수한 시골청년의 시각도 변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1970년대의 농촌과 비교하면 상전벽해가 된 오늘의 농촌이 어떻게 표현될지 흥미롭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 김녕만 작가


해당 기사는 2019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