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호, 자연에서 배운 것들

강원도 평창으로 작업실을 옮긴 지 올해로 10년째. 작가에게 작업 공간은 작품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는데 최광호 작가(1956년~ )도 폐교가 된 평창의 다수초등학교로 이사한 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고 말한다. 자연에 푹 파묻혀 살면서 자연을 통하여 배우고 그 깨달음을 사진으로 표현하고 있는 작가에게 자연은 날마다 새로운 오브제이고 날마다 새로운 각성을 주는 큰 스승이다. 지금 그의 깨달음은 숨을 쉬며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를 가슴 벅차게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 있다.
 


 
최광호, 포토그램 ‘육체’, 1980 ⓒ최광호



최광호, 심상일기, 1977 ⓒ최광호


‘좋은 작품’에서 ‘사는 즐거움’으로 목표 수정
아침 일찍 일어나면 두어 시간을 카메라를 메고 주변을 산책한다. 날마다 운동장을 둘러보고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일정의 반복인데도 눈에 보이는 것들이 늘 새롭다. 이사하고 처음에는 그저 거기에 있나보다 생각하며 무심히 보아 넘겼던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도 5년 전부터는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어제와 달라졌음을, 그 미세한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마냥 경이롭고 신비하지 않을 수 없고, 사진가의 카메라가 자연스럽게 그것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가로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당연한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사진을 하면서 내가 기쁨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어요. 사진을 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행복한 삶을 위해서가 아니겠어요?”

사진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즐겁고 행복한 삶을 위한 사진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삶에 자연스럽게 사진이 스며들어서 사진이 삶이고 삶이 사진인 동심일체를 이루겠다는 뜻이다. 자연과 교감하면서 자연 속에 사는 즐거움, 도시에선 느끼지 못했던 평창에서의 즐거움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그 즐거움으로 사진을 시작하고 그 즐거움이 사진을 계속하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그러나 올해가 평창에서 머무는 마지막 해가 될 지도 모르겠어요. 평창군에서 이곳에 다른 것을 계획 하고 있다는 거예요. 잠깐 좌절했지만 끝까지 가보기로, 미리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꾸고 지금은 현재 여기에서 머무는 순간순간을 최대한 만끽하고 있어요. 이제는 도시에서 살지 못할 것 같은데, 뭔가 버틸 방법이 생기겠지요.”

유학에서 돌아와서 처음에는 서울 청량리에 작업실을 냈고, 이어서 삼선교, 상계동에, 그리고 경기도 부천에 이어 평창에 정착한 최광호 작가는 다음 행선지를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하나가 가면 하나가 온다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걱정 대신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후회를 남기지 않는 생활을 다짐한다. 그가 최근 자연에 더 몰두하며 더 부지런해진 이유이다.


‘나’를 찾는 긴 여행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사진을 시작했으니 어느새 50년이 다 되어간다. 동네 현상소에 들락거리며 사진을 알게 되자 그의 천성대로 앞뒤 잴 것 없이 사진에 풍덩 빠져버렸고, 결국 사진과에 진학하여 1977년, 스물둘의 나이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 제목이 ‘심상일기’였는데, 그 이후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하며 많은 공부를 하고 작업을 했음에도 결국 돌아보면 작가는 계속 “심상일기”를 써온 셈이었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연 같고 충동적인 다양한 작업조차 10대와 20대 초반의 작업인 “심상일기”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는 오랜 세월동안 그 자신에게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 진정성 있는 작업을 해왔음을 말해주는 예가 될 것이다.

“첫 전시작 이후 변하지 않은 작업 중 하나가 셀프 누드였어요. 그때는 왜 내가 벗고 찍는지를 잘 몰랐고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나를 탐구하고 싶은 본능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말끝에 1977년에 전시한 “심상일기” 전시작 한 점을 보여주었다. 유일하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액자라고 했다. 그것은 공동묘지에서 옷을 벗고 앉아 있는 작가의 모습이 비친 커다란 거울을 찍은 사진이다. 재미있는 것은 얼굴은 잘리고 팔만 보이는 거울을 잡고 있는 사람이 바로 고등학교 친구로 같이 사진에 뛰어든 정주하 작가라고 했다.

