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길을 간다, 육명심

사진가 육명심, 그의 사진 작업이 반세기를 훌쩍 넘겼다. 본격적으로 사진의 길로 들어선 1966년 이후 50여 년 동안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작가의 한 마디는 ‘남이 가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다. 예술이란 창조여야 한다는 신념과 남이 하는 것은 결코 따라 하지 않겠다는 자존심이 긴 세월 그의 행보를 흐트러짐 없이 수미일관하게 해주었다. 인터뷰 내내 동서양의 철학과 문학을 넘나드는 깊은 대화를 들으며 그의 해박한 지식과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이야말로 육명심 사진의 근간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이건 아니다.”
성급하게 결론부터 말한다면 필자 개인적으로는 육명심(1932~) 교수만큼 본질을 꿰뚫는 능력이 출중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벌써 40년 가깝게 뵙고 있지만 만날 때마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안목에 놀라고 감탄하곤 한다. 지식을 많이 갖고 있어도 지혜가 부족하거나 타고난 지혜에도 불구하고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을 수가 있다. 지식은 후천적인 배움의 결과지만 지혜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자질이어서 사실 지식과 지혜를 겸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육 교수는 출발부터 축복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듯이 그의 출발은 세속적으로 말하는 축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출가(出家)한 스님 아버지는 살아생전 아들 앞에 모습을 비춘 적이 없고 호구지책으로 행상에 나선 어머니 밑에서 지독하게 가난하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런 평범치 않은 환경이 그의 명석함을 오히려 더 일찍 촉발시킨 듯하다. 그는 일곱 살 때 동네 형들을 따라 처음 올라가 본 동네 뒷산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깨달았다고 회고한다. 항상 자신의 눈높이에서 보아왔던 자신의 집이 산에 올라 내려다보니 전혀 다른 공간감을 준다는 것을. 이런 조숙한 깨달음은 그가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서 있는 위치와 관점에 따라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를 미리 터득케 해준 것이었고, 세상살이에서만이 아니라 사진을 하면서도 어떻게 바라보고 접근할 것인지를 알게 해준 막연하지만 놀라운 체험이었다.

이렇게 남달랐던 아이는 지금의 중학교 1학년에 해당하는 사범학교 1학년 때에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접한 『청록집』이란 시집에서 박목월 시인에게 정신을 빼앗겼고, 3학년 때에는 날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국악을 들으며 우리의 전통적인 소리에 푹 빠지는 남다른 청소년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는 동양 사상에 심취하여 공자 노자 장자의 철학에 흠뻑 젖었고, 판소리와 민요 탈춤 연극 등에 심취하며 메마른 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훗날 예술가로서 삶에 필요한 자양분을 흠뻑 빨아들였다.
그리고 1964년에 처음으로 카메라를 갖게 되면서 6개월 후 촬영 대회라는 곳을 가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알아버렸다고 한다. “이건 아니다.”라고.

 

“촬영 대회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이 모델을 향해 카메라를 일제히 들이대는데 모두들 비슷한 시각인 거예요. 나도 처음엔 얼떨결에 분위기에 휩쓸려 서너 번 셔터를 눌렀어요.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생각했어요. 난 남들과 같은 걸 찍지 않겠다고, 남과 같다면 굳이 내가 찍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하고.”


일곱 살 때 이미 평지에서 보는 세상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이 다름을 알아버린 경험은 카메라를 잡은 지 6개월 된 사진 초보자에게 또다시 발동, 앞으로 그가 사진의 길을 걷는 데에 중요한 단초가 된다.
 


미당 서정주 시인. 그는 예술가를 촬영하면서 오히려 평범한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찍는 방법을 택했다.  문인의 초상 ⓒ육명심



중학교 1학년 때 청록집이란 시집에서 그를 매료시켰던 박목월 시인.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소년은 사진가가 되어 대시인을 촬영했다.  문인의 초상 ⓒ육명심


