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수│사진가로 산다는 것


브롬톤 자전거와 16×20카메라, 파주


 

랜드스케이프 촬영, 파주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작업실 내부
 

직진하는 정신
구성수 작가(1970~)를 만나 7시간가량 인터뷰가 이어졌다. 한때의 젊은 작가에서 이제 산전수전 다 겪은 50대 작가에 이르고 보니 이야기가 작업에만 머물지 않고 인생철학으로 확장 되었기 때문이다. 1998년, 스물아홉에 당시 월간 『사진예술』에 서 선정한 ‘젊은 사진가상’을 수상, 촉망받는 사진가로서 인터뷰를 한 후 25년이 흘렀다.
그는 사진의 시작도 빨랐고 일찍 주목을 받았다. 대구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사진반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교내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 사진반 동아리를 담당했던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사진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1989년에 대학 새내기 이후 2004년에 홍익대 박사과정을 수료하기까지 무려 15년을 학교에 적을 두었다.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학업과 작업을 병행했던 것.

“고등학교 시절이었어요. 외사촌 형이 중동에서 귀국하면 서 사온 카메라를 생전 처음 들여다보다가 렌즈를 통해 초점 이 딱 맞는 순간, 숨이 멎는 느낌이었어요. 그때부터 렌즈를 통 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아직도 초점이 딱 맞는 그 순간에 전율을 느낍니다.”

그 순간의 느낌과 전율을 기억하는 그는 그때 이미 사진과 운명적으로 맺어졌다고 말한다. 평생 사진가로 살 것을 희망했 던 그는 끝까지 사진을 하려면 사진을 이해해 줄 사람을 만나야 된다고 생각했고, 그의 바람대로 사진학과 동문인 아내를 얻었다. 처음 사진학과에 같이 입학했던 동기생이 80명이었지 만 불과 한 두 명 정도만 사진으로 살아남은 것을 보더라도 그는 자신의 선택이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장인어른이 둘째딸인 처제의 남편감으로 내세운 유일한 조건이 뭔지 아세요? 사진하는 놈만 아니면 된대요.”

우리는 이야기 내내 이런 식 농담으로 유쾌하게 웃었다. 전업 작가로서 쉽지 않았을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그런 현실을 극복해낸 그의 솔직한 화법이 구성수의 유머를 공감하게 했다. 1992년, 그는 대학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서울 한마당갤러 리에서 연탄공장 마을을 찍은 사진 <반야월>로 개인전을 가졌는데 이 일은 앞으로 전개될 사진가 구성수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예고편 같다. 당시 한마당 전시장 대관료가 40만원이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학생으로서 엄청 큰돈을 몽땅 털어 연고가 없는 낯선 서울에 올라와 개인전을 가진 결단은 용감해 보이기도 하고 사진에 전부를 거는 행위로 보이기도 하는데, 직진하는 정신은 그로부터 30년간 그를 작가로 지탱해준 힘이었다.


 

구성수 작가의 작업실에 있는 각종 공구들

 
 

구성수 작가는 자신이 사용할 액자를 직접 만든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
그의 대담한 첫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한마당 갤러리 개인전을 연 다음해인 1993년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중앙대 대학원에 입학했고 “서울에서 산다는 것”이란 그의 작품 제목처럼 서울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98년에는 앞서 말한 ‘젊은 사진가상’을 받으면서 인사동 인데코 화랑에서 수상 기 념 초대전을 갖는 등 20대에 작가로서 그는 남보다 빨리 선두에 섰다.

“배움에 목이 말랐던 것 같아요. 뭔가 더 확실하고 깊이 있 게 알고 싶고 그런 걸 바탕으로 작업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거든요. 제대로 알고 싶다는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서 오래 학교에 적을 두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 다니던 2001년에는 대형카메라로 <서른 살 아내>를 작업했고 2004년부터는 폐교가 된 <한알고등학교>시리즈를 통해 시공간의 문화사를 보여주는 작업과 한국적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시리즈를 시작했다. 특히 <서른 살 아내>와 는 각각 미국의 폴 게티(Getty)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모마,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 등에서 전시 를 하고 작품이 소장되는 등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 가운데 는 한국적 미의식을 보여주며 매우 큰 주 목을 받았다. 흔히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라고 하듯이 실제가 마술보다 더 환상적인 장면이 담긴 이 시리즈는 오늘날 한국 풍경의 단면을 보여준다.

