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 | 신화가 만들어지는 그곳
- 2024-10-10 16:04:55
무등산이 보이는 작업실
서울에서 경부, 천안-논산,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이윽고 전남 화순에 접어들자 배롱나무 가로수가 진분홍빛 눈짓을 보낸다. 100일간 핀다하여 백일홍이라 불리는 배롱나무의 꽃, 즉 목(木)백일홍은 한 번 핀 꽃이 100일을 가는 게 아니라 피고 지고 릴레이를 하며 나무를 여름 내내 붉게 물들인다. 우리에게 100일은 특별하다. 단군신화에서 사람이 되길 소망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주어진 날이 100일이었다. 아기가 태어나 100일이 되어 백일잔치를 여는 것도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는 기념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깊어질수록 마을을 여럿 지나며 점점 더 깊은 시골로 접어들었다. 그때 야산 기슭에 창고 같은 커다란 건물이 나타났다. 신화적 이미지를 구현하는 사진가 이정록의 작업실이다. 화순읍내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주말가옥 몇 채가 눈에 띄는 아주 한적한 동네였다.
작업실 내부의 넓이와 높이가 상상 이상이었다. 바닥 면적이 130평, 천정은 9.2미터라고 했다. 1층엔 사진을 찍는 스튜디오와 작품을 보관하는 수장고가 있고 계단을 올라 1층 넓이의 3분의 1쯤 되는 2층에는 거실과 침실, 서재와 간단한 부엌 등이 있다. 촬영을 할 때는 1층에서, 그 외의 시간은 2층에서 보내는 구조다. 자동차로 25분 거리인 광주광역시에 집이 있지만 그는 월요일 아침에 출근해서 토요일 저녁에 집으로 퇴근한다고 했다. 오롯이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촬영이 없는 날은 음악을 들으며 거의 명상과 독서로 시간을 보내요. 명상수련으로 건강관리를 합니다.”
그의 서재 창밖으로는 멀리 무등산자락이 보인다. 소음 하나 없이 고요하고 크고 작은 산들이 초록빛을 내뿜는 풍경 속에서 그는 마치 하안거에 들어간 스님처럼 사색하며 고요를 즐긴다.
“저의 첫 작업실은 광주의 집에서 5분 거리에 있었는데 한 10년 정도 사용하다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10년 정도 있다가 다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또 쫒겨 났어요. 광주의 작업실은 주로 사무공간과 수장고로 기능했기 때문에 12년 전에 생명나무 실내작업을 할 때부터 담양에 100평짜리 허술한 창고를 임대해서 스튜디오로 개조해, 광주 작업실과 함께 두 군데를 써왔거든요. 그러나 담양의 스튜디오에서는 내가 구상하는 작품의 충분한 스케일이 나오지 않아서 다시 화순에 작업실을 새로 짓게 되었습니다.”
2021년에 지금의 작업실을 지을 때 가장 우선한 것이 촬영에 필요한 높이와 넓이였던 이유다. 지금은 한 시리즈를 끝내고 다음 시리즈를 시작하기 전 휴지기에 들어와 있다. 작업실 내부에는 그의 <루카> 시리즈에 등장하는 FRP(섬유강화플라스틱)로 만든 사슴 두 마리도 덩달아 휴식 중이다. 그리고 사슴의 뿔을 대신했던 나뭇가지들이 눈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하얗게 칠해진 채로 다음 촬영을 기다리고 있다.
“사슴은 조각하는 사람에게 맡겨 만들었지만 뿔은 내가 나뭇가지로 직접 만들어요. 그동안 여러 형태의 나뭇가지들이 수북했는데 요거 몇 개만 남기고 다 태워버렸어요.”
신화적 풍경에서 루카까지
태워버렸다고 함은 다음 시리즈로 넘어가겠다는 다짐일 것이다. 이정록 작가의 첫 사진 시리즈는 1998년에 홍익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며 발표한 《남녘땅》이었다. 김제평야에 어둠이 걷히며 새벽안개가 서서히 피어오르는 시간, 또는 낮과 밤의 경계에 선 어스름한 저녁에 낮의 열기를 가만히 토해내는 대지를 포착한 사진이었는데, 그러나 그때까지는 이정록 작가가 무엇을 어떻게 펼쳐 보이는 사진가가 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작가 자신이 가장 먼저 그 의문에 직면했을 터, 그 이듬해에 그는 미국 로체스터공과대학(RIT)으로 유학을 떠난다.
2002년에 돌아온 이정록 작가의 전환점은 2007년에 발표한 《신화적 풍경》에서 비롯된다. 그 이후 <생명나무>, <디코딩스케이프>, <나비>, <루카>에 이르는 작품들은 모두 신화적 풍경의 변주였는데, 라이트 페인팅(Light Painting)이라는 기법을 이용하여 생명체의 본질적인 근원에 닿고자 하는 탐구를 시도했다. 눈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의 한계, 즉 대상을 바라본 순간에 받은 작가의 찰나의 느낌까지 사진으로 완벽하게 재현해 내지 못하는 사진의 한계를 라이트 페인팅으로 극복하려고 한 것이다.
