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채 | 우포늪에 빠진 사진가
- 2024-09-10 16:17:55
늪에 빠지다
서울에서 4시간 이상 운전하여 다다른 그곳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어제처럼 오늘 하루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고요하고 적막했다. 그러나 이건 그저 인간의 관점일 뿐, 한여름 땡볕 속에서 마당의 여름꽃들은 다투어 꽃을 피우고, 길 하나 사이에 둔 앞산에서는 각종 나무들이 햇빛을 더 받기 위해 경쟁적으로 키를 키우는 중이다. 또한 숲속에서는 각종생물들이 꿈틀거리며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그곳에 ‘우포늪 사진가’라 불리는 정봉채 작가의 작업실과 갤러리가 있다. 경남 창녕군 이방면, 우포늪에서 불과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대도시 부산에서 살던 그가 안정적인 교사직을 내던지고 전업 사진가로 방향을 틀었을 때, 그리고 우포늪에 점점 발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삶의 둥지를 아예 우포늪으로 옮겨와 버리는 결단을 내렸을 때, 그 ‘지독한 끌림’의 근원에는 사진이 있었고 또한 우포늪으로 대변되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가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내 돈 16,000원을 주고 중고 카메라를 구입한 것이 사진의 시초였어요. 그때 우리 학교에 늘 상주하는 사진사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 아저씨의 암실에 들락거리며 암실작업을 도와드리기도 하고 내가 찍은 사진을 인화해 보기도 했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는 영화사진클럽에 들어갔지요. 그때 고등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당시 한 달 월급을 넘어서는 가격인 미놀타 카메라를 사주셨어요. 그런 것들이 다 운명처럼 사진에 다가서는 길을 열어준 것 같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사진을 하게 될 줄 몰랐다는 정봉채 작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부터 당시엔 생소하기만 했던 컴퓨터 과목을 가르칠 때도 그것이 훗날 남보다 더 빠르고 쉽게 디지털 사진을 이해하는 저력이 될 줄 몰랐다.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자꾸 사진으로 향했던 그는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1999년에 학교에서 퇴직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책임한 가장이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2000년을 앞두고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졌던 것 같아요. 선생이라서 방학이 있으니 남보다 사진을 할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점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고 할까요.”
그는 마흔을 넘겨 학교를 그만두고 우포늪 근처 세진마을에 세를 얻어 본격적으로 우포늪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때는 10년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하면 무슨 일인들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기대가 그의 결단을 재촉한 것이었지만 막상 2009년이 되니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느낌이었다고 한다.
“2009년이었어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탈진 상태에 이르렀어요.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경제적인 어려움은 기본이었고 오랫동안 늪에서 살다시피 하니 습한 환경이 가져다주는 천식과 습진 등에 시달리면서 건강에 대한 자신을 잃었어요. 더 이상나아갈 힘을 잃고 바닥에 이르렀습니다.”
늪에서 살아가기
그러한 작가를 치유해 준 것은 자연이었다. 그날도 새벽부터 촬영을 하고 있는데 안개 속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스스럼없이 다가온 고라니는 그의 다리에 머리를 부비며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도록 몸을 맡겼다. 그렇게 한2, 3분 지났을까. 어디선가 갑자기 경운기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리자 그때서야 깜짝 놀란 고라니가 껑충 뛰어 사라졌다.
“그때 깨달았어요. 아, 내가 미처 몰랐을 뿐 이 고라니는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구나. 내가 10년간 우포를 찍었다고 해도 이렇듯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우포늪을 거의 다 찍었다고 생각했던 정봉채 작가의 눈에 우포의 모든 것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비로소 개안(開眼)을 한 것처럼 나만의 우포가 보이고 나만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현실적으로 한계치에 이르렀던 작가에게 예기치 못한 행운이 찾아왔다.
“2009년에 우연한 기회로 부산화랑미술제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내 작품을 알아봐주는 갤러리 관장을 만났어요. 서울 청담동에 갤러리를 가진 분인데 그때 인연을 맺게 되면서 해외 여러 아트페어에 참가하게 되고 전시장에서 작품이 솔드아웃 되는 행복한 체험도 했어요. 3년 동안 그분과 함께 하면서 작가로서 좋은 일들이 겹쳐왔어요.”
베이징, 파리, 스위스 바젤, 뉴욕 등의 아트페어에서 그의 작품이 좋은 반응을 일으키면서 정봉채 작가의 우포 사진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2008년에 한국에서 람사르 총회가 열리면서 람사르의 공식사진가로 선정된 바 있는 정봉채 작가는 그 다음 해에 영향력 있는 갤러리 관장을 만나면서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막다른 길에 몰렸던 정봉채 작가에게 새로운 길이 펼쳐진 것이다.
새로운 힘을 얻은 그는 우포에서 또 다른 10년을 꿈꾸게 되었다. 그 결과 세진마을에서 세 들어 살면서 부산 집을 오가던 그는 2016년에 아예 노동마을에 터를 잡고 정착하여 비로소 진정한 우포 사람이 되었다. 그가 터를 잡은 곳은 2차선 노동길의 도로변을 따라 띠 모양으로 길게 자리한 460평 대지인데 그곳에 갤러리 30평, 작업실 20평, 살림집 30평, 세 채를 지었다. 길에서 바라보면 맨 오른쪽이 그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갤러리이고 그 안쪽으로는 작업실, 더 안쪽엔 살림집이 있다. 그리고 집 뒤쪽으로는 과수가 심어진 야산이 있고 집 아래로는 2차선 도로가 지나며 길 건너에 작은 논과 그 논에 잇닿은 산이 있다. 뒷산과 앞산 사이에 낀 형국인 그의 사진 공간은 우포늪에서 가까워서 하루에 몇 번이라도 들락거리며 마음껏 촬영을 할 수 있다.
