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사진가의 평생이 담긴 “Motherland”, 주명덕

안동 가는 길


경북 안동, 주명덕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가는 길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서울에서 출발하면서 티맵에 주소 불문하고 ‘주명덕 아뜨리에’라고만 입력하면, 아니 ‘주명덕’까지만 쳐도 망설임 없이 길 안내가 시작된다. 서울에서 인터뷰를 해도 되지만 굳이 먼 길을 택한 이유는 한 작가의 평생 작업이 보관되어 있는 현장을 직접보고 느끼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긴 시간 자동차를 타고 오가며 긴 이야기를 듣고 싶은 까닭이었다.

 

오수미, 1983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작가로부터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1940년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서울로 월남하여 혜화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6.25전쟁 발발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서 피난 온 학생들이 워낙 많은지라 서울학생들만 모아서 가르치는 천막학교에서 공부하던 그때, 아이들은 종종 선생님을 따라 부산 영도로 나가서 등대 앞에 칠판을 걸어 놓고 수업을 받곤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큰 파도가 밀려오면 아이들은 깜짝 놀라 얼른 칠판을 들고 도망치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정경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차라리 부러운(?) 작가의 피난시절 추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학교 1학년 때 대수를 가르치신 선생님이 바로 조병화 시인이었고 국어선생님은 소설가 황순원 선생님이었다니! 선생님들도 대거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와 계셨으므로 누릴 수 있었던 호강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대수 첫 시간에 조병화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어렵겠지만 너희들은 이 세기의 마지막인 1999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전쟁 중이지만 1999년에 너희들이 무엇이 되어 있을지 생각하며 꿈을 크게 가져라!”


당시로서는 너무나 먼 훗날을 말씀해주시며 철부지들에게 미래를 역설하신 선생님. 게다가 국어시간에는 황순원 선생님으로부터 국어를 사랑하고 우리말을 예쁘게 쓰는 법을 배웠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보낸 10대 시절은 이렇게 그가 평생 사진가로 살아가는 풍부한 감성을 심어주었다.


첫 기억, 그리고 다큐멘터리 사진
 


사람에게는 누구나 최초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주명덕 작가의 첫 기억은 당시 남북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치 않았다. 그는 일곱 살 적에 어머니가 주선해주신 안내인의 손을 잡고 38선을 넘어오며 뭔지 수상하고 편치 않았던 기억이 또렷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첫 사진전이 ‘홀트 고아원’에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1960년대 초반, 갓 스물을 넘긴 청년이 혼혈고아들에게 관심을 갖고 작업을 했다는 것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도 어쩌면 그의 첫 기억과 무관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본다. 그가 홀트 고아원을 알게 된 것은 두 살 위 대학생 누나가 그곳에 봉사활동을 다닌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누나를 따라간 그곳에서 혼혈고아들을 본 순간, 그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음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현장이 청년의 마음을 흔든 것이다.

 
“그때가 사진을 시작한 초창기였어요. 열심히 산에 다니다가 산사진을 찍는 분을 알게 되어 그분이 주도하는 사진동아리에 참석하면서 사진에 빠졌어요. 실은 처음엔 그 사진동아리에 있던 여학생에게 빠진 것이었지만요.”

 

이호철, 1969


그는 1966년,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포토에세이 홀트씨 고아원” 전시로 본격적인 데뷔를 했다. 첫 전시였지만 그 후 왕성한 작품 활동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늘 회자되는 것은 작가들에겐 흔치않은 사례일 것이다. 남들이 습작을 할 20대에 그는 이미 한국 다큐멘터리사진의 서막을 당당하게 열어젖힌 것이다. 장안의 화제가 된 첫 전시 이후에 1968년에는 미군부대가 있는 “용주골”을 촬영했고 60년대 서울의 모습을 기록했다. 1968년부터 73년까지 중앙일보 출판국 “월간 중앙” 기자로 일하면서 “명시의 고향”, 당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초상사진, 그리고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사회상에 관심을 갖고 “한국의 가족”을 주제로 작업을 했다.