작가가 <생명나무>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첫 경험은 한겨울에 촬영을 하러 가다가 우연히 만난 농촌의 길가 감나무에서였다. 가지만 앙상한 나무에서 생명의 에너지 같은 것이 섬광처럼 작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의 떨림을 안고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현상해 보니 그 느낌은 사라지고 흔히 만날 수 있는 겨울나무가 나타났다.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로 표현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작가의 느낌을 사진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걸까? 그 이후 그가 숱한 시도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찾아낸 것이 라이트 페인팅이었고 그것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생명나무를 만들어 냈다.
대상이 될 만한 나무를 물색하고 때론 아예 나무를 통째로 원하는 장소에 옮겨와 촬영한 태초의 나무 같은 생명나무는 그 이후 <나비>, <루카> 시리즈로 발전했다. 치밀하게 계산된 동선에서 소형플래시를 터뜨려 마치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빛의 군무는 작가가 유독 집착하는 장소성과 조합하면서 신화적이고 환상적인 이정록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특히 <나비> 시리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나 원초적인 자연이 숨 쉬는 장소에서 나비의 군무처럼 빛을 연출했는데,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의 시간을 품은 장소에 떠도는 영혼을 만나는 것 같은 신비감을 자아낸다. 찰나의 불빛을 통해 오히려 영원성을 환기시키며 미묘한 아우라를 내뿜음으로써 이미지의 한계를 넘어선 이미지의 언어를 가능케 했다.
<루카> 시리즈는 <생명나무>와 <나비> 시리즈가 합체된 제3의 버전 같다. 루카(LUCA)는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 즉 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에서 첫 글자를 따온 명칭인데, 작가는 신선들이 흰 사슴을 타고 다녔다는 제주 한라산 백록(白鹿)의 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루카> 시리즈에서 사슴의 뿔은 뿔이라기보다 한 그루의 나무로 느껴지는데 실제로 작가가 나뭇가지에 하얀색 분무를 뿌려서 만든 것이다. 사슴과 나무, 즉 동식물이 합체된 루카를 통하여 작가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과 존재에 대한 숭고함에 찬사를 바친다.
올해 부산 소울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전시 《흰 사슴 루카》(5.25-8.16)에 선보인 작품은 <루카> 시리즈 중에서도 2022년과 2023년에 촬영된 가장 최근작들이다. 이 작품들은 생명나무부터 이어온 일련의 신화적인 시리즈들의 종결편이며 최종본이 될 것 같다. 작가가 “이제 됐다!”는 말과 함께 새로운 작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방랑을 꿈꾸다
“어떤 작업을 하면서 완성도가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 다음 작업을 생각해요. 이번에 부산에서 전시를 하면서 루카는 여기서 마무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루카 작업은 주로 작가의 작업실이 위치한 전남 화순일대에서 이루어졌다. 고인돌 단지와 대나무숲 등을 비롯하여 나주호 등지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나주호에서 촬영할 때에는 호수에 물이 빠졌을 때 위로 드러나는 작은 섬 같은 땅에 사슴을 설치해놓고 그 근처에서 밤을 지새우며 기다리다가 새벽에 촬영을 하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장소가 알려진 모양이에요. 카메라를 든 그룹이 몰려와서 조형물을 찍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나보다 더 일찍와서 내가 촬영할 지점을 선점하고 있기도 했어요.”
그는 늘 장소를 탐색한다. 반드시 풍경이 좋은 곳이 아니더라도 마음을 끌어당기는 장소를 만나게 되는데 좋은 장소를 보면 여기에 이런 설치를 세워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런데 요즈음 그동안에는 어떤 장소를 보면서 풍경 자체로 보지 않고 작업의 배경으로서 풍경을 바라봤다는 걸 깨달았어요. 사실 풍경 그 자체로도 느낌이 좋았는데 그곳에 루카를 세우니 루카작업에 국한되고 말았어요. 지금부터는 그 장소가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다음 작업의 실마리는 아직 구체화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니, 미리 정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의 다음 행보는 ‘방랑’이기 때문이다. 방랑하다가 마음이 끌리는 장소를 만나면 그곳에 오래 머물면서 거기에서 영감이 떠오르면 작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너무 컨셉에 얽매였던 작업에 대한 반작용인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마음 편하게 방랑하다가 좋은 곳을 만나면 적어도 한 달은 머물면서 그 장소가 건네는 이야기를 작업으로 남기고 싶어요. 막연하긴 하지만 그래서 더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장소가 알려진 모양이에요. 카메라를 든 그룹이 몰려와서 조형물을 찍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나보다 더 일찍와서 내가 촬영할 지점을 선점하고 있기도 했어요.”
