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전]​로만 베작, 시대의 유물을 찍다

 

로만 베작의 작업은 건축에 대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건축을 생산한 이데올로기와 욕망의 제도에 관한 이미지이다.
 
<시대의 고고학> 전시 서문 中

 

 
Roman Bezjak, Pyongyang, 2012, arch of triumph, inkjet print, 100×123.5cm ⓒRoman Bezjak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다시 인간을 만든다. 독일에서 활동 중인 사진작가 로만 베작(Roman Bezjak)은 사회주의 시대 지어진 모더니즘 건축물에서 사회주의의 유물을 찾으려고 했다. 슬로베니아 태생의 저널리스트인 그는 1989년 이후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기록했다. 개인 작업을 시작하며 그의 시선은 사건과 인물에서 공간으로 옮겨 간다. 그는 동구권 사회주의 정권의 몰락 후 쓸쓸히 남겨진 거대한 모더니즘 건축물을 따스하고 향수 어린 시선으로 돌아본다.
 
 
​Roman Bezjak, Pyongyang, Kwangbok-street, 2012, inkjet print, 100×125cm ⓒRoman Bezjak
 
사회주의 정권은 모더니즘 건축물을 통해 만인을 위한 광장을 추구했지만 불꽃같은 혁명의 시대는 가고 그곳에 남은 건 소소한 개인들이다. 거대한 건축물과 그 앞을 지나는 일상적인 인물들의 대비를 통해 그의 사진은 개인과 집단, 이념과 일상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사회주의 모더니즘 건축물에 대한 그의 관심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북한 평양까지 확장된다. 러시아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중국도 자본주의 경제에 문을 열 때 여전히 외부 세계에 굳게 문을 닫고 있는 평양의 모습에서 그는 빙하기 마지막 남은 공룡을 바라보듯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의 유물을 찾아낸다.
 
 
로만 베작이 동유럽 건축물을 찍은 “사회주의 모더니즘” 시리즈와 북한 평양을 2주 동안 방문해 찍은 “평양” 시리즈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선보이고 있다. 지난 8월 18일 고은사진미술관에서 로만 베작의 <시대의 고고학 ARCHEOLOGY OF AN ERA>(8.17-11.20) 전시를 기념해 열린 아티스트 토크 내용을 지면에 전한다.
 

 
 
Roman Bezjak, Pyongyang, Kim Il-sung Sqaure, Daedong-gang River, The Juche Tower, 2012, inkjet print, 100×123.5cm ⓒRoman Bezjak
 

전시 제목이 ‘시대의 고고학’이다. 무슨 뜻인가?
 

고고학은 고대의 유물을 발굴하는 작업이다. 현대는 어쩌면 우리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시대가 될 수 있다. 지금 고고학자들이 이집트나 로마의 유물들을 찾듯이 우리 후손이 우리 시대를 탐구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사회주의 모더니즘과 그 사상이 반영된 건축물을 찍는 것은 미래의 고고학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는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진 이념이다. 우리가 실패한 시대라고, 실패한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회주의 시대를 고고학자처럼 발굴한다는 의미에서 “시대의 고고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동유럽 사회주의 건축물을 찍은 “사회주의 모더니즘” 시리즈는 어떻게 시작했는가?

 
“사회주의 모더니즘”은 5~6년 동안 찍은 사진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건축양식을 통해 사회주의 모더니즘과 사회주의 국가들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읽으려고 했다. 나는 1989년에 저널리스트로서 처음 사진을 시작했다. 1989년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등 유럽 역사에서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다. 독일이 통일되고 동유럽 사회주의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서유럽 출신 저널리스트들은 이 변화를 서방세계, 즉 자유주의 진영이 공산주의를 이긴 승리의 사건으로 인식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 변화를 동유럽에서 이룩한 평화적 혁명이라고 봤다.
 

서유럽의 미디어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가 겪고 있는 혼돈 상황을 주로 비추며 서유럽과 비교해서 발전하지 못하고 가난한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은 ‘우리가 너희들을 이겼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우월주의 시각으로 동유럽을 바라봤는데 나는 이를 배격하려고 했다. 동정심과 애정을 가지고 동유럽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고, 그런 시선이 이 작업에서도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Roman Bezjak, Pyongyang, Changgwang-street, 2012, inkjet print, 100×123.5cm ⓒRoman Bezjak
 

“사회주의 모더니즘”이란 제목은 무슨 뜻인가?