 
“정말 대단히 애정을 갖고 한국의 가족을 촬영했어요. 시골에 취재 갔다가 문 두드려 사진을 찍은 일도 있고, 부자부터 가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가족을 다양하게 기록하려고 노력했어요.”


기록성에서 서정성으로

부산 영도 앞바다를 바라보며 공부하던 소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꿈꾸며 열정적으로 산을 타던 청년, 슈베르트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가곡을 사랑하는 사진가. 그러고 보면 1981년 롯데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서정”은 어느 정도 예견된 작가의 변신이 아니었을까. 작가가 풍경사진을 하면서 ‘나를 찾은 사진’이라고 말한 것도 그런 연장선상이 아닐까 해석한다. 1980년대부터 그의 사진은 정통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도시풍경, 자연풍경으로 확장된다.


1989년 서울미술관 전시 “Landscape"부터 2005년 갤러리 인에서 같은 제목의 전시가 열리고 대림미술관에서 두 번의 풍경사진전 후 2011년에 열린 ”My Motherland - 비록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까지 20여 년 동안 풍경사진전이 꾸준히 계속된다. 다양한 소재를 주명덕의 시각으로 보여준 그의 풍경사진은 2016년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파드마”, 연 사진으로 이어진다. 특유의 모노톤으로 “Rose"를 보여주었을 때 이미 작가의 꽃 사진은 꽃을 넘어선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2016년에는 아예 연꽃이 아닌, ‘연이 있는 풍경’을 보여주었다.


 

김종학, 1996


풍경사진 자체가 넓고 다양한 함의를 갖고 있다. 장엄하거나 아름답거나 위대하거나 사소하거나, 어쨌든 자연을 해석하는 작가의 철학과 시선에 따라 마치 아직 편곡되기 이전의 원형의 악보처럼 얼마든지 다르게 변주될 수 있는 가능성과 매우 사적인 작가의 내면이 투사될 수 있는 매력이 있다. 주명덕 작가는 그저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전에는 아마도 무심히 지나쳤을 풍경을 새롭고 독자적인 시각으로 발견하고 독보적인 모노톤으로 함축해 보여주었다. 사계절마다 다른 색을 품고 있는 자연풍경을 풍부한 컬러 색감 대신 단순한 흑백사진으로 표현하기에는 갑갑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에 대하여 그는 “검은 색에는 모든 색이 다 들어 있다.”고 말한다. 검은 색을 한 가지 색이라고 단정해버리는 단견(短見)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검게 보이는 그의 흑백사진 속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그리고 이슬방울과 눈보라가 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고 마침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까지 읽어낼 수가 있는데, 그가 이 나라 이 땅의 풍경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모국에 대한 원초적인 애정과 뜨거운 열정의 헌사(獻寫), 즉 사진으로 바치는 조국애(祖國愛)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땅의 사진가로서 남기고 싶은 것들

20세기, 지독히 험난한 시대를 사진가로 살아오면서 인물, 자연풍경, 고건축, 불교, 전통문화, 도시풍경 등 거의 전 분야를 망라하여 수많은 역작을 남긴 대가에게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 어떤 사진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그 머나먼 길을 오롯하게 걸어온 사진가로서 심중에 두고 있는 목표가 있지 않겠는가.


 
“내 사진을 통하여 한국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유럽의 음악가들이 조국을 노래했듯이 사진으로 내 조국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잔잔하게 세월을 초월하여 내 사진을 보며 ‘이게 우리나라구나!’라고 느낀다면 바랄 것이 없지요.”

