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에 머물지 말고 끊임없이 아마추어가 되라” 레이몽 드파르동

평생 사건을 쫓아 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누빈 사내가 있다. 그는 베네수엘라 내전과 비아프라,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의 땅에서 전쟁의 생생한 비극을 포착했고, 아프리카 차드의 투부 반군과 2년을 동행하며 그들의 인질로 억류된 생태학자 클로스트르를 인터뷰해 결국 그녀를 구출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포토저널리즘에서 작가주의를 도입한 뉴스 에이전시인 감마 에이전시(Gamma Agency)의 설립자였으며, 매그넘의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동료들은 사진계의 신화인 로버트 카파처럼 죽는 그 순간까지 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기를 원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스러졌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았고 포토저널리즘에서 저변을 넓혀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그의 영화들은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 상영됐으며, 프랑스 세자르 영화제 최우수다큐멘터리상, 시카고 국제영화제 골드 플라크, 벤쿠버국제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프랑스의 전설적 사진가 레이몽 드파르동의 일대기이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의 삶은 그리 극적이지도, 그렇다고 영웅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은 “돌이켜 보면 자유로움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을 풀어놓을 수 있는 텅 빈 상태’를 찾아 끊임없이 방황했다”고 고백한다. 포토저널리스트이자 영화감독의 화려한 이력을 뒤로하고 그가 찾은 곳은 프랑스의 소박한 시골 마을이었다. 마치 연어가 다시 강으로 돌아오듯이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프랑스의 시골 마을을 순회하며 ‘지극히 프랑스적인’ 그 풍경들을 사진에 담았다. 이렇게 촬영된 ‘La France’ 시리즈는 서울시립미술관의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 기획전 〈하이라이트 HIGHLIGHTS〉에서 전시 중이다. 전시에 맞춰 방한한 레이몽 드파르동을 만나 그의 반세기에 걸친 카메라 인생에 대해 들었다.



Raymond Depardon, La France, (Champagnole, Jura, France)2004-2010 ⓒRaymond Depardon/ Magnum Photos, Paris


Raymond Depardon, La France (Bedarieux, Herault, France)2004-2010 ⓒRaymond Depardon/ Magnum Photos, Paris


반평생을 포토저널리스트로 전 세계를 누볐다. 그러나 극적인 저널리즘 사진과 비교할 때, 〈방랑〉 이후 선보인 사진작업은 전혀 다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La France’도 프랑스의 조용한 시골 마을들이다. 당신의 사진과 인생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La France’는 프랑스 사진박물관에서 프랑스를 찍어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시작했다. 그 당시에 나는 새로운 영감과 아이디어가 필요했는데, 일종의 텅 빈 상태, 에컹스Errance(방황 혹은 방랑, 어떤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밀려 어슬렁거리는 상태)가 필요했다.
나는 40여 년간 저널리즘에서 일했고 항상 사건들을 다뤄왔기에 어쩌면 나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기 왜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나를 텅 빈 곳에 놓아버릴 수 있는’ 방랑(Errance)을 위해 처음 찾은 곳은 아프리카의 사막이었다. 사막에 가면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와 공간 속에서 나는 ‘텅 빔’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막은 이미 관광지가 돼서 항상 가이드가 있고 관광객들이 오가고 있었기에, 나는 일종의 통로를 걷는 느낌을 받았다.
두 번째로 뉴욕을 갔다. 뉴욕 역시 마찬가지로 모든 거리는 번호가 매겨져 있고, 체계적으로 분류됐기에 나는 이곳에서도 방랑할 수 없었다.

