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남아 역사가 되다 ⑩ : 십만명의 피란민 목숨을 구한 흥남 철수작전



1950년 12월, 남으로 피란하기 위해 흥남항으로 몰려든 북한지역의 주민들은 16시간에 걸쳐 군함선과 민간선박에 탑승했다.
선박의 시동이 내뿜는 연기 속에서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국군이 북진할 때에 북한주민들이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들고
환영하였던 것처럼, 그들은 태극기를 잊지 않고 있었다. APA 6척, LST 81척, LSD 11척을 비롯하여 민간선박까지 흥남철수작전에
동원된 선박이 총 193척에 이른다. 군인과 피란민 20여 만명이 기적의 탈출을 하였다. NARA소장 (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51년 1월초, 강릉 외곽의 눈 덮인 산길을 타고 남으로 향하는 피란민 대열. NARA소장 (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세계 전사상 가장 인도주의적인 작전으로 기록된 흥남철수작전은 피란민 10만명의 목숨을 구한 명예로운 후퇴였다. 1950년 겨울, 미군 철수 소식을 들은 북한 지역의 주민들은 남으로 피란하기 위해 흥남항으로 몰려들었다. 흥남항에는 이미 민간인 배들이 남으로 떠난 뒤였고 군인들을 싣고 갈 군 수송 함선만이 가득차 있었다. 미군은 막대한 양의 군장비를 함선에서 내리고 인근 지역의 대형 상선까지 불러 약 10만명의 피란민을 태워 피란시키는 감동의 철수작전을 펼쳤다. 12월 24일 흥남 탈출 작전이 완료되면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 제10군단은 흥남 지구에서 고립되었고, 원산도 점령되어 육로를 통한 퇴로는 이미 막힌 상황이었다. 남은 길은 뱃길뿐. 미군 8만 여명, 한국군 2만 여명 총 10만5천명이 철수해야했고 17,500 대의 군용차량과 35만톤의 막대한 군수물자를 옮겨야 했다. 미군 철수에 인근 주민들은 동요하였고 한달전 미군과 국군을 환영했던 사람들은 이제 공산당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흥남항으로 몰려든 관북지방의 피란민들의 대부분은 기독교인과 국군 및 유엔군에 협력한 자 등으로 현지에 남겨졌을 경우 많은 인명 피해가 예상되었다. 그들은 살기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어떻게든 배를 탈 수 있으라는 희망을 안고서 흥남부두로 향했다. 그러나 미군의 철수계획에 피란민 수송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철수작전 초기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병력과 물자의 이송을 최우선으로 할 것을 명령”하였지만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인 현봉학박사와 10군단 부참모장인 에드워드 포니 대령이 알몬드 장군을 설득하였다. 현박사는 “피란민들은 공산주의자에 대항하여 유엔군을 도와주었습니다. 군대편의를 이유로 그들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고 주장하였고 포니 대령은 군장비를 실어도 LST 여유 공간에 피란민 수천명이 탈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우리 국군도 미군을 설득했다. 국군1단장 김백일장군은 “만약 피란민들을 배에 태워주지 않는다면 우리 국군은 피란민과 함께 육로로 38도선을 돌파해 가겠소”라며 결연한 의지를 피력했고 손원일 해군총참모장은 “민간 선박이든 뭐든 동원할 수 있는 선박을 다 동원해 흥남으로 보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하도록 하라”고 독려했다. 마침내 알몬드 장군은 12월 14일에 피란민 구출을 결정하게 된다. APA 6척, LST 81척, LSD 11척 등 흥남철수작전에 동원된 선박이 총 193척에 이른다. 목숨을 건 필사의 대탈출로, 배 1척에 적어도 수천명에서 만명이 넘는 피란민이 올라탔다.

특히 유류공급을 위해 흥남에 정박한 약 7600톤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얽힌 일화가 유명하다. 레너드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눈에 보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태워라”고 명령했다. 미군은 겨우 실어놓은 무기와 물자를 내리기 시작했고 피란민들도 자신의 짐을 바다에 버리고 많은 동포들이 탑승하도록 도왔다. 빅토리호는 정원 60명중 승조원을 제외하고 남은 자리는 고작 13명뿐 이었지만 배에 실었던 군수물자 25만톤 등 최대한 많은 것을 버렸기에 정원 60명의 230배가 넘는 14,000명을 태울 수 있었다. 이들을 태우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16시간이었다고 한다.

미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작전 때보다 더 많은 함포사격과 항공폭격을 하면서 피란민들의 탑승이 완료될 때까지 중공군과 북한군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마지막 배가 무사히 항구를 벗어나자 항구의 기반시설과 피란민들 대신 남겨둔, 보급물자와 장비들을 적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폭파시켰다.

2017년 6월 23일 국군·유엔군 참전 유공자 위로연에서 문재인대통령은 “흥남에서 피란온 피란민의 아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서 이 자리에......”라고 말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와 누나가 있었다고 한다. 만약 빅토리호가 없었다면, 만약 흥남탈출작전에서 피란민을 끝내 제외시켰다면, 우리에게 지금의 대통령 또한 없었을 것이다.

 

글 이기명 (발행인 겸 편집인)
해당 기사는 2017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