“서울예술대학에 강의를 나갈 때였어요. 주말에는 관광버 스로 변신하는 학교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어느 날 버스에서 내리면서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어요. 모두 다 내린 텅 빈 버스 에서 갑자기 쾅 하고 오는 미묘한 느낌이 있었어요.”

그 전에도 그는 캄보디아에 갔다가 신촌이라고 쓰인 1009번 버스를 발견하고 묘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차피 한글을 모르니까 폐차된 시내버스를 들여다가 글씨를 지우지도 않고 운영하고 있었던 것. 그런데 한쪽에선 ‘오 필승 코리아’라고 쓰인 빨간 티셔츠를 입은 아이들이 “1달러”를 외치며 구걸하고 있었다. 동시대의 문화지형도를 읽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사회적 풍경은 무엇인가? 문득 관광버스를 통해 그 의문에 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시리즈 가운데 ‘관광버스’는 원색적이면서 화려한 컬러가 주는 비현실적인 느낌과 좌우 대칭으로 현실적이지 않게 멀어 보이는 원근감, 아무도 없이 침묵이 감돌지만 곧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기이한 공간감 등 현실감 없는 현 실이 오히려 낯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으로 바라본 한국의 풍경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 그는 엉뚱하면서도 기이한, 화려하면서도 촌스럽고 원색적인 풍경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네가 거기서 왜 나와?”라는 유행어가 딱 들어맞는 21세기 한국의 풍경은 헛웃음을 나오게 하는 허상 같은 실상이다. 모텔이나 결혼식장 건물 같은 곳에 들어선 서양의 조형물을 베낀 이상한 조형물들은 어이가 없고 민망한 풍경이면서 또한 그 의식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사막의 신기루가 간절히 원하는 열망에서 나타나는 착각 이라면 화려하고 이국적이며 생경하고 조잡한 조형물들은 어 떤 의식의 산물일까. 많은 질문을 품은 그의 작품은 그가 오랜 이론공부를 작업에 연결시키고자 했던 뜻을 마침내 구체화한 결과물이었다.


 

from the series of photogenic drawing, 금매화, 1650×2200mm, inkjet print, 2011 ⓒ구성수

 

도봉구 창동에 위치한 와인카페 ‘매그넘’ 내부.
그는 아내와 함께 2018년부터 카페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인테리어도 직접 했다고 한다.
작가의 작품이 곳곳에 걸려 있어 전시장 분위기를 풍긴다.


 

작가가 암실작업을 한 은염프린트를 보여주고 있다.

 
꽃을 피우다
대형카메라로 스트레이트하게 사진을 찍던 구성수 작가의 새로운 탐구가 시작되었다. <포토제닉 드로잉>시리즈다. 다큐 멘터리 사진을 발표해온 그가 40대에 꽃 사진을 들고 나오니 처음엔 소재가 ‘꽃’이라는 점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그 ‘꽃’의 속내를 알고 나선 ‘구성수 답다’는 평가를 불러왔다.
작가가 세계 최초의 새로운 식물도감에 도전한다는 개념으 로 작업한 “포토제닉 드로잉”은 사진 회화 조각의 삼위일체를 통해 탄생했다. 꽃을 찰흙에 넣어 누른 후 석고를 부어 양각으로 만들어 그것에 색칠을 한 후에 사진을 찍는 방식의 작업이었다. 이렇게 여러 과정을 거치는 동안 작가는 더 세심하게 대상에 개입할 수 있고 최종적으로 그림도 조각도 아닌 사진이 만들어진다. 그렇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일본을 만들어 그 것을 다시 사진의 속성인 여러 장의 에디션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장르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꽃 사진을 찍지 않느냐는 물음은 의미가 없다. 과정을 품고 있는 최종 결과물은 스트레이트하게 촬영한 사진과는 다른 ‘꽃의 초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꽃 사진을 넘어선 그의 시도는 요즘말로 ‘대박’이었다. 마치 목욕을 방금 끝낸 아이처럼 해맑고 청초한 꽃의 초상은 단숨에 눈길을 끌었고 그로 인해 작가는 그전의 20년 작업을 능가하는 주목을 받았다. 말 그대로 작가로서 화려한 꽃을 피 운 것이다. 그즈음에 그는 지금의 작업실에 자리를 잡았다. 12년 전 일이다