 

홀트씨 고아원, 1965


강이 흘러 바다에 닿듯이 그의 사진의 종착역은 ‘조국’이었다. 1969년에 출판한 그의 사진집 “섞여진 이름들”에 실린 작가의 말을 옮겨 보면 “앞으로 나의 사진은, 우리의 고유한 전통을 모아서, 우리의 문제들을 현실에서 찾아서, 사회에 반영시키기 위해 노력한 그 결과가 될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 태어난 사진작가로서 국가와 사회 그리고 민족에게 조금이라도 공헌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 다짐이 때로는 직진으로 가끔은 에둘러 완만하게 흐를지라도 결국은 바다로 향하는 강물처럼 쉼 없이 한곳을 향하여 달려온 것이다.

 
“새해부터 국가에 대한 재능기부라고 생각하고 ‘한국 집’을 찍으려고 해요. 고건축학자와 함께 전국을 다니며 아직 남아 있는 우리의 가옥을 찍자고 약속해놨어요. 이런 사진을 하다 보면 제대로 보존할 줄 모르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러니 더 사라지기 전에 사진으로라도 남겨야 한다는 조바심이 커지지요.”


사람이 살면서 유지하고 있는 ‘한국 집’을 찾아서 사진으로 남기겠다고 말하는 작가는 “고택체험은 시작하는 순간, 고택에서 멀어져요. 찾아오는 손님들의 편리함에 맞추기 마련이거든요. 또 후손들이 잘 살면 크고 번듯하게 한다고 대문 앞에 시멘트로 주차장을 널찍하게 만들어 놓거나 하는 식으로 가옥의 깊고 그윽한 기운을 망가뜨린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가 70중반을 넘어선 나이에도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누비며 고단한 작업을 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사진을 시작한 초창기부터 이 땅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이 땅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사진으로 남기겠다고 결심했던 작가의 초심은 50년 긴 세월에 무엇을 찍든 조국애와 맞닿은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빈한한 산촌의 초가, 구불거리며 돌아 나오는 길에 바라본 산모퉁이의 잡목, 투박하게 쌓은 돌담, 흙먼지 풀풀 날리는 흙길, 지붕과 지붕으로 이어지는 절집의 기와, 초라한 입성에도 꿀리지 않는 담담한 사람들, 작가가 보여주는 이 땅의 한 줌 공간과 찰나의 시간은 화려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텅 비어있어도 가슴 벅차다. 인위적으로 지어내거나 강요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작가의 풍부한 서정과 미적 감수성과 이 땅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어 그러할 것이다.


최근에 고산 스님 사진집 출간과 전시

 
고산 스님, 2017


작가와 불가(佛家)의 인연은 매우 길다. 1970년대부터 한국의 고건축에 관심을 갖고 절집을 꾸준히 찍었고 해인사에서 3년 동안 성철 스님을 촬영해 1988년에는 성철 종정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리고 1993년, 성철 스님 열반 후 생전의 모습과 다비식 과정까지 담은 사진집 “성철 큰스님”을 냈다. 성철, 법정, 헤암 스님 같은 큰 스님들과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불교문화재, 절집의 공간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그만한 사진가가 없다고 알려진 것도 꽤 오래 전부터다. 그리고 최근, 2017년 10월에 고산스님 사진집을 출간하고 전시를 열면서 불가에서 사진가 주명덕의 이름은 명불허전임을 입증했다.


사실 주명덕 작가의 사람사진은 데뷔작인 “홀트씨 고아원”에서 볼 수 있듯이 벌써 50년 세월을 훌쩍 뛰어 넘는다. 서른 살 무렵 우리나라 명사들의 초상사진을 찍을 때 일화는 유명하다. 겨우 서른 안팎의 앳된 청년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니까 미덥지 않아 하는 분들에게 “지금은 선생님이 유명하시지만 언젠가 제게 사진을 찍히신 것을 이야기하실 날이 올 겁니다.”라고 말했다는 당찬 청년은 결국 그 말을 실제로 이루었다.


자신의 생각을 망설이지 않고 내놓는 직설법 때문에 까다로운 사람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그는 사람과 정을 나누는 일을 워낙 좋아한다. 신혼시절 정릉에서 살 때 퇴근하고 집에 가면 날마다 지인들이 먼저 와 방안 가득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그러한 작가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우러짐은 그의 작품 활동에 소중한 인프라가 되어 70년대 전업 사진가로 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던 시절을 헤쳐 나오는 힘이 되었다. 다방면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작품의 세계도 넓히고 수많은 프로젝트를 만들어내고 수행해나가는 데에 밑받침이 되었다.


