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ine/상상 ③ : 사타, 땅에서 빛나는 별빛

슬픈데 아름답다, 외로운데 아늑하다, 무서운데 예쁘다, 이런 모순된 말들이 사타(思他, SATA)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흘러나온다. 과거에 베인 상처, 하지만 그 위에 돋을 새살에 대한 희망이 있다. 현실의 어긋난 틈들에 빠져버리지 않고, 차라리 폭발해 우주가 되겠다는 소망이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상상과 초현실의 이미지는 현실에 발을 붙인 몸, 그러나 밤하늘로 끝없이 고개를 쳐들고 마는 꿈들의 전경이다. 지상에 내린 별빛으로, 우주에 떠도는 성운들로 더 아득해, 더 찬란해진 “NEUTRON SaTAR-Pulsar”시리즈와 레진을 이용한 최근작에 대해 사타(思他, SATA)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타, NEUTRON SaTAR, Pulsar Galaxy Breath NS 29-14, 2018, photography, mixed media, 50×50cm ⓒ사타



사타, NEUTRON SaTAR, Pulsar-Soul of sea NS 1552, 2017, photography, mixed media 60×60cm ⓒ사타
 

“Nebula Horsehead”(2019)를 포함해 사타 자신이 등장하는 사진에 안료와 레진 등을 입혀 우주의 성운이 감도는 듯한 신작들을 “2019 아트부산” 갤러리 룩스 부스에서 봤다. 최근의 작품들에 대해 소개해 달라. 
〈SaTARLIT〉(스페이스반디, 2007)에서부터 우주와 연관된 작업을 하고 있어서 “SaTARLIT”과 궤를 같이하는 작품들이다. 우주에서 노는 것이고 과거와 현재 속 특정 기간과 사건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별자리와 성운, 성단 혹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은하계를 생성하여 표현하고 있다. 중성자별과 생(生)과 사(死)를 함께하는 사타를 의미하는 〈NEUTRON SaTAR〉(갤러리 룩스, 2017)에서부터 레진을 사용했다. 〈NEUTRON SaTAR〉는 그간 작업했던 작품 이미지와 축적했던 방대한 사진들을 컴퓨터 에러로 순식간에 잃어버린 후 경험한, 머릿속이 폭발하는 듯한 충격과 곧 이은 해방감이 모티프가 됐다. 머릿속 폭발 후 만들어진 나의 중성자별(Neutron star, 거대 항성이 초신성 폭발을 겪을 때 형성되는 밀도가 극히 높은 항성)은 이후 블랙홀이 될지 새로운 별이 될지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 “Nebula Horsehead”를 포함한 레진을 이용한 최근작은 이러한 〈NEUTRON SaTAR〉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후에 특히,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장면을 실제 겪어보고 그것을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른바 공간감이었는데, 2D의 눈속임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다 다시 레진을 사용하게 됐는데, 결과물을 보고 어느 정도 만족했다. 


12년 전 “SaTARLIT” 시리즈에서는 흑백 사진에 별빛이 하얗게 표현됐다면, 〈NEUTRON SaTAR〉에서 선보인 “Pulsar”시리즈에서는 컬러 사진에 LED를 이용해 손의 터치로 별빛이 점등, 소등되기도 했다. “SaTARLIT” 시리즈의 시작과 “Pulsar”시리즈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SaTARLIT” 시리즈의 시작은 스트레스의 해소였다. 지금도 그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혼자 삼각대를 펼쳐 촬영하고, 돌발 상황에 대처하고, 현장 분위기에 빠져들고, 결과를 궁금해 하고, 이미지를 선별하고, 미진한 부분은 보충 촬영하고 그렇게 논다. 흑백 사진에서 컬러 사진이 되고, 장소가 바뀌고, 액자가 변화하고, 레진이나 LED와 같은 각종 부재료가 함께하지만 작업 방식과 재료의 변화만 있을 뿐이다. 물론 사진이 베이스가 되는 것에도 변함은 없다. 


최근 작품들에서 우주의 별들이나 성운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지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 별빛을 연상시키는 이전 작품들에서 인간의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우주의 이미지들로 작품이 확장된 것으로 보이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SaTARLIT” 시리즈를 계속 작업하면서 별자리를 보는 재미가 생겼다. 그러다 점점 성운, 성단, 은하계 등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힉스 입자(Higgs boson; 우주 공간에 가득 차 있는 입자이며 소립자의 질량을 만들어 내는 근원)의 발견으로 우주 생성 원리에 다가섰고, 언젠가 행성 간 이동이나 우주여행이 밥 먹듯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현재 우리는 달조차 쉽게 왕래할 수 없다. 그래서 우주는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일종의 선망의 대상이다. 그곳에서 쉬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기도 한다. 우주는 내가 힘들고 상처 받았을 때 쉴 수 있는 곳이다. 예전 “SaTARLIT” 시리즈에서 기울어진 몸일 때 가장 편하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기울어진 몸도 편히 쉴 수 있는 무중력 공간에 대한 마음이 더 커진 것으로 본다. 



