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남아 역사가 되다 ⑦ 일장기를 말소한,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일제에 저항하다

동아일보 1936년 8월 25일자 2판. 일제 강점기의 신문은 통제와 검열 등 탄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판에 일장기가 그대로 표시되어 있었지만 2판에서 기습적으로 일장기를 말소하여 발행하였다.


1936년 8월 9일 손기정선수가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 경기에서 세계를 제패했고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국민은 온통 감격과 흥분의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그러나 머리에는 월계관, 두 손에는 감람나무 화분을 들고 흰색 유니폼의 가슴에 일장기를 부착한 채로 시상대에 서 있는 손기정선수의 전송사진은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가슴에 달아야 했던 서러움에 복받쳐 오르게 했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뛰지 못하더라도 일장기가 아니기를 원하는 국민 모두의 간절한 희망을 동아일보가 풀어주었다. 이길용 운동부기자는 조사부 소속의 이상범 전속화가에게 일장기 처리를 의논하여 전송된 사진에서 일장기 부분을 긁어지워 버렸다. 이길용기자가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낙균 사진부장에게 가져갔고 그는 사진에 손질한 것을 알아보고도 아무말없이 2판의 제판을 돌릴 것을 지시했다. 사진에 관한 최종 책임자는 사진부장이며 그 일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올 것인지를 알면서도 그는 용단을 내린 것이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처분을 당했으며(실제 1936년 8월 28일부터 1937년 6월 2일까지 정간) 신낙균 사진부장을 비롯해 일장기사건과 관련된 5명의 조사는 고문과 폭행으로 시작되어 33일간 혹독한 고문의 연속이였다. 그들은 언론계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일제가 작성한 서약서에 서명한 뒤에 언론계에서 영구 추방되었다.

신문사진은 조직의 산물이다. 사진기자, 사진부, 편집국, 언론사의 정체성을 통해 여과되고 정제된 조직의 체계화 속에서 이루어진다. 일장기말소사진은 신문사진의 첫 단계인 사진기자가 빠져있다. ‘오사카 아사히신문’에서 전송된 사진으로 누가 촬영했는지 불분명하다. 이 사진은 기자와 편집자가 사회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국민을 크게 감동시킨 사진으로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가장 대표적인 항일사진이다. 이것은 신문사진에서 때로는 누가 촬영했는가보다 어떤 과정을 거쳐 매체에 실리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했는가가 더 중요함을 보여준다. 

신낙균, 그는 1927년 동경사진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기독교청년회학교(YMCA)에 사진과 교수로 초빙되었다. YMCA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신문화운동으로 국사 국어의 정리운동 및 문학, 미술, 음악, 연극과 함께 사진에 개화운동의 성격을 띠고 강좌가 시작된 곳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학 관계의 저술인 ‘사진학 개설’을 완성하여 학자로서 지대한 공헌을 하였는데 내용은 사진발달소사, 사진학개설, 재료약품학, 채광학, 사진용어로 분류되어 있다.

학자로서 뿐만아니라 경성사진사협회에서 회장으로 오랫동안 모임을 이끌어오면서 인생과 예술(이제창), 예술의 가치(박만달)와 같은 주제를 다루어 사진과 예술의 접근과 예술일반론위에서 사진을 위치짓고자 노력했다. 덧붙여 그 자신이 협회에서 ‘고무인화법’ ‘오일과 브롬오일’에 대해 발표하는 등 사진표현의 폭을 넓히기 위해 기술적인 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신낙균은 학자로서 단체장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사진부장으로서 애국적 실천적 삶이 더욱 감동을 준다. 사진을 통한 일제에 대한 저항은 신낙균 별세 62년만에 국가보훈처의 인정을 받아 올해에 유해가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글 이기명 발행인 겸 편집인
해당 기사는 2017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