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남아 역사가 되다 ⑫ : 해학의 미학 그리고 생활주의 사진



(사진1) 서울 명동 1950년 촬영. 필자가 2010년 발굴하여 한국전쟁 60주년 사진집 ‘1950 0625’(지은이: 경기도.경기문화재단)에 발표했다.
Ⓒ임응식



(사진2) 서울수복. 중앙청 1950년 촬영. 중무장한 채,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국군과 달리 미군은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다.
Ⓒ임응식


장닭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 전흔으로 황량한 벌판이 된 명동 거리를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다.  갑작스런 장닭의 등장에 웃음이 절로 나며, 이 발걸음이 만드는 생명력에 위대함마저 느껴진다. (사진1)

분단과 전쟁, 그 과정에서 겪어야만 했던 갈등, 그리고 파괴와 생명 등 임응식의 사진 속에 숨겨진 해학에서 새로운 사진미학을 발견한다. 그의 사진에서 보여지는 유머는 우리민족 고유의 해학성에서 비롯되고 있다. 고대소설이나 판소리에서 억울함과 부조리를 웃음에 실어 한탄하고 비판했듯이 해학은 우리민족이 고난의 역사 속에서 그 한을 꿀꺽 삼키기 위한 한 방편이었으며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지혜였다. 결국 임응식은 한민족 고유의 전통적인 해학의 맥을 사진으로 이어 판소리와 같은 해학으로 한국전쟁의 아픈 현실을 직시하였다.

(사진2)는 서울 수복의 아이콘과 같은 사진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2주만인 1950년 9월 28일, 미군과 국군이 함께 서울에 입성했다. 폭격으로 불타서 그을음이 까맣게 낀 중앙청 건물에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임응식은 프레임 속에 대비적인 상황을 적절히 끌어들여 현실의 한 단면을 해학적으로 비판하는 특출한 카메라 아이를 보여준다. 중무장한 채,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국군과 달리 미군은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살벌한 현실을 웃음으로 감싸면서도 은근히 폐부를 찌르는 한국적 풍자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 하겠다.

광복이후 우리민족이 비극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에 사진작가들은 해방공간의 혼란한 현실이나 고통받는 민중의 삶에는 등을 돌린 채 자연 관조적인 낭만적 사진작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인즉 일제치하의 사진작가들의 작품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의 작품 활동이 일본에서 유행한 형태를 그대로 수용했고, 일제의 한국 통치 수단이었던 문화정책의 한 방법인 공모전 등에 적극 참여하였다. 공모전의 사진내용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사진작가가 찍을 수 있는 소재도 한정되어 일제가 원하는 사진을 사진작가들이 의식없이 찍어 바친 꼴이 되었다. 사실 일제강점상황에서 현실에 대한 저항사진이나 비판적인 사진작업이 거의 불가능했기에, 사진작가들은 현실과 유리된 사진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은 더 이상 사진작가들에게 현실의 외면을 용납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소수였기에 사진기자들뿐만 아니라 기성사진작가들도 종군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종군은 기존의 사진작업에 대한 회의와 함께 사회현실과 인간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동기가 되었다. 임응식은 1950년 9월 평소 친분이 있던 부산미국문화원장 유진 크네즈의 권유로 미 국무성 소속 사진반원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여 9.28 서울수복 과정을 남겼다. 미 군정청 농립부 산림국에서 문화영화 및 기록사진 촬영을 담당했던 이명동은 1950년 육군 보병 제7사단 정훈부 군속으로 종군하여 전쟁기간 동안 치열한 전투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사진기자로서 최경덕, 정도선, 최장희 등이 종군하였는데, 기자들은 국방부 정훈국에 허가를 신청하여 종군기자증을 발급받아 희망부대를 따라 개별적으로 취재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중령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았다. 정부조직 차원의 한국전쟁기록은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영업사진작가 출신인 현역군인 임인식중위가 정훈국 사진대장이 되고 최계복, 이건중, 이경모, 임윤창, 김원영, 김한영, 최원식이 함께 활약했다.  

많은 사진작가들이 한국전쟁에 종군하면서 지금까지 해온 사진의 방법론에 대한 반성이 일기 시작했다. 그결과 사회적 관심이 조금씩 성장하였고 전쟁이 할퀴고 간 사회현실을 대상으로 작품이 창작될 수 있었다. 이전의 사진들이 대부분 회화적인 사진미학에 의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사회에 대한 현실적인 의식과 함께 일상적인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진의 양식, 즉 생활주의사진이 형성되었다. 삶을 사실 그대로 찍어 거기에 내재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생의 진실을 표현하고자 한 생활주의사진은 종군사진작가였던 임응식, 이명동과 사진평론가 구왕삼이 중심이 되어 1960년대에 일으킨 사진운동이었다. 이것은 한국사진계에서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주장한 최초의 미학적 규범의 성립이었으며 이론적 배경을 가진 사진창작행위였다.
 

글 이기명 (발행인 겸 편집인)
해당 기사는 2017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