사타, NEUTRON SaTAR, Pulsar-Night bug NS 29-50, 2017, photography, mixed media, 60×60cm ⓒ사타



사타, Galaxy 1981, 2019, mixed media, 80×80cm ⓒ사타


첫 개인전 〈히스토리〉(소울아트스페이스, 2005)에서부터 현재까지 작품에 꾸준히 작가(작가의 몸)가 등장한다. 모든 작품이 개인의 경험과 기억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시리즈 제목이나 개별 작품의 제목들도 작가만의 암호인 거 같다. 보는 이가 어떻게 느끼는지와 상관없이 몇 작품을 일례로,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이야기를 좀 듣고 싶다.
대체로 전시 제목에 설명이 포함되기 때문에 작품 각각의 소제목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큰 의미도 없다. 물론 이미지마다 개인적인 경험이나 감상이 들어 있긴 하지만, 암호처럼 생각되면 작가 입장에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내 경우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보거나 관람할 때 제목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작품이 눈에 들어올 때 제목이 스포일러처럼 방해가 돼 불편하기 때문이다. 답을 찾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보고, 공감을 하게 되면 즐겁게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과 기억 등의 표현들이 개입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작가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내 작업들도 설명으로 이뤄진 감상이 아닌 직접 마주하여 보는 대로 느끼며 자신만의 감상을 가지길 바란다. 
그럼에도 굳이 물으면 제목과 한 작품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겠다. 제목 “Pulsar-Soul of sea NS 1552(2017)”의 경우 “Pulsar=자전하는(살아있는) 중성자별, Soul of sea=바다의 영혼, NS1552=사진이 촬영된 위치”를 뜻한다. 신작 “Galaxy 1981”(2019)에 등장하는 은하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1981년은 내가 거의 말을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큰 고민이나 상처가 있었나 보다. 스스로 말을 하지 않고 지내도 평화롭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는 시간이 갈수록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아무도 없는 들판에 가서 나도 모르게 주절주절 끝도 없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말들을 쏟아냈다. 다시 입을 닫고 돌아올 때엔 이미 어둠이 내렸었는데 어렴풋한 기억에 달과 함께 몇 개의 별들을 쳐다보면서 실실 웃으며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내가 그곳에서 쏟아낸 말들이 하늘로 올라가 은하수가 되었을 거라고, 그때를 회상하며 작업했다.


도심보다는 시골 외곽, 나아가 나무가 있는 숲, 풀밭, 바다 등 자연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 많다. 사타에게 작품의 배경으로서 자연은 어떤 의미인가? 또 작가가 작품 속에 직접 등장할 때 나체인 경우가 많은데 옷을 입은 몸과 벗은 몸에 다른 의미가 있는가?  
질문에 어느 정도의 답이 있다. 도심과 인접한 곳에서 누드 촬영을 진행하다가 신고가 돼 난감한 상황을 몇 번 겪은 적이 있다. 일례로 김길태 연쇄 살인범 사건 당시 인근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누드 촬영을 진행했을 때 헬기로 인근 지역을 수색하던 팀이 나를 발견하고 신고해 검문검색이 있었다. 고성의 송지호 해수욕장에서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검문검색이 있는 줄 모르고 누드로 촬영하다 군인에게 검문을 당한다거나 하는 상황을 겪었기 때문에 촬영 장소로 인적이 드문 곳을 주로 선택하게 되었다. 물론 낯선 사람과 사이가 좋아져서 누드로 촬영할 때 셔터를 눌러준다거나 하는 상황도 있었지만 대체로 누군가에게 불편한 상황을 굳이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연과 누드는 나에게 해방과 휴식이다. 주제를 표현할 때 내 몸과 마음이 편해야 결과에서도 그 마음이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양복을 입은 경우엔 답답할 때, 누드일 경우엔 편안할 때로 보면 편할 거다. 


예전 “SaTARK”(2010) 시리즈에서의 닭을 비롯해 여러 작업들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백마, 백조, 개, 기린 등의 동물들이 다른 동물과 달리 지니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특정 시기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들었을 때, 특히 종속적인 관계의 유년기에 내가 만든 작은 국가, 이를테면 ‘병아리 가족’ 같이 내가 애정을 주면 그것에 반응하는 동물들에 애착이 있었다. 이외 언급된 동물들은 동물원에 가서 자주 보고 왔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느끼곤 한다. 심지어 꿈에도 등장한다. 작업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함께 노는”,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사타, Nebula Swan, 2019, mixed media, 80×80cm ⓒ사타



사타, Nebula Horsehead, 2019, mixed media, 75×100cm ⓒ사타



사타, NEUTRON SaTAR, Pulsar-Universe Eye NS 29-36, 2018, photography, mixed media, 80×80cm ⓒ사타