나는 더이상 전문 사진작가나 영화감독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타이틀을 버리고 아마추어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필요했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런 (아마추어로 돌아가는) 상황은 나를 굉장한 공포에 빠트리는데, 내가 그곳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 포토 저널리스트나 영화감독으로 일을 하지 않는 그런 상태는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은 상황을 통제하고 개입하고 이끌 수 있는 상태였고 또 그것을 원했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는 그런 상황이 주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변화를 맞게 된 계기가 있었는가?
내 인생에는 지진같은 충격이 몇 번 있었다. 가장 큰 충격은 1978년도에 있었다. 당시 내가 정말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에게 거절당했다. 그 충격으로 나는 그녀에게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기에 나는 전쟁터로 떠나서 그곳에서 죽을거야’ 라고 전하고, 매그넘에 들어가 내전 중이던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로 떠났다. 그때 나는 사랑에 미친 바보였다. (웃음)
나는 베이루트에 도착하자마자 이 전쟁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전쟁이라 깨달았다. 60일 정도 그곳에 머물면서 작은 다이어리에 일기를 썼다. 베이루트 다음으로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났다.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접경지역인 빼샤와에 도착했는데, 당시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 통역을 구했다. 그렇게 소개받은 통역이 그 유명한 마수드(아프가니스탄 독립의 아버지, 반군 지도자 아흐무드 샤 마수드)였다. 프랑스 드골장군이 파키스탄에 프랑스어 학교를 세웠고 그는 그 학교 졸업생이었다. 그가 이후 아프가니스탄 반군 지도자이자 독립영웅이 되니 참으로 신기한 인연이었다.

마수드와 함께 아프가니스탄의 산골짜기를 넘는 여행은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전쟁 중이라 많은 마을이 불타 있었고, 마수드와 나는 서로 짐을 번갈아 나눠 들면서 함께 했다. 그 여정동안 나는 결코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를 두고 죽다니, 그럴 순 없지. (웃음)

돌아와서 그 때 노트에 쓴 여행록을 사랑하던 그녀에게 주었고, 이 내용은 책으로도 출간됐다. 당시의 유명한 포토저널리스트들은 이 여행록에 비판적이었는데, 포토저널리스트의 사진 아래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어, 빨리 당신을 보러 파리로 돌아가고 싶어’ 같이 개인적인 글이 씌어 있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전통적인 저널리스트들은 그렇게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저널리즘 사진과 함께 싣는 것을 싫어했지만, 나에게는 그 여행록의 출간이 전통적인 저널리스트의 방식과 삶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영역에 들어서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 밖에도 다른 계기가 있었는가?

두 번째 지진같은 충격은 1981년도 리베라시옹(Liberation)의 특파원Correspondents으로 일할 때였다. 프랑스인들에게 바캉스는 성스러운 계절로 어떤 일도 하면 안 되는 계절인데 나는 뉴욕으로 가려고 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던 여인이 당시 뉴욕에 있었으니까. 앞의 여인과는 다른 여인이다. 항상 나는 여인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웃음)

리베라시옹의 편집장이 매일 내게 사진과 함께 그에 대한 텍스트를 보내달라고 요청해서 나는 매일같이 뉴욕에서 사진을 찍었다. (편집자 주: 이때 찍은 뉴욕의 사진들은 그가 2017년도에 찍은 뉴욕 사진들과 함께 뉴욕 갤러리에서 전시 중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길을 걷거나 자기 자신만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낯설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자유로움에 두려움을 느꼈었다.

한 친구가 내게 지오 매거진에 가보라고, 그 건물의 여자 화장실에 가면 파크 에비뉴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고 추천해서, 나는 사진을 찍기 위해 여자로 변장하고 그 건물에 잠입했다.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작은 노트에 기록을 남기는데 이상하게도 그날 여자 화장실에서 사진을 찍으며 ‘나는 부모님을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건초를 만드는 나의 부모님을 생각한다’ 라는 문장을 노트에 썼다. 나는 프랑스 시골 출신으로 우리 부모님은 다 농부셨다. 7월이면 고향에서는 건초를 만드는 시점이다. 뉴욕의 가장 호화스러운 파크 애비뉴의 사진을 찍기 위해, 화려한 건물에서 여장을 하고 여자 화장실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내가 서 있는 곳과 부모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멀고, 다른지 그 대비(contrast)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 속에는 그 안에서 보여지는 이야기와 보이지 않는 이야기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했는데, 그 때 나는 롤랑 바르트의 그 문장이, 사진과 실제 사이의 미묘한 콘트라스트를 굉장히 잘 표현해준다고 실감했다.

이렇게 1978년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여정과, 뉴욕에서 사진특파원으로 있으면서 느꼈던 개인적인 감정, 이 두 가지가 저널리스트와 완전히 결별하는 혁명적인 변화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저널리스트로서의 결별일 수도 있고, 모든 것에서의 결별일 수도 있다.

