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근원을 탐구하다, 이주용

거대한 강물도 하나의 물방울로부터 시작되듯이 이주용의 작업도 시원(始原)을 따라가 보면 아주 작은 것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를 넘어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 유럽으로 확장해가는 그의 “천연당사진관” 작업은 30여 년 전에 우연히 손에 넣은 다게레오 타입의 작은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한다. 들여다볼수록 상상과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은판사진은 초상사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 시대를 읽는 단서로 작용하면서 시간과 기억,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었다.
 


〈천연당사진관〉 아트 프로젝트, 인물, 틴타입 핸드 컬러링 ⓒ이주용


시간의 추적자
평창동에 있는 이주용의 작업실에는 시간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문을 열자마자 공간을 가득 메운 오래된 대형 카메라들과 사진 자료들, 골동품과 책들이 4층의 각층마다 심지어 계단까지 점령하고 있어서 작업실이라기보다 오히려 박물관 같다. 그의 책상 위에도 펼쳐진 책과 자료들이 빽빽하다. 작업의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떻게 다듬어지는지 한눈에 짐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서라벌예고 재학시절, 중앙대학교 주최 사진공모전에서 입상하면서 이주용과 사진의 인연은 시작된다. 입상을 계기로 그림 대신 사진과에 진학한 그는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고 갑자기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뭔가 사진만으로는 미진한 기분, 미래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이 그를 불안하게 했는데, “혹시 미국에서는 사진의 미래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고 말한다.

처음엔 뉴욕으로 갔지만 자신의 기질과 맞지 않아서 1년도 안되어 서부로 향했고,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에 소재한 브룩스대학에 진학한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그에게 행운이었다. 교내에 사진박물관이 있어서 학기의 첫 수업은 박물관에서 시작되곤 했는데 그 박물관이 비로소 사진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줬기 때문이다, 사진의 역사가 거기 현존하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타고난 궁금증과 탐구심이 발동한 그는 날마다 박물관을 들락거렸다. 그런 그를 눈여겨본 관장이 자신의 조수로 일하기를 권했고, 이로써 박물관은 그의 공부방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1982년, 벼룩시장에서 다게레오 타입의 은판사진 한 장을 사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사진을 요리조리 보고 또 보면서 사진이 품고 있는 시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생각이 수집의 길로 나아가는 바탕이 되었다. 사진 한 장을 사고 나니 다른 사진이 눈에 띄기 시작했는데,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갖고 싶은 것은 갖고야 말았다. 스스로 사고 싶은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그의 생일에 스스로에 대한 선물로 구입하기도 했다. 자신의 다른 물건과 바꾸기라도 하여 결국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었다.

 

“내가 소유 욕망이 굉장히 강한가 봐요. 그런 욕망이 살아가는 태도를 결정지은 것 같아요.”


강한 욕망은 그에게 긍정적인 힘으로 작동한 것 같다. 사진의 수집이 대형 카메라의 수집으로 발전했고, 수집한 사진과 물건들은 과거의 시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집한 물건들의 동시대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 그 시대적 배경을 연구하게 되고, 그것이 그의 사진 세계를 확장시켜주는 모티브가 되었다. 어느덧 그에게 과거는 박제된 시간이 아니라 현재와 연결되어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원천이었다. 그는 시간의 추적자가 되었다.   
 


〈천연당사진관〉 아트 프로젝트, 인물, 다게레오 타입 ⓒ이주용



〈천연당사진관〉 아트 프로젝트, 인물, 앰브로 타입 ⓒ이주용



〈천연당사진관〉 아트 프로젝트, 인물, 틴타입 핸드 컬러링 ⓒ이주용


“천연당사진관”이 품고 있는 시간의 기억
사진의 발명이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던 만큼 처음에 수집한 오래된 사진들은 거의 다 유럽의 초상사진들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구한말, 대한제국 시대의 사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종과 순종, 영친왕의 사진을 비롯하여 당시 “천연당사진관”에서 촬영한 초상사진까지, 그의 수집은 우리의 초상사진으로 쏠렸다.