 
성철 스님, 1986


사람에 대한 살뜰한 정과 깊은 이해는 그가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 가장 그 사람다운 순간을 포착해내는 바탕이 된 것 같다. 그의 인물사진도 풍경사진처럼 극적인 순간을 표현하려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고 무장 해제된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힘을 뺀 순간의 포착이랄까, 성철스님의 모습이 그러하고 산길을 걸어가는 법정스님의 뒷모습이 그러하다. 반면 예술가들의 초상사진에서는 그 인물만이 갖고 있는 강렬한 개성이 표출된다. 대상과 교감을 나누지 않고서는 드러날 수 없는 속마음이 주명덕 작가의 초상사진에서 감지된다.


안동의 작업실은 사진의 성(城)

 

경북 안동에 있는 주명덕 아뜨리에는 폐교를 리모델링한 건물로 그 안에 작업공간, 전시공간, 생활공간, 자료실 등이 있다.
한 작가의 작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작업량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안동댐을 지나 이리저리 구부러지는 시골길을 한참이나 더 달려서 도착한 “주명덕 아뜨리에”는 폐교를 개조한 하얀 2층 건물이었다. 운동장에는 제멋대로 자란 풀들 사이로 씨앗이 떨어져 자생적으로 자란 키 작은 소나무들이 여기저기 제법 터를 잡았다. 자연이 운동장의 빈 터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을 보는 느낌이었다.

 
“한 달에 열흘 이상 여기서 보내요. 그 정도는 머물러야 집이 화를 안 내요.”


애인의 토라짐을 걱정하는 연인처럼 작가는 작업실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5백 평 규모의 작업실은 사실 작가의 일생과 버금가는 무게로 이해되었다. 그 안에 전시실과 암실, 사진원고 라이브러리와 사진관련 서적들, 1만 장이 넘는 LP판, 생활공간과 게스트 룸 등, 이 공간이 없었으면 이 많은 물건들이 어디에 다 들어갈까 걱정될 정도로 5백 평도 헐렁하지 않았다. 작업량을 보니 비로소 작가의 수고가 실감나게 피부에 와 닿았다. 한 작가의 평생 작업이 이렇게 방대할 수 있다는 것에 할 말을 잊고 있는데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내 평생 하고 싶은 것의 육, 칠십 프로는 했으니 앞으로 팔, 구십 프로까지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방대한 자료실 한쪽에 대형 금고 두 개가 있는데, 그 안에는 평생 작업한 원고 가운데 대표작들이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교실 몇 개를 꽉 채울 정도의 작업량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더 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작가. 2018년 새해부터 ‘한국 집’을 시작으로 열심히 작업할 기세다. 한편 일, 이층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중 눈길을 끄는 게 있었다. 사람 키 정도의 대형금고였는데 도대체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궁금했다. 이윽고 금고의 문이 열리고, 아! 거기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소중한 필름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불에도 끄떡없는 금고라며 작가는 미소를 지었다. 일평생을 사진가로 살아온 작가에게 그의 시간과 열정이 녹아 있는 원고보다 더 귀한 보물이 어디 있으랴.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안동 작업실에 있는 주명덕 작가의 다실.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는 공간이다.


다시 서울로 올라오면서 안동 작업실에서 작가가 들려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중 보리수가 내내 귓전에 남았다. 슬프도록 아름답고 풍성한 감성으로 낭만에 젖어들게 만드는 슈베르트의 가곡, 아마 주명덕 작가가 사진으로 전하고 싶은 조국에 대한 울림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2099년을 살게 될 후손들에게 물려줄 사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올라오는 상경길이 가슴 뿌듯했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주명덕 작가

해당 기사는 2018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