사타의 작업들을 보면 흩어지거나 와해되거나 사라지거나 흘러가거나 하는 느낌들을 받는다. 작품 속에서 물이나 구름이나 깃털, 연기 등이 등장하고, 작가가 지구의 중력에서 벗어나 공중으로 솟으려는 제스처들 때문인 거 같다. 어찌 보면 인간의 몸을 벗고 자연이나 우주로 돌아가거나 혹은 그 자체가 되고 싶어 하는 소망이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작업할 때 마음은 어떠한가? 그리고 사타에게 현실 혹은 현실 세계는 어떤 의미인가? 
다른 인터뷰 때에도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작업을 진행할 땐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서 한다. 가끔은 작업을 하다가,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있다. 어느 지인이 내가 촬영하며 작업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어느 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세상에 한 발은 붙이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는 끈이 유지된다”고. 내가 정신줄을 놓거나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너무 과하게 몰입해서 방전 후 다시 재충전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작업을 하면 몰입이 시작되고, 어느 순간 과거나 현재의 나와 대화하며 화해나 치유 같은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오해가 와해되고, 고민이 사라지고, 상념이 흘러가는 장면들을 표현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현실 세계는 나에게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 있는 디딤돌 같은 존재이다. 내가 사라지지 않게 잡고 있고, 사라지고 싶지만 붙잡고 놓질 않는 돌이다.   


첫 개인전 〈히스토리〉에서부터 지금까지 상상력을 기반으로,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또 최근에는 사진 위에 LED, 레진 등 다양한 매체를 혼합해 작품을 완성한다. 사타에게 사진은 어떤 매체인가? 사진이 아닌 혼합 매체로 작가의 이야기를 하는 데 있어 그 효과나 재미가 있다면 말해 달라. 
여러 번 받은 질문이다. 아직까지는 예전의 답과 생각은 비슷한데, 사진은 나에게 작업의 주재료이다. 음식으로 비유하면 반죽 정도 되겠다. 여러 매체 중 가장 내 마음대로 잘 다룰 수 있는 매체가 사진이기 때문이다. 사실 2007년 첫 〈SaTARLIT〉 전시 때부터 라이트를 사용했다. 당시엔 광섬유를 이용했었고 LED로 설치, 영상, 회화도 시도했었다. 전체 전시 작품 중에 사진이 많아서 사진 작업을 주로 한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많았다. 나는 사진작가이고 내가 표현하는 것이 오롯이 사진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위해서 어떤 재료가 가장 적당한가를 고민하고 그것에 맞는 재료를 찾아 만들어보는 거다. 반죽된 베이스의 사진, 거기에 LED나 광섬유, 깃털, 레진, 피그먼트 등등이 부재료와 양념 역할을 한다. 효과나 재미는 글쎄…. 만들어 놓았을 때 내 입맛엔 딱 좋은데 손님은 떨떠름한 경우도 있고, 대충 만들었는데 반응이 “빤따스띡”이라며 황홀해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새 작품을 할 때마다 나는 항상 설렘을 가지고 하고 있다.


〈히스토리〉(소울아트스페이스, 2005), 〈SaTARLIT〉(스페이스 반디, 2007) 등 초기 작업들에서 사진 속 배경이 생활감이 느껴지는 현실의 공간이거나 표현이 직접적이었던 것들에 비해 점차 사진의 배경이 자연 또는 상상과 초현실적인 세계로 변화하고, 내용이 더 추상적이고, 색도 밝아지며, 표현 방식도 다양화되고 있다. 작가로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삶에도 그런 변화들이 있었는지, 전시장에서 관람객이나 작품의 컬렉터들의 반응은 또 실제 어떠한지 궁금하다.
초기 작업들은 거의 방구석 활동이었다. 관통하는 주제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고, 지금까지 작가로 활동하고 있을 줄 몰랐기 때문에 하루하루 이미지를 생산하며 심리적인 도피에 급급했던 시절이었다. 첫 전시 〈히스토리〉를 준비하면서 처음 주제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고, 한 발 물러나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초현실”은 처음 이미지를 만들어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진행하고 있다. 배경의 변화는 왜 그렇게 되었나, 딱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과 장소를 잘라 붙여서 완성하는 게 대부분이라 배경의 변화를 말하는 게 큰 의미는 없을 것 같다. 단지 주제나 시리즈의 흐름상 주체의 강조를 위해 자연 혹은 단조로운 배경을 사용하고 있다. 덧붙이면, 탁 트인 곳을 좋아하고, 그런 지형을 가진 나라와 공간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수렵한 이미지들이 쌓여서 자연스레 쓰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현재까지 삶이나 정신에는 크게 변화는 없다. 다만 색상 사용이나 배치와 조합 그리고 재료의 사용이 어느 정도 손과 눈에 익어서 결과에도 영향이 갔으리라 어렴풋이 짐작한다. 한편으로는 작품의 이미지가 더 어두워지고 무섭고 쓸쓸해졌다는 의견도 듣는다. 페어나 전시 때 관람객이나 컬렉터들의 반응도 그때마다 모두 제 각각의 반응들이라 공통적인 의견은 수렴하기가 어려웠다. 작가에게도 변화가 있듯 관객이나 컬렉터의 생각도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반응이 늘 같을 수 없고, 때마다 그날 기분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다.

 

글 정은정 기자
해당 기사는 2019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