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문화유산을 새롭게 보여준다, 서헌강

“여기가 거기였어?” 그의 사진 앞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우리의 오래된 문화유적지는 한번쯤은 가봤을, 그런 곳인데도 그의 사진으로 보면 새롭고 생경하여 어리둥절해진다. 그동안 관습적으로만 인식해왔던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서헌강이라는 사진가에 의해 실감하는 순간이다. 사진가의 새로운 시각에 의지하여 바라보는 우리의 문화유산은 그동안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독특한 아우라를 풍긴다.

 


익산 - 왕궁리



궁궐 - 경복궁


‘신들의 정원’에서 노닐다
2011년, 서헌강 작가는 “신들의 정원”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열었다.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이 마음을 잡아당겼다. 사진과 제목은 일치했다. 사진 속 풍경은 충분히 신들이 노닐고 머무는 공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신비하고 아름답고 고요했다. 자세히 보기도 전에 다 안다고 생각해왔던 우리 문화유물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미지를 단숨에 깨버리는 사진가의 시도였다.

그동안 문화재에 대한 기록은 꾸준히 있어왔지만 대부분은 문화재의 증명사진이었다. 존재 증명에 그쳤을 뿐, 문화재가 함의하고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진은 드물었다. 그래서 문화재는 단지 과거의 시간대에 머물러 있는 따분한 옛이야기에 불과했다. 과거의 한 시대를 살다간 권력자의 무덤, 혹은 조상들이 남긴 흔적이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하긴 하겠지만 지금 나의 삶과는 무관한, 단절된 시공간이었다.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것이 늘 숙제였어요. 문화재를 보면서 그 속에 내재된 이야기를, 나의 시각으로 풀어내 보여주고 그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것이 우리 문화재를 촬영하는 나의 기본 태도입니다.”

서헌강 작가는 ‘이것이 무엇이다’라는 설명을 넘어서서 그것이 품고 있는 숱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내어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풍부한 서사로 다가올 수 있도록 유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마치 조선시대 왕들의 이야기가 지금도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재해석되어 영화와 드라마가 되고 뮤지컬이 되듯이 그는 사진가로서 한 장의 사진을 통하여 문화유적의 외형상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신까지 오롯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 결과, 2천년대 이후 차츰 그의 문화재 사진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어느새 독특한 문화재 전문 사진가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는데 사실, ‘문화재’라는 낱말을 지워도 충분히 독창적인 자기세계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따분한 소재일 수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이 사진가의 시각에 의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증명해보인 서헌강 작가는 지난 연말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8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 포상’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수상 부문이 ‘봉사·활용 부문’이다. 봉사정신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어렵고 힘든 작업임을 문화재 당국이 인정한 셈이다. 문화재를 기록하는 중차대한 일에 사진기록에 관한 예산이 책정되어 있지 않던 무지의 시절부터 이 일을 시작하여 어느새 20년을 훌쩍 넘긴 사진가로서는 그동안 치열하게 최선을 다한 작은 보람이기도 했을 터다.   

사실, 봉사정신은 서헌강 작가 집안의 내력이라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어렸을 적에 아파서 학교를 못가도 봉사활동에는 빠지지 말라고 독려했고, 작가 역시 자신의 두 아이를 키우면서 항상 “어떤 직업을 갖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그 일이 인류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해왔다고 말한다. 사회에 도움을 받고 성장하는 것이니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세뇌교육은 그가 문화재 사진을 찍으면서 어떤 정신으로 임했을지 짐작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진, 이 명제는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 입학하기 전부터 이미 형성되었다.  


 


종묘 정전



종묘제례


이 사회에서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일
충남 천안 출생으로 천안고등학교 시절부터 사진반 활동을 했던 그는 1986년 고등학교 3학년 때에 “고교생활”이란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카메라라는 기계가 매력이 있어서 그리고 카메라 가죽케이스 특유의 가죽냄새가 좋아서 사진을 시작했다는 천진한 소년은 외가에서 만난 친척으로부터 처음으로 “너는 왜 사진을 하니?”라는 질문을 받고 머뭇거렸다. 당시 서울예전 무용과 교수였던 친척은 “나는 춤을 추는데, 내 춤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위안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춤을 춘다.”고 말하면서 “만약 네가 사진학과에 진학하고 사진가가 되려 한다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사진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사진학과에 진학하면서 일찌감치 위대한 사진가가 되겠다는 꿈 대신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사진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다큐멘터리 사진가를 지망했고, 학창시절 열심히 현장을 다니며 촬영했다. 그런데 4학년 때 ‘샘이 깊은 물’에서 사진기자로 일하게 되면서 그의 사진은 방향을 틀었다. 잡지의 특성에 따라 사회적 다큐멘터리에서 문화 다큐멘터리로 선회한 것이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훗날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에 대한 사진을 찍게 되었다.


 
“샘이 깊은 물에서 한창기 사장님과 강운구 선생님께 일을 배운 것은 행운이었어요. 사진만이 아니라 삶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거든요. 세상사는 법, 세상을 보는 법, 사물을 대하는 법...”

일생을 살아가면서 운명적인 만남은 여러 번 찾아오지 않는 귀한 기회다. 그는 대학시절에 강운구 선생을 만났던 일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한다.
 
“이름으로, 사진으로만 알았던 강운구 선생님이 학교 복도 저 쪽에서 걸어오시는데 제 눈에는 제임스 본드보다 더 멋있게 보였어요.”

