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희 | 방랑의 종착지 부산 달맞이길

 

50평이 넘는 작업실에는 인물사진을 촬영하기 위한 스튜디오가 갖춰져 있다.
 

영감을 주는 바다
바다는 사진가 김홍희(1959~ )의 숨구멍이다. 지구가 좁다하고 자유인으로 방랑자처럼 떠돌아도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곳, 그곳은 바로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부산 해운대 달맞이길이다. 눈만 뜨면 바다가 보이는 언덕배기 동네에서 성장한 그는 60대 중반에 이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달맞이길 언덕에 작업실을 두고 “여기서 보이는 곳이 다 나의 정원”이라며 큰소리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도보로 바닷가 산책이 가능한 작업실에서 그는 사진을 찍고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고 줄담배를 피운다. 그러다가 갑갑하면 훌훌 털고 일어나 자전거로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들어와 심기일전한다. 바다는 끊임없이 상상력과 에너지를 끓어오르게 하고 반대로 그를 잔잔하게 가라앉혀 명상에 잠기게도 한다. 그가 무수히 쏘다닌 풍경 좋은 어떤 명소보다 “부산이 최고!”라고 말하는 중심에는 자신에게 늘 영감을 주는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7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첫 작업실을 연 것이 1991년입니다. 당시에는 상업사진을 할 목적으로 부산 KBS가 마주 보이는 곳에 스튜디오를 열었어요.”

33세에 귀국한 그는 “일단 마흔 살이 될 때까지는 돈을 번 뒤에 전업 작가가 되자.”는 결심을 하고 90년대 초반, 아직 웨딩포토라는 말이 낯선 부산에서 11개의 웨딩포토 스튜디오를 운영했을 정도로 사업수완이 남달랐다. 그리고 애초 계획대로 마흔이 되자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때 발표한 작품이 <세기말 초상>이었다. 1999년,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한국인 365명의 초상을 보여준 그는 2999년, 앞으로 천년 후에 ‘우리 후손들이 이 사진을 본다면’이란 전제를 깔고 촬영했다. 우리가 천년을 앞서 산 조상들의 모습이 궁금하듯이 그들도 그러하리란 생각을 한 것이다.

이렇게 전업 작가로 새천년을 맞이한 사진가 김홍희는 <세기말 초상> 이후로도 계속하여 <결혼 시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등 인물사진과 인문학적 풍경사진을 세련된 글솜씨를 곁들여 보여주었다. 지난 20여 년간 자신의 글과 사진으로, 또는 다른 작가의 글에 사진만 제공한 단행본을 무려 30여 권 이상 발표하며 왕성하게 활동해온 김홍희 작가, 그가 낸 책의 제목만 봐도 그의 종횡무진 동선이 그려진다. 『방랑』, 『청춘방랑』, 『몽골방랑』, 『상무주 가는 길』, 『암자로 가는 길』(글, 정찬주),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글, 현각스님), 『인도 기행』(글, 법정스님) 등 얼른 봐도 그를 말함에 있어 키워드는 ‘길’이다. 길에서 길(道)을 찾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인류가 발명해낸 ‘탈 것’들을 모두 동원하여 산으로 들로 사막과 도시로 거침없이 달려갔다. 낯선 사람과 낯선 풍경을 만나는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삶의 동력이 되는 것 같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누구하고라도 어울릴 수 있는 엄청난 친화력과 바다처럼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이 세상을 다 품을 수 있다는 자신만만함의 본질은 기실 그의 자유로운 영혼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촬영 이후에도 엄격한 후작업을 이어가는 김홍희 작가. 한쪽 벽면은 그가 작업한 인물사진으로 채워졌다.



작업의 공간이면서 힐링의 공간인 작업실. 음악을 들으며 휴식의 시간을 즐긴다.

모터사이클 마니어로 잘 알려진 김홍희 작가.
4바퀴가 데려다주지 못하는 곳까지 그를 데리고 가서 원하는 장면을 포착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한 눈으로 보는 세상
김홍희 작가는 스무 살쯤 벌써 “인생은 알 수 없는 일로 가득하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는 아기일 때 홍역을 크게 앓는 바람에 오른쪽 시력을 잃었다. 그런데 눈동자 위에 하얀 막이 덮여 시력도 시력이지만 외모상으로도 치명적이었다. 당시 철없고 짓궂은 또래들이 그를 얼마나 놀렸으며 그런 속에서 그가 지지 않으려고 쌈박질을 일삼으며 속으로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 아들을 바라봐야 했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아들에게 이런 약속을 했다.