그 이후에도 셀프 누드 작업은 계속되었는데, 뚜렷한 벗음의 철학을 갖고 본격적으로 작업한 계기는 1996년에 발생한 강원도 고성 산불 사건이었다. 나무들이 시커멓게 불타버린 산불 현장에서 그는 자연에 너무 죄스러워서 옷을 벗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벗어버린, 가장 자연에 근접한 모습으로 나무에 다가가고 싶었다. 함께 촬영을 하러 온 작가들이 그런 그를 사진 찍으려 하자 그는 “벗은 나를 찍으려면 너희들도 벗고 찍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모두들 자연으로 돌아가 알몸으로 자연과 마주하는 사진이 나오게 되었다.

그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죽음의 현장에서도, 해안선을 따라 일주를 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그 앞에서도 옷을 벗었다. 대상과 더욱 가깝게 다가가고 싶은 충동이 대상과 온몸으로 스킨십을 하는 심정으로 표출되는 셈이다. 평창에 온 이후로는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자연과 동화되는 일체감으로 셀프 누드 작업을 한다. 작업의 형태는 스트레이트한 사진으로, 또는 포토그램으로, 또는 사진에 색을 칠하고 그림을 그려 넣는 페인팅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은 ‘나’를 찾아가는, ‘나’에게 던지는 직접적인 질문이다. 수십 년간 지속되어온 ‘나’에 대한 탐구는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허공’으로 확대되었다고 말한다. ‘나’를 들여다보던 끈질긴 시선이 허공으로, 하늘로, 우주로 향하게 된 것이다. 나의 몸은 백년이지만 저 하늘은 언제 적부터 있어 왔을까. 그렇다면 무한한 허공의 시간에 비해 백년살이 나의 몸이나 한해살이 풀이나 무엇이 다른가. 사진으로 나를 찾아온 기나긴 여행이 지금 이런 깨달음과 조우하고 있다.

 


최광호, 포토그램 ‘나는 평창의 자연이다’, 2016 ⓒ최광호



최광호, 포토그램 ‘가족(딸, 할머니, 엄마)’, 2008 ⓒ최광호


대상과 하나 되는 포토그램
사진은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조한다. 그러나 포토그램은 대상을 만지고 주무른다. 간격 없이 직접 만나는 것이다. 무엇이든 본질을 직접 꿰뚫어보고 느끼고 싶어 하는 최광호 작가의 성향이 포토그램에 빠지게 한 것 같다. 그는 자신의 몸을 인화지에 밀착하는가 하면, 자신의 몸 외에도 관심을 갖는 오브제들을 포토그램으로 만들었다. 사물과 사진을 일체화하려는 그의 포토그램 작업 또한 지금까지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포토그램으로 작업한 것만 만 장이 돼요. 그걸 정리하는 데만 여러 사람이 동원되어 몇 달은 걸렸어요.”

평창에 와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잠이 안 오는 밤에 사진에 끄적끄적 낙서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낙서는 벌레가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모양 같기도 하고, 저 혼자 슬그머니 피었다지는 작은 꽃잎 같기도 하고, 벌레가 파먹은 나뭇잎 모양 같기도 하다. 또한 색깔도 아기자기하여 유치원생의 순수한 그림같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요즘 그가 평창에서 맛보고 있는 새로운 즐거움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자연의 물감을 이용해보고 있어요. 오디가 많이 나올 때는 오디 열매로 색을 내는 식으로 자연에서 추출한 물감을 실험하는 중입니다.”

그의 운동장은 초보 이발사가 깎아 놓은 머리 같다. 풀이 듬성듬성 깎여서 싹 밀어버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버려둔 것도 아닌 모양새다. 작업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만 풀을 깎은 것이라는데, 그 난해한 제초 작업을 이해하기에는 나로서는 상상력 부족이다. 그러나 그 풀밭 속에 서 있는 작가를 보면서 ‘아, 작가가 마치 자연이라는 인화지에 감광된 포토그램 같네.’라는 생각이 스쳤다.


