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호 | 밀양에서 꿈꾸는 사진천국


경남 밀양에 있는 최광호 작가의 작업실은 산과 잇닿아 있어 사계절 변화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찔레꽃 핀 뒷뜨락을 산책하는 작가.


머나먼 남쪽
여기, 밀양으로 오기까지 참으로 머나먼 길을 돌아왔다. 일본 오사카와 미국 뉴욕에서의 사진 유학, 귀국 후 30대의 열정과 패기로 똘똘 뭉쳐있던 서울 청량리 첫 작업실부터 밀양으로 오기 직전인 강원도 평창의 작업실까지 여기저기, 최광호 작가의 공간이동은 길고 험난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진에 빠져 신구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역마살은 거기까지일 줄 알았다. 그러나 일본에서 돌아오는 대신 뉴욕 행을 택했고, 뉴욕대학교에서 더 진지하게 사진을 공부하며 ‘최광호 다움’에 대한 성찰을 시작했다. 따라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 어느새 30대 중반이었다.

최광호 작가는 우리 사진계에서 참 독특한 존재다. 대부분의 작가가 훌륭한 예술작품 창작이 최우선 목표일 때 그는 ‘사진’을 도구로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자신의 성찰을 통해 삶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다시 말해 사진에 진심이되 자신의 삶에 더욱 진심인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는 특별히 어떤 장소에 가서 좋은 시간대를 택해서 사진을 찍는다기보다 아침에 눈 뜨면 한밤중 잠이 들 때까지 언제 어디서나 숨을 쉬듯이 끊임없이 사진을 찍는다. 그의 곁에 있으면 심장의 맥박소리처럼 카메라의 셔터 음이 계속 들려온다. 심장소리가 살아 있음의 징표라면 그에겐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그의 존재함을 확인하는 신호인 것 같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그의 카메라가 기록하면서 그의 일상이, 그의 삶이 일기처럼 사진에 남는다.

최광호 작가는 가까운 일상에서 작업을 끌어내기 때문에 그에게는 작업과 공간과의 관계가 상당히 밀접하다. 귀국하여 처음으로 청량리에 작업실을 냈을 때는 사회와 사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 故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삼선교 집을 작업실로 빌려서 쓸 때는 예술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돌아와 소위 청량리588로 통칭되는 동네에 지인의 주선으로 판을 벌이자 당시에 친분 있는 유명 연예인들이 들락거리고 작품을 한다고 하니 동네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작가 또한 그 거리를 오가며 일반인들과 다른 삶을 목격하게 되면서 사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 그는 그때 사람의 속을 알고 싶다는 생각에 밑에서 조명을 쓴 사람사진을 시도하기도 했다.

청량리에서 삼선교로 옮긴 두 번째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초기작품이었다. 돔 형태의 집이었는데 빛을 따라 창문이 나 있어 하루 종일 아침햇살부터 저녁햇살까지 방과 복도를 비췄는데, 그곳에서 그는 김수근 선생이 빛을 소중히 했음을 공감하면서 ‘예술이 이렇게 아름답구나!’를 느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 집에서 가난한 사진가가 3, 4년간 살아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생활과 예술의 불일치랄까, 집으로 살기엔 거북하고 불편한, 즉 일상에서 빗겨간 집이라는 아이러니 덕분이었다.


 


제자들과 함께 책 보고 공부하는 스터디 룸


대규모 작업도 가능케 하는 암실에서 딸과 함께 선 작가.


주로 그림을 그리는 공간으로 사용하는 작업실 내부. 그의 그림에선 원초적인 생명력이 감지된다.


삶과 사진의 일치
40대 중반, 상계동으로 작업실을 옮긴 작가는 본격적으로 최광호 다움의 본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작가 스스로 ‘뜨거운 시절’이었다고 표현하는 그때, 그는 포토그램 작업을 통하여 사진과 삶의 본질을 묻는 작업을 진행했다. 사진의 대상을 포토그램으로 재현해냄으로써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사진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대상 자체의 본질을 보여주고자 했다. 감광지에 인화되는 대상도 자신의 몸, 또는 일용하는 양식, 주변의 별거 아닌 식물이나 오브제 등이었다. 어쩌면 최광호를 존재하게 하는 모든 것, 이 세상과 우주까지라도 포토그램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상계동 시절부터 최광호 팬덤fandom 현상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대학에 강의를 나가던 그 시절부터 제자들과 함께 일심동체가 되어 열정적으로 작업하는 그의 순수함이 자연스럽게 그의 추종자를 만든 것 같다. 당시에 제자들과 밀착하여 사진으로 함께 호흡하고 꿈을 꾸는 그를 보며 주변에선 작가로서 귀한 재능과 시간을 너무 제자들에게 소진한다며 우려했지만 그의 열정적인 가르침, 아니 스스로 깨닫게 하고 자기 자신도 깨달아가는 동행은 멈추지 않았고, 이 시기를 거치면서 그에겐 ‘사진’과 함께 ‘사람’이 남았다.