“홍희야, 네가 더 크고 의술이 발전하면 엄마 눈을 네게 줄게. 아마 하느님이 너에게 이런 시련을 주신 걸 보면 분명히 무슨 뜻이 있으신 것일 게다.”

그런데 스무 살 무렵 그날도 몇 명과 맞붙어 싸움을 해서 크게 얻어맞았는데 그다음 날 거울을 보니 웬걸, 얼굴은 엉망이지만 늘 눈에 끼어 있던 하얀 백태가 벗겨져 버린 것이 아닌가. 시력을 되찾은 건 아니지만 그동안 병원을 찾아다니며 고민했던 백태가 어쩐 일인지 하룻밤 싸움 끝에 없어진 것이었다.

“그때 깨달았어요. 아, 인생은 알 수 없는 일로 가득하구나. 20년간 애썼던 일이 이렇게 엉뚱하게 해결되다니... 세상엔 내 힘으로만 되지 않는 일이 너무나 많구나. 그러니 열심히 살되 결과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다.”

그 깨달음은 김홍희 작가의 인생에서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부딪치고 헤쳐 나가는 열정적인 성격이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경학을 공부한 그가 더 큰 꿈을 안고 1985년에 무작정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것도 그렇다. 가난한 어머니가 주신 성경 한 권과 모포 한 장을 들고 맨주먹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어학원에 다니면서부터 아르바이트를 찾았고, 말도 안 통하지만 특유의 배짱과 친화력으로 유학생활을 버텨냈다. 도시계획학을 공부하러 갔던 그는 부산에서부터 흥미를 가졌던 사진 공부를 먼저 시작했는데 대학교 1학년 학생으로 그의 사진이 니콘살롱 포트폴리오 공모전에 뽑히는 바람에 니콘살롱에서 전시도 하고 선생님에게도 인정받게 되면서 본격적인 사진유학으로 바뀌어버렸다.

“너 말이야, 네가 얼마나 좋은 사진을 찍고 있는지 너는 모를 거야.”

니콘살롱 공모전에 낸 포트폴리오를 보고 모리야마 다이도 선생이 그에게 해준 이 말은 그를 사진의 길로 성큼 들어서게 했다. 모든 일들이 우연처럼 다가오고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사진가의 길로 들어서면서 그는 생각했다. “어차피 사진기는 한 눈으로 들여다보는 기계인데 이보다 내게 더 적합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일목요연(一目瞭然), 한 눈(一目)으로 맑고 분명(瞭然)하게 세상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사진가의 삶이 펼쳐졌다.

 








지금 격주로 한 면을 통틀어 연재중인 김홍희 작가의 칼럼 <Korea Now>
사진과 그에 곁들인 시로 작가의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땅의 사람과 풍경
그는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부산으로 다시 돌아오며 이렇게 결심했다. “사진이 흐르는 도도한 강물을 비틀고 싶다.” 스트레이트 사진을 제대로 정립하여 전개하는 사진가가 드문 상황에서 미국의 로버트 프랭크처럼 사진의 맥을 제대로 짚고 새롭게 비튼 사진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그렇게 30년이 흘러 지금 그는 어디쯤에 있는 걸까?

“보통 10년 프로젝트로 작업을 진행해요. 1만 명의 인물을 찍는 <만인보>, 조선시대 이중환 선생의 택리지를 사진으로 구현하려는 <루트777>이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입니다. 물론 이 작업은 큰 줄기이고 그 사이 사이에 잔잔한 작업들을 다양하게 하고 있지만요.”

그의 사진은 결국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아득한 세월을 두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이 땅의 기운과 풍경의 기록으로 요약된다. 돌아보면 <세기말 초상>이 확장되어 <만인보>로 나타났고, 그동안 국내의 산사와 암자를 찾아다닌 방랑길이 축적되어 <루트777>로 이어졌다. <루트777>은 부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7번 국도와 부산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을 지나 서해안을 끼고 올라가 경기도 파주에 이르는 77번 국도를 합친 명칭으로 결국은 해안선을 따라 국토를 크게 한 바퀴 도는 길이다.

“2022년에는 백두대간을 섭렵했어요. 이제 새해에는 조선시대 과거를 보러가던 길이었던 영남대로와 삼남대로를 달릴 예정입니다.”