나와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알랑 드 종, 드 꺄꽁 등 많은 동료가 전쟁터에서 죽었다. 당시에는, 바로 그 순간, 그 현장에서 죽는 것이 낭만적이고 특별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돌이켜 보면 과연 그랬을까? 어떤 면에서 포토저널리스트로서의 소명도 있지만, 체계적인 아티스트로서의 소명도 있지 않았을까. 여전히 저널리스트의 사진이 필요하긴 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더이상 사진의 역할이 예전처럼 강하지는 않았다.

이 모든 변화는 천천히, 그러나 강렬하게 내 삶을 변화시켰다. 만약 이런 일련의 충격이나 변화가 없었다면, 나 역시 어느 전쟁터에서 동료들처럼 죽음을 맞았거나, 아니면 신문사의 사진 디렉터로 머물지 않았을까.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과 함께 한 프로젝트들은 컨템포러리 아트의 분야이다. 이전까지 해오던  포토저널리즘과도, 다큐멘터리 영화와도 전혀 다른 작업이다.
솔직히 나는 컨템포러리 아트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의 에르베 상데스 관장이 내게 작업을 의뢰했을 때 꽤 놀랐다. 아무리 현대미술이라 해도, 이렇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업하는 것은 까르띠에 재단만의 특별함이다. 에르베 상데스 관장과 이야기하다보면 그가 약간 광적인(crazy) 부분이 있다고 느껴지는데, 그렇기에 그는 가장 창의적일 수 있다. 중남미의 정글 속에서 사라지고 있는 부족들의 방언을 수집해 온다거나 수학을 예술로 풀어낸다거나 이런 창의적인 제안을 하고 비용을 지원할 수 있는 곳은 더이상 포토저널리즘 분야가 아니라 오히려 컨템포러리 아트 분야이다.


사진가이기도 하지만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당신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국제적인 상을 많이 받았고,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최신작 〈프랑스〉가 한국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사진과 영화, 두 분야를 함께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옛날에는 영화와 사진을 동시에 할 때, 사람들은 내게 어느 쪽을 할지 선택하라고 요청했다. 그렇지만 요즘 보면 카메라는 영상과 사진, 양쪽을 다 구현하고 있지 않나? 움직이는 사진Movement Picture와 사진Photography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함께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책에 가장 애정을 품고 있다. 사진가이고 영화감독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책 안의 세계야말로 가장 궁극적인 세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14살 때까지만 공부했고 이후 제대로 학업을 이어온 것은 아니지만, 항상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나는 19세기적인 사람이다. 책을 사랑하고 사진 역시도 필름 카메라 방식을 사랑한다. 나의 리듬은 느리고, 원시적이고 단순하다. 누군가 내게 왜 디지털 카메라를 쓰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내 아내는 “레이몽드는 이제야 칼라 사진을 시작했는데요”라고 답했다.(웃음) 어쩌면 내가 그렇게 느린 19세기 사람이기에, 가장 모던한 까르띠에 재단과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Raymond Depardon, La France (Haute-Normandie, Seine-Maritime, Dieppe), 2004-2010, color photograph, 33 x 26,5 cm, Collection of the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Paris (acq. 2013) ⓒRaymond Depardon/ Magnum Photos, Paris


Raymond Depardon, La France, (Waben, Pas-de-Calais)2004-2010 ⓒRaymond Depardon/ Magnum Photos, Paris


Raymond Depardon, La France, (Nevers, Nievre, France)2004-2010 ⓒRaymond Depardon/ Magnum Photos, Paris


당신의 사진이 다른 이들의 사진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다면?

다른 포토저널리스트들과 비교했을 때 내가 다른 점은 내가 지금도 살아있다는 것이다. (웃음) 전장에서 많은 동료 사진가들을 잃었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그렇기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질 때 찍은 사진을 보면 리베라시옹의 디렉터가 1989년도 내게 전화를 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많은 사진가 중 내게 요청한 것은, 내가 1961년도에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가였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을 쌓는 모습을 기억하던 나는 이제 그 벽을 해체하는 과정을 찍었다.