그 이후 부천 작업실은 대규모 작업을 하기에 알맞은 규모였고 이때부터 그의 작품 사이즈도 대형화 되는 변화를 보였다. 작업실이 커지니까 작품이 커진 것인데 원 없이 롤지 작업을 하며 엑기스를 뿜어냈다. 이렇게 매 시기마다 주어진 공간에서 가능한 작업을 열성적으로 펼쳐온 그는 강원도 평창의 폐교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자연이 스승’임을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을 사진에 담았다. 봄이면 운동장 목련나무가 하얀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운동장을 지배하는 풀들과 그 사이를 비집고 피어나는 흔하디흔한 야생화들, 학교 옆 냇가에선 맑은 물이 흐르고, 그는 아침마다 새의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그렇게 10년을 살면서 작가는 알았다. “이젠 도저히 도시로 가서 살지는 못하겠구나.”

어쩌면 평창에서의 11년은 밀양으로 오기 위한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와의 오랜 인연으로 청량리, 상계동, 부천, 평창 작업실을 찾아다녔지만 이번에 밀양에 오면서 지금까지의 작업실 가운데 가장 자연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오는 오지여서 만약 평창 경력이 없었다면 작가가 과연 이곳으로 올 결심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밀양시청에서 15km 정도 달리던 국도에서 벗어나 다시 좌로 우로 수 킬로미터 구불거리는 시골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휙 꺾어진 좁은 산길로 들어서서 수백 미터를 더 들어가 그 길의 끄트머리, 산기슭에 기대어 앉은 땅에 그의 작업실의 노란 지붕이 나타났다. 어쩌면 50년을 사진가로 살아온 삶과 작업이, 그의 끈질기고 오랜 역마살의 종점이 여기가 아닐까, 여기였으면 좋겠다는 예감과 바람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건물은 비닐하우스 두 동까지 모두 네 동이었다. 위에는 부엌과 사진작업을 하는 건물, 다른 하나는 그가 작업을 위해 모아둔 소품들과 책 그리고 그림도구 등이 널려있는 비닐하우스, 그 아래에는 작가의 사적공간과 여러 명이 스터디 할 수 있는 방과 암실이 있는 건물, 나머지 한 개 비닐하우스는 작품수장고다. 약 천 평에 이르는 터는 마치 처음부터 예견된 장소였던 것처럼 사진가의 공간으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처음에 이곳으로 왔을 때, 이 공간과 나의 만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어요. 그때 ‘입맞춤’이 떠올랐어요. 땅과 내가 한 몸이 되는 입맞춤!”

최근에 자주 등장하는 그의 입술작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대지와 내가 하나가 되어 교감하고 관심과 체온을 나누는 입맞춤은 마치 키스 마크처럼 그의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밀양에 온 작가의 인사라고 한다.

 



밀양 단장면 감물리에 자리 잡은 최광호 작가의 작업실은 천 평 정도의 대지에 4개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방 앞에 붙은 낙서 같은 글. 작가는 그가 밀양에 안착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여러 번 힘주어 말했다.

 

밀양에서 새로 꾸는 꿈
2020년에 밀양으로 옮겨와 생긴 가장 큰 변화는 그에게 꿈이 생겼다는 것이다.