주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달맞이길 작업실 안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인물을 촬영하고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바깥촬영을 한다. 사흘은 바깥에서, 나흘은 실내에서, 삼한사온인 셈이다. 겨울 네 달을 제외하곤 대부분 모터사이클로 이동하는데 네 바퀴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을 갈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모터사이클을 애용하는 마니아로 알려져 왔다. 사실 빠르게 움직이는 바이크를 타고 한 눈으로 원근감을 잰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는 가까운 물체와 다음 물체와의 거리를 근거로 원근감을 추정하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터득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위험한 오토바이를 왜 타냐고 하는데 불량스럽잖아요. 불량하다는 건 자유롭다는 말과 통하는 거 같아요. 제일 재미있는 게 하지 말라는 거 하는 거 아닌가요?”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불량기를 과시하지만 사실은 그의 사진촬영에 가장 긴요한 이동수단이다. 특히 『상무주 가는 길』은 길이 구불구불하고 좁은 산속 사찰을 찾아가는 길이어서 주로 모터사이클을 이용했다. 세상의 온갖 구속으로부터 탈피하여 정신의 자유를 찾아가는 상무주 가는 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수단이었는지 모른다. 작가 자신도 모터사이클을 타고 커브에서 몸을 눕힐 때 정신과 몸과 바이크가 일직선으로 놓이는, 즉 고도로 집중력이 발휘되어야 하는 그 순간에 희열과 자유로움의 극치를 맛본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낸 책이 30여 권에 이르는 김홍희 작가는 앉으면 글을 쓰고 서면 사진을 찍는다고 말한다. 그가 낸 책을 작업실에 비치해놓았다.



부산 달맞이길에 있는 작업실에서 도보로도 이동이 가능한 해운대 풍경.
작가는 세계 어디를 가봐도 부산이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세우는데 그 가장 큰 이유가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바다라고 말한다.


글보다 사진, 사진보다 글
“달맞이길은 프랑스의 몽마르트 언덕 같아요. 낭만적이고 아름답잖아요. 여기로 오기 전 작업실은 바다 전망이 더 좋았지만 좁아서 2년 전에 여기로 옮겼어요. 넓은 데로 오니까 정리해야 하는 스트레스를 안 받아서 정말 편해요.”

50평이 넘는 지금의 작업실에는 조명기구를 갖춘 스튜디오와 누워서 쉴 수 있는 방 하나, 그것과 분리된 넓은 공간이 있어 사진 관련 책과 장비, 그리고 질 좋은 음악 감상이 가능한 오디오 시스템, 디지털 후작업을 돕는 컴퓨터와 프린터, 사진작품 등이 가득하다. 이곳에서 그는 글을 쓰고 사진 작업을 하는데 최근에는 지난 8년간 해왔던 국제신문 연재를 다시 시작했다. 격주로 한 면을 통틀어 실리는 이 기사에서 한 장의 사진에 시 한 수를 곁들이는 형식의 연재를 이어가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일본의 하이쿠처럼 한 줄의 글로 심장을 뚫기를 바라며 쓴다고 했다. 절실함과 진정성이 있어야 좋은 글, 좋은 사진이 나온다고 말하는 김홍희 작가의 미리 보는 묘비명은 “엥간히 해라.”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살아생전에 대충 산 적이 없었다는, 엥간히(어지간히) 열성적이고 분주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원체 부지런한데다 다양한 호기심과 재능으로 왕성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가 요즘 흠뻑 빠진 취미는 펜글씨다. 하루에 한두 시간씩 글씨의 획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가지런히 모으는 시간을 보내는데, 이 펜글씨야말로 그의 몹시 발 빠른 움직임(動)에 깊은 고요(靜)의 균형을 맞추는 최적의 요소가 되고 있다. 한두 시간씩 펜글씨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무념무상의 세계로 빠져든다는 것.

부산에서 태어나 날마다 바다로 뜨는 해만 보았지 지는 해는 볼 기회가 없었다는 김홍희 작가. 그는 마흔이 넘어 처음으로 변산반도에 가서 장엄하게 지는 해를 보았을 때 전율했다고 말한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비로소 언젠가 나의 방랑을 멈출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기독교인이지만 이상하게 스님과 사찰에 인연이 많이 닿아 오랫동안 불교문화와 관련된 작업을 해온 그는 아직은 뜨는 해를 바라보며 언제든 튕겨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새해가 되면 서울에서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잇는 삼남대로와 경상도에서 충청도와 경기도를 거쳐 서울에 이르는 영남대로를 따라 국토의 깊숙한 속살을 헤집고 달리며 유구한 역사를 담고 있는 이 땅의 문화와 풍경을 기록할 것이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23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