또 한편으로 나는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프랑스가 식민지를 모두 반환한 시기를 거쳐오며, 그 당시 아프리카, 아시아 등 여러 지역에서 탈식민화되는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 - 전쟁, 내란 등-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본 몇 안 되는 사진가였다.
그렇게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내 사진은 계속해서 변이(transition)하고 있다. 매그넘의 내 친구들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같은 사진을 찍기 원했다. 어쩌면 50년 동안 계속 같은 종류의 사진을 찍었고 일관된 관점이 있었다. 나는 정반대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측면을 택했다. 세상이 변하고 내 사진 역시 그 세상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했다.


이번 ‘La France’ 시리즈는 프랑스의 시골 마을을 심심할 정도로 담백하게 담아냈다. 정적이고 조용한 이 사진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찬사인가?

내가 태어난 동네는 파리 근교의 작은 시골 마을로 인구가 채 5만 명이 되지 않았다. 이 ‘La France’ 작업은 나 홀로 진행했고, 촬영 시간도 오래 걸렸다. 8×10인치의 대형 카메라로 컬러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이 사진들이 스티븐 쇼어 같은 미국 스타일로 나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촬영을 계속하면서 프랑스는 미국과 다르다는 확신이 들었다. 프랑스는 스티븐 쇼어의 사진 같은 수평이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이 뒤엉켜있고 기하학적으로 얽혀있으며 흐트러져 있다. 어쩌면 그런 모습이야말로 가장 프랑스적인 측면이다.

모든 디테일, 색상, 그리고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100% 프랑스인이고 프랑스의 전형이다. 이 사진들은 약 4년 동안 작업했는데 길고 어려운 과정이었다. 당시 100만 달러가 들었는데 프랑스 정부가 20만 유로를 댔고 나머지는 직접 스폰서를 찾아 진행했다.
나는 프랑스를 하나의 시선으로 동일한 사진 시리즈에 담고 싶었다. 오랫동안 프랑스 사람들은 한 사람이 프랑스 전체를 찍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프랑스는 지역마다 역사가 오래됐고, 마을마다 창문 다는 방식도, 벽을 바르는 방식도 달라서 마치 서로 다른 나라들이 한 데 묶어있다는 인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프랑스 전역을 찍는 작업은 여러 명의 사진작가가 나누어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한 사람의 시각으로 프랑스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20명의 작가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면 20명의 새로운 시각, 새로운 프랑스가 생기는 것이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프랑스가 큰 나라라고 착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프랑스는 작은 나라이다. 프랑스가 큰 나라라는 것은 일종의 허상이다. 프랑스 북부의 도시와 남부 도시들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방향의, 반대편 도시들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한 사람의 시각으로 프랑스를 바라보고, 작은 프랑스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 사진들은 프랑스 전역을 돌며 전시했고 파리에서는 약 10만 명 정도가 전시를 봤다. 두 달 후에는 책으로도 묶어 나올 예정이다.


포토저널리스트들도 직업이다 보니, 지면에 선택받는 사진 위주로 작업하며 개인 작업을 이어가기 힘들 때가 있다. 당신이 사진기자로 출발해서 영화, 컨템포러리 아트까지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고 지켜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

어떤 면에서 긴 여정이고 쉬운 일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내가 가진 행운은 영화와 사진을 넘나들 수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많은 나라를 다닐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상하게도 외국에 나가면 프랑스를 생각하게 되고, 사진을 하면 영화를 생각하게 된다. 사진이든 영화든, 한쪽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습관적인 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느 순간까지는 우리가 배워야 하지만, 또 다른 순간에는 우리가 배운 것을 모두 버려야 할 때가 있다.

사진은 매우 단순한 면이 있는데, 첫 번째 시선, 만남, 이런 것들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반대로는 레비스트로스(클로드 레비 스토로스, 인류학자)처럼 오랫동안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부족 등 다른 집단에서 머물면서 그들과 동화된 후 담아내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결국 첫 만남 아니면 긴 머무름이다. 그 중간의 애매한 지점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젊은 사진가들이 자신이 오랫동안 살아온 도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업을 재밌다고 생각한다. 또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 가서, 이방인이 돼서 작업하는 경험도 추천한다. 본인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일상적인 삶과 새로운 삶을 함께하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다. 그렇지만 내가 볼 때 익숙한 곳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가끔은 더 어려운 일 같다.

결국, 프로페셔널에 머물지 말고 아마추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글 석현혜 기자  이미지 제공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FIAF Gallery, 영화사 찬란
해당 기사는 2017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