사람 사람 사람
만 장의 포토그램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작업량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상상해보라. 지난 수십 년 동안 거의 날마다 눈만 뜨면 사진을, 마치 숨을 쉬듯이 쉼 없이 사진을 찍어왔으니 그의 작업량이 얼마나 많을지! 특히 그는 죽음에 천착한 사진을 많이 발표했는데, 그것은 가족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바 크다. 젊은 날에 눈앞에서 동생의 죽음을 맞닥뜨린 불행한 사건은 그를 오랫동안 죽음이란 화두에 붙잡아 두었다. 동해로 다 같이 가족여행을 가서 익사한 동생에 대한 회한 때문에 동생을 기억에 붙잡아 두려는 몸부림이 계속 사진 작업으로 나타났는데, 해안선 일주나 물을 소재로 한 작업도 이와 연관된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또한 ‘통일’을 생각하며 작업한 사진들은 북한 원산을 고향으로 둔 실향민인 부모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그는 어렸을 적에 북한에서 누가 넘어왔다는 뉴스만 나오면 텔레비전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난다고 했다. 혹시나 아는 얼굴인가 해서 바라보셨을 부모님의 마음을 알게 된 후로, 그는 통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전쟁의 상흔이라든지 분단의 상처에 관련한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철조망이 쳐진 해안선 작업도 그와 맥을 같이한다.

젊은 나이에 죽음을 관조하는 사진을 많이 보여주었던 작가가 오히려 지금은 죽음보다 삶에, 무성한 자연의 생명력에 천착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특히 최근에는 ‘사람작업’에도 열심이다. 그는 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고 빚을 지게 되는가를 생각하면서 자신도 그동안 참으로 좋은 스승을 만날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를 사진에 입문시켜 준 동네 현상소의 윤광인 형, 대학에 와서 그에게 사진의 길을 열어준 육명심 교수, 일본 유학 시절에 아버지처럼 그를 이끌어준 이노우에 세에류 선생, 뉴욕대학교(NYU)에서 만난 제랄드 프라이어 교수, 그가 근무한 ‘뿌리 깊은 나무’의 한창기 사장은 그에겐 인생의 큰 스승님이다. 사진을 배운 것뿐 아니라 세상을 남다르게 보는 방법을 배웠고 세상 사는 지혜를 깨우쳐준 분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스승을 만나고 또한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며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으니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참으로 소중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사람작업’을 하고 싶고 또한 사진으로 역사를 조명해볼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고 있어요.”

그는 요즘 노무현문화재단에서 공모한 예술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과거에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봉하 마을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예전에 대통령 경선에서 이긴 직후의 모습을 담은 사진,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가결 후 광화문에서 벌어진 시위를 찍은 사진, 심지어는 몽골에서 의료 봉사를 촬영하던 중에 국빈 방문하여 봉사 현장을 찾은 노무현 대통령을 우연히 만나 촬영하게 된 사진, 그리고 장례식 사진까지 그가 찍어 놓은 다양한 사진이 있어 예상치 못했던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참 신기해요. 그 당시에는 그저 우리 시대의 단면이어서 기록해둔 것인데 지금 와서 이렇게 한 프로젝트가 될 줄 몰랐어요. 살아 보니 모든 게 딱 정하고 목적한 대로 흘러가진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우연일 수는 없다. 이미 최광호 작가에게는 어마어마한 작업의 매장량이 있기 때문에 살짝 삽을 대기만 해도 무진장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최광호, 포토그램 ‘선물’, 2006 ⓒ최광호



최광호, 포토그램 ‘생명의 순환’, 2007 ⓒ최광호


인간 냄새 풀풀 나는 작가
영월에서 열리는 〈동강국제사진제〉 개막식에 참석하기에 앞서 평창을 향해 출발했다. 서너 번 방문한 적이 있어 익숙하게 찾아갔는데, 최광호 작가는 점심 식사로 직접 국수를 끓여주려고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작가가 직접 끓여준 김치국수를 시원하게 먹는데, 그가 말했다. 자동차가 운동장에 들어선 순간 ‘내게 참 반가운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새삼 들면서 울컥하여 감정을 추스르느라고 후다닥 뛰어나가지 못했다고.

참 최광호답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먹먹해졌다. 작가는 혼자여도 좋다고 힘주어 말했지만, 물론 그가 자연과 더불어 즐겁게 살고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가 조금 덜 외롭고 덜 힘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안고 평창을 떠났다. 내년 봄에는 이곳 목련나무에서 피어나는 목련을 함께 볼 수 있을까? 평창군청이 한 사진가의 작업의 산실을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보면서 영월로 향했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19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