하늘에서 보는 우포늪
그가 첫 직장인 대기업에 사표를 낸다는 말을 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낙동강은 흐린 물이지만 큰 물고기가 살고 지리산 맑은 물에는 작은 물고기만 산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그는 “저는 작은 물고기로 살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해외연수를 보내주겠다는 회사의 제의를 받아들이면 회사에 묶이게 되고 그러면 사진을 찍기는 영영 어려울 것을 예상한 그는 1년 만에 대기업에 사표를 내고 교사를 택했다. 주말과 방학이 있어 비교
적 사진하기가 수월하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덕분에 사진도 많이 찍으러 다니고 대학원에 진학해 학문적으로 공부할 수도 있었지만 하면 할수록 시간이 모자라고 성에 차지 않았다.
“요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우포풍경을 많이 찍어요. 눈높이가 달라지니까 땅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오지요.”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그의 평생을 내려다봤다면 여러 갈래의 길에서 돌고 돌아 결국 사진가의 길로 들어설 것이 정해져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인생을 더 오래 사신 그의 아버지도 그것을 예감하고 계셨기에 대기업에 사표를 낼 때도 교사를 그만둘 때도 긴 말씀을 하지 않으시지 않았을까.
“예전에는 늪을 찍기 위하여 특공대처럼 풀을 헤치고 들어가기도 하고 배를 타고 나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곤충 한 마리라도 밟을까 염려돼 신경을 곤두세우게 돼요. 그런 의미에서 드론 촬영이야말로 친환경적이 아닌가 생각해요.”
정확하게 의도한 대로 프레이밍하기 어렵다는 드론의 단점은 그의 오랜 우포 촬영의 경험이 커버한다. 우포를 손바닥처럼 훤히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에 드론을 사용해도 작가의 의도대로 찍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내 사진이 환경을 생각하게 하는 마중물이 되고 자연환경에 대해 생각해 보는 매개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사진이어야 더 많은 관심을 끌 수 있겠지요.”
정봉채 작가가 하루에 천 장씩, 얼핏 보면 같아 보이는 사진을 그토록 열심히 찍는 이유다. 해마다 계절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우포의 아름다움을 놓칠까봐, 그래서 사람들이 우포의 또 다른 매력을 모르고 지나칠까봐 조바심하는 마음에서다.
“제가 세계적인 아트페어에 여러 번 나가보면서 배운 점이 있어요. 반복이 차이를 만든다는 것, 그 차이의 핵심은 세련미라는 것을요.”
그가 우포늪에서 무한반복을 하는 당위성이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의 우포늪 사진은 반복이 거듭될수록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그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시간을 쏟아부은 사람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지를 보여준다.
“흔히 늪은 생태계의 보고라고 말하죠.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어머니의 자궁처럼 생명이 잉태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어요. 먹이사슬에서 최하위에 속하는 곳이니 늪이 무너지면 자연이 무너진다고 봐야죠. 마치 기초가 흔들리면 건물이 무너지는 것처럼.”
그는 늪에서 살면서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면서 매일 봐도 다른 우포의 속살을 제대로 보여준다. 안개가 끼거나 눈이 오거나 빗줄기가 쏟아지거나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혹은 노을이 지는 저녁이거나 그의 사진 속 우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신비롭고 아름답다. 바람에 쓸리는 물풀들의 초록물결, 찐득한 늪의 표면을 뒤덮은 노란 마름꽃, 물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 정적을 깨고 날개짓하는 고니와 따오기, 사람이 개입할 수 없는 태초의 세계를 보는 듯하다.
따오기를 위한 벼농사
“정봉채 갤러리”에서 창밖을 보면 2차선 도로 건너에 작은 논이 있다. 한여름인데도 논의 반쪽에서만 모가 나풀거리고 있을 뿐 나머지 반은 그냥 물만 차 있다.
“따오기를 위해 논을 샀어요. 제초제를 뿌리니까 논에 사는 작은 벌레들이 다 죽어요. 따오기가 종일 논에 부리를 대고 쪼아도 먹을 것이 없어서 나중엔 탈진하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논을 사서 친환경으로 벼농사를 짓고 돈이 생기면 미꾸라지를 사다가 넣어요. 물 반 벼 반인 이유죠. 여기서 조금 떨어진 논 300평도 사서 그렇게 하고 있어요.”
논에서 사는 대표적인 새 따오기가 우리나라에서 멸종된 것은 1979년, 화학비료로 농사를 짓던 무렵이었다. 그 후 2008년 람사르 총회 때 중국에서 따오기 한 쌍을 선물 받아 인공번식을 해서 자연에 방사했지만 먹이를 구하지 못해 자꾸 죽는다는 것. 환경의 바로미터인 따오기를 지키기 위해 그는 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용케도 그것을 알고 따오기가 찾아와 그의 집 뒤편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
“현재 자연 상태에서 둥지를 튼 게 총 네 군데라는데 우리집이 그중 한 군데예요. 따오기 유치에 성공한 거죠.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어요. 여기 노동마을 사람들이 내년부터는 모두 친환경 벼농사를 짓기로 합의했어요. 이젠 이 마을에선 따오기가 살 수 있게 되었어요.”
어느새 그는 행동하는 환경운동가가 되었다. 앞으로 따오기와 같이 살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올봄에 사진집 『우포 따오기』를 세상에 내놓게 했다. 오랫동안 우포에서 새를 찍다 보니 새의 언어를 알아듣게 되어서 순간 포착에 유리해졌다는 정봉채 작가. 그의 사진은 자연과 한 몸이 되어가는 작가의 자화상임이 느껴진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기사는 2023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