영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그가 제임스 본드의 요원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를 눈여겨 본 강운구 선생의 추천으로 졸업도 하기 전에 ‘샘이 깊은 물’에 입사했다. 그리고 그 일은 그가 평생 사진가로 살아가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소중하고 귀한 것을 알아보는 그의 순하고 열린 마음이 선배들의 가르침을 쏙쏙 받아들였고, 늘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그의 실험정신이 남다른 사진가가 되는 자양분으로 작동했다.
 

 


사진집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갑주와 구군복 일괄’ 중 투구



사진집 〈독일 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좌, 우상) 백자청화운룡문호, (우하) 백자청화봉황문호


“눈이 안 오면 만나요.”
인터뷰 날짜를 약속하면서 작가는 이런 단서를 붙였다. “만약 눈이 오면 그 다음날에 만나는 걸로 해요. 눈이 오면 찍어야 할 사진이 있거든요.”

다행히(?) 눈이 오지 않아 작가를 만났다. 그는 촬영이 있는 날엔 새벽부터 서두른다. 문화재는 귀한 보물이니 사진가가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찍을 수 없으므로 사진을 의뢰하는 쪽에서 정해준 시간에만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 오전 10시부터 촬영하기로 되어 있다면 미리 양해를 구하고 새벽 4시부터 현장에 도착한다. 자신이 구상해놓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그는 약속시간이 될 때까지 정말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대상을 향해 돌진하고 집중한다. 집중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려 머리에 그렸던 한 장면을 사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는 빠른 시간 내에 최대한 원하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일에 소위 도사가 되었다. 이는 열악한 촬영환경에서 몸에 익힌 노하우다.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촬영하는 일을 16년째 하고 있는데 적은 예산으로 일을 하려니 출장기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사진을 빨리 많이 찍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대상에 대해 리서치를 하고 사전 시나리오를 짠 후 출발의 총성이 울리면 단거리 선수처럼 숨도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 거의 먹지도 않고 화장실에도 가지 않고 일만 하는, 그러면서도 최상의 결과를 뽑아내는 그를 보고 해외 박물관에서는 혀를 내두르며 스카우트 제의를 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사실 혹사당하는 거나 다름없었지요. 그래도 해외 여러 박물관에 다니며 관계자들에게 나의 사진을 보여주게 되면서 백인이든 흑인이든 그들이 좋아하는 코드를 알게 되는 성과가 있었어요. 사진을 보면서 공통적으로 ‘와우!’라고 감탄하거나 그냥 휙휙 넘기는 걸 지켜보면서 깨달았지요. 그들의 시선이 어디서 멈추고 어디서 흥미를 잃는지.”  

그런 경험은 우리의 문화재를 우리만이 아니라 세계인의 관심을 끌 수 있게 보여주는 비법을 터득하게 했다. 더 확장된 시선으로 우리의 문화재를 표현하게 되면서 또한 인터넷의 발달로 그의 사진이 널리 유통되면서 그의 사진은 밖에서 한국의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창이 되기도 했다.     

 
“2005년에 왕릉 46군데의 촬영을 의뢰받은 적이 있었어요. 저는 촬영이 결정되면 이건 이렇게 풀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실험을 해요. 보여주기 방식이 같으면 나도 지루하고 보는 이도 지루할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로 해마다 수십 권의 책에 그의 사진이 실리고 개인적으로는 전시도 하고 작품집도 만들어왔다. 국보대관, 문화재대관, 조선왕릉, 종가의 제례와 음식, 해외 한국문화재, 영친왕 일가의 복식, 궁궐의 주련 현판 등등 그가 기록으로 남긴 사진은 말 그대로 우리 문화유산을 총망라한다.

 

수원화성



조선왕릉 - 선정릉



서원 - 옥산서원


한 장면을 위하여
그의 최종 목표는 100개의 테마를 10장씩 골라 천 장의 사진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 목표를 위해 그는 여전히 불나방처럼 일에 뛰어든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위하여 같은 장소를 서너 번씩, 심지어 대여섯 번도 간다. 현장에 가기 전에 꼼꼼하게 계절과 시간과 날씨를 연구하고 계산하는 데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을 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는 20년 넘게 찍은 한국의 궁궐을 정리하려고 해요. 일반인들은 정해진 시간에만 궁궐에 가볼 수 있지만 나는 특별한 시간대에도 출입했으니 풍부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예요. 그동안 보지 못한 새로운 궁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 번 그가 발표해온 사진들을 통하여 그가 보여줄 한국의 궁궐이 얼마나 아름답고 색다를지 기대가 생긴다. 원하는 장면을 기어이 포착해냈을 때 희열을 느낀다고 말하는 서헌강 작가. 그는 자신의 사진을 현장을 포장해서 보여주는 사진이라고 말한다. 그는 묻는다. 아름다우면 왜 안 되는가? 그가 월드비전에서 후원받고자 하는 어린이 사진을 찍을 때도 그랬다고 한다. 부모를 잃었거나 몸이 아프다고 해서 항상 불행한가? 그는 아이와 하루 종일 놀아주면서 그 아이가 가장 행복하고 맑은 표정을 보일 때 촬영했더니 후원이 더 많이 들어오더라고 했다.

사람이나 건축이나 물건이나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 그는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는데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런 자세는 그의 긍정적인 마음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는 원하는 사진을 얻었을 때 마음속으로 “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독백한다고 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자신의 삶에서 아버지 같이 고마운 분들에 대한 인사다. 그러한 작가의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한국’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며 그의 긍정 마인드에 전염되어 중얼거렸다. “내일은 눈이 왔으면 좋겠다. 그의 촬영을 위하여...”


 


 

 
글 :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19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