 

“처음부터 수집된 사진들로 무엇을 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건 아니었어요. 그냥 관심이 가고 마음이 끌렸기 때문에 모은 것인데, 30년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렇게 방대한 분량이 된 것입니다. 초상사진 한 장에서도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고 그 시대를 상상할 수가 있잖아요. 오래 들여다보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결국 “천연당사진관” 작업으로 발현된 것입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우연인 것 같지만 필연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1993년부터 그가 발표한 작업들은 ‘홀로그램’이라는 낯선 분야였다. 한국은 물론이고 선진국에서조차 홀로그램 작업이 아주 초기였던 80년대부터 기계를 잘 다루고 호기심이 많은 그는 홀로그램에 관심을 갖고 거의 독학으로, 혹은 미국과 유럽의 극소수에 불과한 작업자들을 찾아다니며 세미나를 같이 하고 정보를 공유하면서 홀로그램 작업을 지속했다.

분석해보면, 그는 단순하게 사진을 찍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진과 과학의 만남이라든지 사진과 역사의 만남이라든지, 뭔가 영역을 확장시켜서 더 복잡하고 더 깊고 더 넓은 제3의 것을 만들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홀로그램의 세상에 빠져서 평면의 사진을 입체로 보려고 한 것처럼 그는 차원(dimension)을 달리하는 작업을 시도했고 그것에 몰두하면 기어이 결과를 도출하는 강렬한 성취욕을 발휘했다.

“천연당사진관” 프로젝트도 그러하다. 2014년부터 사진관 프로젝트를 구성하게 되었고 2015년 3월에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다. 천연당사진관은 우리나라 초기의 사진관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 자체에 근대의 시간성과 시대적 상징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 전시를 통해서 과거를 재현하려고 했는데, “사진 아카이브를 어떻게 살아 숨 쉬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미술관 전시실 안에 ‘작동하는 사진관’을 설치해 관객들이 직접 사진관에 온 것처럼 사진을 찍으면서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구상했다고 말한다.

 

“이런 경험은 그 당시를 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시대성과 직면할 수 있게 합니다. 사진 속에 찍힌 시간과 기억을 현재로 호출하는 것이죠.”


관람객들은 과거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여 과거의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대형 카메라와 마주한다. 이로써 작가는 과거의 시간을 오늘의 대상에 이입시킴으로써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기억의 회로를 만든다. 과거와 현재는 ‘단절’이 아니라 ‘상통’하게 되고 과거의 시간은 자연스럽게 현재와 섞인다. 따라서 과거의 시간은 더 이상 갇혀버린 시간이 아니라 현재와 이어지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를 과거의 시간으로 역주행할 수 있게 하는 호출음들은 바로 그의 작업실에 쌓여 있는 숱한 수집품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수집품들을 통하여 작가는 끊임없이 과거와 소통하고 그 시대를 불러내며 현재와 접속케 한다. 시간의 기억을 현재화시키는 것이다.



〈천연당사진관〉 아트 프로젝트, 인물, 아카이브 채색 ⓒ이주용



〈천연당사진관〉 아트 프로젝트, 사진관




〈천연당사진관〉 아트 프로젝트, 사진관


천연당사진관이 찾아가는 공간의 기억
홀로그램이든 대형 카메라를 사용하든 그의 일관된 작업의 주제는 시간과 기억 그리고 역사였다. 시간성에 천착하던 그는 2014년부터 시작된 “천연당사진관” 프로젝트를 시행하면서 장소성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서울 시립미술관에서의 프로젝트가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과 일본의 끈질긴 과거를 소환하는 작업으로 이어졌고 북경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천연당사진관”의 컨셉을 재현했다.