 

작업실 안에는 소품 촬영이 가능한 스튜디오 조명 시설이 갖춰져 있다. 자신의 포토제닉 드로잉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구성수 작가

 
공방 같은 작업실
구성수 작가의 작업실엔 없는 것이 없다. 서울 수유동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은 약 50평 규모인데 온갖 잡동사니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작가가 액자를 직접 제작하기 때문에 목공에 필요한 도구들과 그 밖에도 무엇이든 잘 만드는 그의 솜씨를 뒷받침할 각종 공구들이 준비되어 있다. 물론 어느 사진가의 작업실에서나 볼 수 있는 작업용 컴퓨터와 대형프린터, 각종 카메라들, 더 나아가 소품 촬영이 가능한 스튜디오 조명시설, 암실작업을 위한 확대기까지, 심지어 한쪽엔 자전거와 카누 한 척까지, 그의 다양한 관심사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는 요즘 작업실에서 석고를 떠서 문양을 넣은 하얀 석고 액자를 주로 만든다. 하얗고 클래식한 문양의 석고액자는 깔끔한 꽃 사진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데, 작품과 가장 잘 어울리는 액자로 마무리하고 싶어서 시작한 액자 만들기 경력이 10 년을 훌쩍 넘었다. 그뿐만 아니라 20x24인치 카메라도 직접 만들고 있었다. 렌즈는 기존의 것을 활용하겠지만 대형카메라를 통해 디테일의 깊이를 최대한 살리는 실험을 해보기 위해 제작 중이라고 했다.
“기술이 축적되니까 철학이 따라와요.”
그는 지금도 기술을 연마하고 연구하는 데 열심이다. 해외 컬렉션을 여러 번 경험하면서 기술적인 완성도와 완벽한 마무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체험했다는 것. 사진의 내용적 측면이야 당연히 작품성을 갖추고 있는게 기본인데 그 이상으로 형식적 완벽함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 50대에 이른 작가는 10년 전에 찍은 인물 100명을 다시 만나 사진을 찍는 프로젝트를 새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10년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듣고 영상을 만들었는데, 지금 다시 그들을 만나 그때의 꿈이 아직도 유효한지, 꿈을 이루어가고 있는 중 인지 묻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것. 사진은 시간이 지나면 힘을 받으니 그걸 믿고 해보려고 한다고 했다. 당시 풋풋한 19살 남녀 고등학교 졸업생을 야외에서 조명을 주어 촬영했는데, 1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사회인이 된 그들의 인물사진을 다시 찍는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작가 자신도 궁금하다고 했다.
한때는 이론과 철학을 바탕으로 한 사진에 집착했지만 이젠 ‘쉬운 사진’을 찍으려 한다는 구성수 작가. 카메라를 들고 다시 거리로 나가려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데 사실 쉬운 사진을 찍는다는 게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지나친 의미부여나 거창한 철학을 주입하려고 하지 않는, 누구나 보면 그냥 이해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사진을 추구하겠다고 했다. 직진하고 도전하는 사진가로 기억되길 원한다는 구성수 작가가 내놓을 다음 사진은 무엇일지, 사진가로서 30년을 보내고 새로운 30년에 접어든 그의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3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