 
건축에서 모더니즘이란 1920~30년대 바우하우스 건축가들이 내세웠던 이념과 주제이다. ‘건축이란 단순해야 하고 명확해야 한다’, 이게 바로 바우하우스 건축가들의 생각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이들의 모더니즘 건축 철학이 지지 받았다. 동지애라든가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건설하자는 사회주의 이념에 모더니즘 건축 철학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는 모든 것이 국가의 소유물이라 도시를 건축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건축계획에 방해받을 일도 없다.
 

소련의 스탈린이나 후르시초프 같은 사회주의 지도자는 19세기 장식적인 건축양식보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모더니즘 건축물을 짓는 것이 인민과 대중에게 더 유익하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모더니즘 건축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모더니즘 건축이 단순하고 명확한 건축물을 동일하게 많이 지음으로써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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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 Bezjak, Socialist Modernism, Housing Estate, St. Petersburg, Russia, 2008, inkjet print, 140×172.5cm ⓒRoman Bezjak
 

“사회주의 모더니즘” 시리즈는 어떤 방식으로 촬영했는가?
 

건축물이나 도시의 풍경은 대형 카메라로 찍었다. 저널리스트일 때는 사진을 일단 많이 찍었는데 대형 카메라로 포맷을 바꾸면서 적게 찍기 시작했다. 하루에 5장이나 6장 정도만 찍고 사진을 인화했다. 많이 찍지 않다 보니까 대상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신중하게 찍게 됐다. 사진을 찍을 때 인공적으로 빛을 추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사진에는 그림자를 볼 수 없다. 기본적으로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이 사진이 나에게 흥미로운가에 대해 항상 질문하며 찍는다.
 

평양을 찍은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주의 모더니즘” 작업을 해오면서 이와 연관 있으면서도 좀 다른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없고 다가가기 어려운 북한을 찍고 싶었다. 북한은 고립된 사회이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갔다. 동유럽에서는 사회주의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가 거의 사라졌다면 북한은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가 여전히 남아 있는 나라이다. 동유럽이나 중국, 러시아 등은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회주의 흔적이 빨리 사라졌는데 평양은 그런 변화에서 비켜나 있어 그 사회를 찍어보고 싶었다.
 

북한 비자는 생각보다 쉽게 나왔지만 평양에서 움직일 때에는 항상 감시원 2명과 기사 1명까지 총 3명과 함께 다녀야 했다. 2주 동안 매일매일 2~3개의 모티프를 가지고 사진을 찍었다. 찍고 싶다고 해서 모두 찍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찍는 모든 피사체와 카메라 렌즈 방향 등이 다 검열을 거쳤다. 그렇기에 평양을 촬영한 다른 작가들과 내 사진이 별 차이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평양을 찍으면서 정치적인 이념이나 도덕적인 판단과는 거리두기를 한 채 평양이란 도시와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했다. 평양은 폐쇄주의적인 독재주의 국가이다. 획일적이고 거대한 건물과 대비되는 조그마한 인물들의 모습이 북한의 현실을 반영한다.
 

 
 
Roman Bezjak, Socialist Modernism, Housing Estate, There Widows, Belgrade, Serbia, 2005, inkjet print, 140×172.5cm ⓒRoman Bezjak
 

앞으로 하고 싶은 작업은?
 

유럽 가운데 국가주의 색채가 강한 나라에서는 사회주의 시대 세워진 건물을 허물고 그 전 세기의 전통적 건축물을 다시 세우려는 경향이 있다. 독일, 폴란드, 터키 등지에서 20세기 사회주의 흔적을 지우고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건축 경향이 미학적으로 보면 유치하고 키치적일 수도 있겠지만 촬영할 가치가 있다. 그렇게 과거로 돌아가려는 시도들을 사진으로 찍는 것은 내게 상당히 큰 도전이다. 또 가능하면 평양이나 북한을 다시 방문하고 싶다. 북한에 다녀온 후 4년 동안 내내 비자를 신청했는데 매번 거절당했다. 재방문할 수 있다면 다시 한번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고 싶다.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나오게 될지 기대된다. 평양에서 찍은 이 사진들을 한국에서 전시할 수 있어 기쁘다. 한국 사람들은 같은 동포이기에 내 “평양” 사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로만 베작(Roman Bezjak, 1962년~)은 개인전으로 <독일인의 눈.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독일 저널리즘 사진>(함부르크 다이히토어할레, 함부르크, 독일, 1996), <사회주의 모더니즘>(슈프렝겔 박물관, 하노버, 독일, 2011) 등을 가졌다. 러시아 재소자들에 대한 시리즈로 1995년 독일 사진상을 수상하였으며, 사진집으로 『Socialist Modernism』(Hatje Cantz, 2011)가 있다.
 


 
글 : 편집부
이미지 제공 : 고은사진미술관

해당 기사는 2019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