문인의 초상
대전에서 영어 교사로 사진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던 1966년에 그는 서울 배재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발령을 받는다. 사진가로서 본격적으로 중앙 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다. 그러나 그는 곧 당시 60년대를 이끌던 리얼리즘 사진의 대세에서 이탈하여 색다른 시각 이미지를 만드는 소위 ‘영상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무리에서 이탈하여 외톨이를 자처하며 고독을 즐기는 그의 성향을 유감없이 발휘, 사진의 정석에서 벗어난 표현을 구사하면서 상상력을 유발하는 모호한 이미지를 즐긴 것이다. 5년여에 걸친 그런 이미지 실험은 1972년에 서라벌예대 사진과에 강의를 나가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서라벌예대에 가니 거기 내가 흠모했던 청록파 박목월 시인과 서정주 시인 등 유명한 예술가들이 계신 게 아니겠어요? 그분들과 교수 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에 마음이 설렜어요. 그런 와중에 사진과 학생들이 타 분야 예술학과에 대해 잔뜩 기죽어 있는 모습을 보며 뭔가 행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된 것이 문인의 초상이었어요.”


타 분야 예술가들의 사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바꿔주고 싶은 오기가 작동하면서 문인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는 것. 물론 이 바탕에는 10대 시절부터 탐닉해온 시와 문학의 섭렵이 있었고, 나중에 예술가의 초상으로 확대되면서 그간 자신의 마음 한쪽에 잠재해 있던 열등감까지 날려버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어떤 분야의 예술가를 만나든지 그들과 동등하게, 때로는 그들도 미처 생각지 못한 색다른 견해를 내놓는 사진가의 모습은 그들로서도 놀라웠을지 모른다. 일가를 이룬 수십, 수백 명의 예술가를 차례로 만나면서 마치 강호를 떠도는 이름 모를 검객이 무림의 고수들을 차례로 격파하듯이 카메라 한 대를 메고 예술의 고수들을 만났다. 그리고 벴다. 사진에 대한 그들의 편견과 그 자신이 무의식 속에 갖고 있던 미묘한 열등감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카메라 앞에 예술가 대신 이 땅의 기층민, 이름 없는 사람들이 서게 되고 그것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백민시리즈”로 발전한다. 이름 석 자를 대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인이 아니라 내놓을 만한 그 무엇이 없이, 그러나 이 땅에서 잡초처럼 끈질기게 이 땅을 지키며 살아온 벼슬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백민’들을 찍기 시작하면서 사진가 육명심의 진가가 백분 발휘되고 한편으로는 그의 사진 철학, 그가 사진으로 말하고자 했고 의도했던 사진 정신이 완성되기 시작한다.

 


백민 ⓒ육명심



백민 ⓒ육명심


이 땅에 사는 기층민, 백민
그는 최익현 선생의 “공자의 조선이냐, 조선의 공자냐”라는 비판을 패러디한다면 가령 “한국의 ‘베허’냐, ‘베허’의 한국이냐”라고 되묻고 싶다고 말한다. 물론 따옴표 속 이름이 독일의 사진가 베허가 아니라 프랑스의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일 수도, 미국의 안셀 아담스일 수도 있다. 가장 독일적인 것을, 가장 프랑스적인 것, 가장 미국적인 것을 보여준 그들처럼 우리도 이제 우리 것을 찍고 우리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는가, 라는 반성을 기반으로 ‘백민’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가장 육명심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 되었다. 이미 10대 시절부터 국악을 비롯해 우리의 것을 사랑하고 공부해온 그의 지식과 정서가 그대로 사진에 배어들면서 우리 고유의 정신과 감정을 풀어낸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1978년부터 백민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80년대에 들어서자 빠르게 사라지는 우리의 것이 내가 안 찍으면 그대로 놓치겠다는 조바심이 들더라고요. 집은 사라지면 다시 지을 수 있지만, 사람은 죽으면 다시 찍을 수 없잖아요.”


그가 전국적으로 가장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얼굴을 가진 이들을 만나 사진으로 기록하게 된 이유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는 스님도 있고 무당도 있고 장돌뱅이도 있다. 이름은 없을망정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거나 진솔하게 살아온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사람들을 그의 카메라는 놓치지 않았다.
 