그는 늘 장소를 탐색한다. 반드시 풍경이 좋은 곳이 아니더라도 마음을 끌어당기는 장소를 만나게 되는데 좋은 장소를 보면 여기에 이런 설치를 세워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런데 요즈음 그동안에는 어떤 장소를 보면서 풍경 자체로 보지 않고 작업의 배경으로서 풍경을 바라봤다는 걸 깨달았어요. 사실 풍경 그 자체로도 느낌이 좋았는데 그곳에 루카를 세우니 루카작업에 국한되고 말았어요. 지금부터는 그 장소가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다음 작업의 실마리는 아직 구체화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니, 미리 정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의 다음 행보는 ‘방랑’이기 때문이다. 방랑하다가 마음이 끌리는 장소를 만나면 그곳에 오래 머물면서 거기에서 영감이 떠오르면 작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너무 컨셉에 얽매였던 작업에 대한 반작용인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마음 편하게 방랑하다가 좋은 곳을 만나면 적어도 한 달은 머물면서 그 장소가 건네는 이야기를 작업으로 남기고 싶어요. 막연하긴 하지만 그래서 더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이정록 작가는 스페인의 프라도미술관에서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블랙 페인팅을 보았을 때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고야의 생애 마지막 그림인 블랙 페인팅을 보며 전율했다고 한다. 작가가 사회적 책무를 다 끝낸 나이에 면도칼처럼 예민한 감성으로 죽을힘을 다하여 뿜어내는 작품은 어떠한 것일까? 평생을 작업해 온 작가의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부은 작품, 흔히 Late Style이라고 하는 그런 작품을 남길 수 있다면 자신은 어떤 작품이 될까 곰곰 생각해 보게 되더라는 것이다.
“물론 내 나이에 비해 아직은 빠른 생각입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 모든 사회적 금기로부터 자유롭고 아무 거리낌이 없는 정신 상태에서 뿜어져 나올 작품을 상상해 보게 돼요. 나도 마지막에 그런 작품을 남길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난 20여 년간 이정록 작가는 신화적 풍경이라는 일관된 이미지를 유지해 왔다. 또한 대형 필름카메라로 촬영하여 아날로그 프로세스를 거치는 ‘느리고 번거로운’ 수고를 감내하고 있다. 사진의 내용 또한 장소와 대상과 기법에서는 조금씩 다를지라도 신화적인 이미지, 신화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신화라는 말 자체가 함유하고 있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며 숭고한 세계를 대지와 하늘을 이어준다는 나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상징하는 나비, 그리고 신선이 타고 다니는 흰사슴을 통해 신비롭고 아름답게 표현해 왔다.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잠시 지구에 내려온 것처럼 영롱하게 반짝이며 그 별빛 아래서 잠시 현실의 장소는 꿈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깨고나면 꿈일지라도 아주 먼 시간, 오래된 시간을 상상하고 그곳으로 돌아가고픈 설렘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작품은 큰 위로를 주었다.
그러나 이젠 오랜 시간 붙잡았던 화두를 버리고 이정록 작가는 방랑의 자유를 누릴 예정이다. 그가 미리 생각하지 않고 미리 원하지 않고 무심의 상태로 자연과 마주하며 자연스럽게 터져 나올 그 ‘무엇’이 무엇일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작가도 모르니 답은 미정이다. 이제 막 신화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이정록 작가의 작업실에서 나와 왔던 길을 되짚었다. 노을빛을 받은 백일홍이 대낮보다 더욱 붉다.
백일홍이 지고 나면 여름은 가고 새로운 계절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떠나고 어떤 이는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서 어디선가 새로운 신화가 시작될 것이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기사는 2023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물론 내 나이에 비해 아직은 빠른 생각입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 모든 사회적 금기로부터 자유롭고 아무 거리낌이 없는 정신 상태에서 뿜어져 나올 작품을 상상해 보게 돼요. 나도 마지막에 그런 작품을 남길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난 20여 년간 이정록 작가는 신화적 풍경이라는 일관된 이미지를 유지해 왔다. 또한 대형 필름카메라로 촬영하여 아날로그 프로세스를 거치는 ‘느리고 번거로운’ 수고를 감내하고 있다. 사진의 내용 또한 장소와 대상과 기법에서는 조금씩 다를지라도 신화적인 이미지, 신화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신화라는 말 자체가 함유하고 있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며 숭고한 세계를 대지와 하늘을 이어준다는 나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상징하는 나비, 그리고 신선이 타고 다니는 흰사슴을 통해 신비롭고 아름답게 표현해 왔다.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잠시 지구에 내려온 것처럼 영롱하게 반짝이며 그 별빛 아래서 잠시 현실의 장소는 꿈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깨고나면 꿈일지라도 아주 먼 시간, 오래된 시간을 상상하고 그곳으로 돌아가고픈 설렘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작품은 큰 위로를 주었다.
그러나 이젠 오랜 시간 붙잡았던 화두를 버리고 이정록 작가는 방랑의 자유를 누릴 예정이다. 그가 미리 생각하지 않고 미리 원하지 않고 무심의 상태로 자연과 마주하며 자연스럽게 터져 나올 그 ‘무엇’이 무엇일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작가도 모르니 답은 미정이다. 이제 막 신화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이정록 작가의 작업실에서 나와 왔던 길을 되짚었다. 노을빛을 받은 백일홍이 대낮보다 더욱 붉다.
백일홍이 지고 나면 여름은 가고 새로운 계절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떠나고 어떤 이는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서 어디선가 새로운 신화가 시작될 것이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기사는 2023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