시간성을 넘어 장소성에 무게 중심을 두는 본격적인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하고 있는 “DMZ” 작업이다. 휴전선을 따라 동서를 연결하는 13개의 선전촌 마을과 남북 군사 경계선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에 관한 사진관 아카이브 프로젝트로서 전쟁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업이다. 작가는 그들의 가족사진을 통해 그들의 기억을 추적하며 전쟁과 분단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가장 최근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작업을 진행했다. DMZ와 마찬가지로 경계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한 가족을 통해서 펼쳐 보이는데 그들의 오래된 가족사진을 구하고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구성하고 영상 인터뷰를 진행한다. 그는 삼각대를 받치고 대형 카메라로 매우 정교하게 찍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근대의 역사성과 장소, 특정한 장소에 대한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데, 압록강과 두만강 다음으로는 연변에서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국경을 넘어 연변으로 간 사람들 중에는 7, 80년이 넘는 동안 대대로 물려받은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집과 가족, 집기와 물건들을 작업화하는 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적 현재, 과거의 시간성을 어떻게 현재로 가져다놓느냐의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 구상 중인 대형 프로젝트의 제목은 ‘항해’입니다. 그에 비하면 압록강과 두만강은 소항해인 셈이지요. 본격적인 나의 항해는 프랑스 낭트에서 시작하여 지중해를 건너 리비아와 사우디아라비아, 인도양을 지나 베트남과 동지나해, 거제도, 흥남, 그리고 압록강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경로입니다.”


물론 단순한 항해가 아니다. 프랑스 낭트는 우리나라에 제철 산업을 빼앗긴 후 폐허의 도시로 변해가다가 도시 재생을 통해 다시 살아난 도시이고 리비아의 대수로 공사와 사우디의 건설 공사 등은 우리의 땀의 흔적이 역력한 곳이다. 그는 항해를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를 돌아보고 상기하고 싶은 것이다.
 


꿈꾸는 역사, 홀로그램 설치, 1999 ⓒ이주용



사물과 기억을 기록하다, 2013, 홀로그램 설치


작업이 삶의 태도까지 바꿔

“5년 전부터 집중해서 진지하게 작업을 하다 보니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고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어요. 한평생을 살면서 어떤 목표를 갖고 살 것인가 고민하는 치열한 작가들이 많은데 나는 그리 했는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주용은 작업을 통하여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게 되더라고 말했다. 지난가을 대구 비엔날레에서 발표한 “유예된 시간을 기념하며”는 그런 변화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DMZ” 작업을 열심히 진행하던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철원에서 3년간,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로 1년간, 모두 4년 동안 전쟁의 일선에 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고 고백했다. 그동안 아버지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려하지 않았음의 반증이다. “오늘은 좀 들어드려야지”라고 했다가도 몇 마디 나누지 않아서 벌써 짜증을 내며 서둘러 자리를 파했던 그가 비로소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된 것. 그것이 “유예된 시간을 기념하며”로 나타나서 근현대를 살아낸 나의 가족, 우리 민족의 이야기로 확장되었다.

요즘 그는 천연당사진관을 개설했던 대한제국의 서화가 김규진을 애정하고 있다. 그의 손에 들어온 김규진의 금강산 그림첩을 보면서 김규진과 금강산, 그리고 서울역을 연계하는 작업을 생각하며 열심히 리서치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 영친왕의 서필을 지도하던 스승이었던 김규진은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만능의 매력을 갖고 있는 그 시대의 진정한 예술인이라고 한다. 그는 그 시대 김규진이 금강산으로 가던 루트를 따라 금강산에 가서 금강산을 배경으로 김규진의 기억을 환기하는 작업을 시행해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단서만 습득하게 되면 그것을 집요하게 파헤쳐 기억을 좇아 시간여행을 하는 이주용의 작업은 곰곰 생각해보면 결국은 사진의 근원에 대한 탐구인 것 같다. 사진 자체가 시간성과 장소성을 떠나 존립할 수 없는 매체이니 시간과 장소성에 천착해온 그의 작업은 사진의 본질, 사진의 원형을 찾아다닌 셈이다.

그의 작업이 지금은 압록강과 두만강에 머물고 있지만 곧 소항해를 끝내고 대항해에 돌입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를 횡으로 도는 이 항해는 멀고 먼 길을 돌아 그의 작업으로 회귀하기 위한 전 단계일 뿐이다. 그가 의미 있는 장소에서 많은 기억들을 꺼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긴다면 그의 과거에 대한 소환이 미래로 연결되는 통시적인 거대한 시간의 항해가 될 것이다.

옛사람들은 ‘수집’을 예술을 아는 마지막 경지라 했다. 조선 정조시대 학자 유한준은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으로 감상하게 되며 감상하다 보면 수집하게 되니 수집은 그냥 쌓아두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주용은 수집한 것들을 그냥 쌓아두지 않고 작업화하고 있으니 가장 높은 예술의 경지를 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19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