“조선 500년의 그림을 보세요. 중국의 회화에서 벗어나지 못했잖아요. 그러나 겸재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의 풍경이 나오고 신윤복의 그림을 보면 우리의 몸짓이 있고 우리의 삶이 녹아 있어요.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진술은 서양에서 들어왔지만, 외국의 사진을 상대로 우리의 것을 작업하여 보여줘야 한다는 자각을 하면서 백민이 장승으로, 검은 모살뜸으로 발전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장승은 백민의 얼굴이고 검은 모살뜸 역시 백민의 얼굴이며 삶의 모습이다. 80년대와 90년대에 백민과 장승 작업을 집중적으로 해온 그는 90년대 후반에 서울예술대학에서 정년 퇴임하면서 또 한 번의 새로운 계기를 만든다. 사실 체질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걸 좋아하고 즐겼던 그는 교육자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면서 작가로서는 날개를 단다. 88세인 지금도 강의를 시작하면 점점 눈빛이 반짝이면서 핵심을 콕 찌르는 열변을 쏟아내는 그는 학교를 벗어나면서 그 열정을 오로지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백민을 만나기도 어려워져가는 즈음에 그는 ‘우리’의 범위를 내 나라에서 ‘동양’으로 넓히기 시작했다.
 


검은 모살뜸 ⓒ육명심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면 동양과 서양, 자연과 과학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가 향한 곳은 동양과 자연이었다. 서양의 과학 문물의 발달로 자연이 소외되고 동양이 가려지고 만 현대에 가장 마지막으로 남은 순수한 것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찾아간 곳이 티베트였다. 90년대 중반에도 이미 그곳 역시 자연의 파괴가 진행되고 있긴 했지만 아직은 순수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문제는 수없이 많은 사진가들과 관광객들이 그곳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육명심의 사진이 어떻게 차별화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가 택한 것은 관광객의 눈에 신기하게 보이는 특이한 것을 찍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티베트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일상성을 찍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열 번 넘게 그곳을 다녀오면서 어쩌면 우리의 원형 같기도 한, 바로 우리의 백민 같은 티베트 사람들을 찍었다.

사실, 작가에게 티베트는 그것 말고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서방의 극락정토를 꿈꾼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만나러 간 그리움의 발로이기도 했다. 부모도 아내도 자식도 떠날 수 있게 만든 아버지의 그 무엇을 가슴으로 시리게 느껴보고자 한 내심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그가 한줄기 바람으로라도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는지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그 답은 그의 사진 속에서 찾아볼 일이다.

그는 티베트를 찍은 사진집의 제목을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라고 붙였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라면 가장 높은 곳이면서 가장 낮은 곳이 아니겠는가. 땅으로서는 가장 높고 하늘로서는 가장 낮은, 그래서 하늘과 땅이 만날 수 있음이니 그곳은 땅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아니 땅이면서 하늘인 곳이리라. 아마도 그의 아버지가 꿈꾸었고 이제는 아들인 육명심, 그가 꿈꾸는 세계일 것이다. 그가 앞으로는 불교사진을 찍고 싶다 하는 속뜻도 종교적인 의미의 불교사진이 아니라 하늘이기도 하고 땅이기도 한 그런 세계를 찍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만약 사진가가 아니었다면 스님이나 수사가 되었을 것이라는 그의 말을 들어봐도 그가 앞으로 불교사진을 찍고 싶다는 말은 참으로 자연스럽게 들린다.

 


장승 ⓒ육명심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육명심


처음과 끝이 같은
1964년 처음 촬영 대회로부터 티베트까지 자신의 길을 개척해 그 길을 걸어온 사진가 육명심. 인터뷰가 서너 시간 지속되어도 피곤한 기색은커녕 오히려 눈빛이 더 밝게 빛나며 시종일관 논리의 끈을 놓치지 않는 모습에서 88세 미수라는 숫자가 무색해진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볼 때,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참 행운’이었다고 말하는 육명심 교수는 사실 오랜 교직 생활에서 많은 학생들, 제자 사진가들에게 주요한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꼭 필요한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올가을에 백민사진집 완결편을 출간할 계획인 그가 제자들에게 항상 강조한 말이 있다. 남의 장단에 춤추지 말라는 것이다. 내 장단을 갖고 내 장단에 춤을 출 때 가장 나다운 모습이 나올 것이다. 그는 일찍이 그것을 알고 그것을 실천해온 처음과 끝이 같은 사진가이다.

 


육명심 작가 ⓒ김녕만
 

 
 
글 :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19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