“내가 추위를 많이 타는데, 평창은 참 추운 곳이었어요. 그러다가 따뜻한 밀양으로 오니까 1년에 두 달을 더 사는 기분이 들어요. 평창은 4월이 되어야 꽃이 피는데 밀양에선 2월에 벌써 꽃을 볼 수 있으니까요. 따뜻하니까 그런지 마음이 점점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10대 후반에 사진을 시작하여 60대 후반에 이르렀으니 그의 사진 이력이 어느새 50년에 이른다. 돌아보면 사진으로 살아남으려고 무지 애를 쓴 시간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어려울 때마다 그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평창에서 나와야 했을 때도 아무 대책이 없었던 그에게 마술처럼 나타나 도움을 준 사람들 덕분에 무사히 밀양에 자리를 잡았다.

“평생 도움을 받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젠 나도 남을 위해 사는 법을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 터를 잡은 이곳에 훗날 사진공원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어요. 평생 처음으로 무엇을 갖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밀양에 오기 전까진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사진으로 기여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나이 탓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는 평창에서 밀양까지 이사를 하면서 깨달은 ‘아, 세상일은 혼자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일련의 기적 같은 과정, 그리고 사람이 ‘전부’라는 깨달음과 무관치 않다. 사실 최광호 작가를 밀양으로 옮겨오게 한 것도 사람과의 인연이었다. 이곳을 소개한 사람도 부산의 지인이었고, 이사 비용 3천만 원이라는 견적을 받아들고 망연자실한 그를 도와 무려 27톤에 달하는 이삿짐을 옮긴이들은 바로 30년 세월을 함께 해온 상계동 시절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친구의 1톤짜리 트럭, 혹은 2톤짜리 트럭 등을 빌려서 수없이 평창과 밀양을 오가며 짐을 날랐다. 그런데 개미처럼 부지런히 들락거리며 짐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은 이가 또 한 명 있다.

“나도 틈틈이 사진을 찍고 좋아하는지라 최광호라는 이름은 당연히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제자들이 한 달 내내 부지런히 그 먼 평창을 오가며 짐을 나르는 것을 보고 ‘아, 인생을 제대로 산 사람’이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작업실 바로 아래에 사는, 지금은 최광호 작가의 동네 형님이 된 최상선 씨는 그때의 감동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우군이 되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취재하러 온 우리를 (최광호 작업실에 비하면 고대광실인) 그의 집에 초청하여 손수 드립 커피를 만들어주었다. 사람이 왜 꽃보다 아름다운지 말해주는 그곳이 이미 사진천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전혀 모르는 곳에 와서 전혀 새로운 일이 생긴다는 작가의 말이 실감이 났다.


 


밀양에 온 이후 그림에 더 취미가 붙었다는 최광호 작가는 주로 씨앗을 형상화한 동그라미를 통하여 생명의 노래를 부른다.



밀양에 온 인사로 시작했다는 입술 작업. 작업실 주변에 핀 나팔꽃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예술은 삶
예술은 삶이지 테크닉이 아니라고 말하는 최광호 작가. ‘몸에 앵(안)기는’ 게 예술이라고 강조한다. 사진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작가는 “사진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멀리 왔으니 작가와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허공과 씨앗이라는 작가의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그의 사진작품엔 허공을 배경으로 신체나 사물을 클로즈업한 사진들이 자주 눈에 띈다. 또한 그가 밀양에 와서 즐겨 그리는 그림에는 동그란 씨앗을 형상화 한 수많은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다.

씨앗은 다음 생을 이어주는 처음과 끝이다. 씨앗은 꽃이 지고 열매가 떨어져 죽으며 완성되는 것이지만 그 죽음은 곧 새로운 생명을 불러온다. 이제 작가도 사진가로서 씨앗이 되고 싶은 게 아닐까. 언젠가는 월세로 사는 지금의 작업실을 구입하여 사진공원으로 만들겠다는 엄청난(?) 꿈을 갖게 된 것도 씨앗이 되고 싶은 마음의 발로일 것 같다. 밀양의 그곳에서 그는 풍성한 열매를 꿈꾸는 씨앗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최광호(1956~ )는 강릉에서 태어나 신구대학, 오사카예술대학과 대학원,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고 1980년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에서 3년간 사진기자로 일했으며 동신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2002년 제1회 동강사진상을 수상했고, 첫 전시 <심상일기>(1977)를 시작으로 <포토그램 선물>(2007), <가족>(2008), <사진적 사색>(2010), <육갑병신>(2016), 대구 토마갤러리에서 <최광호 사진전>(2021)을 포함하여 50여회 이상 개인전을 열었다. 2022년 11월 서울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전시를 앞두고 있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22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