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아이콘, 조세현


조세현. 숱한 사람들이 그의 카메라 앞에 섰다. 우리나라 최고의 연예인, 최고의 권력자, 최고의 기업인 등이 그의 카메라 앞에 서는 동안 어느새 사진가 자신도 유명인이 되어버렸다.
‘아이콘’이라는 그의 스튜디오 이름처럼 후배 사진가들의 ‘아이콘’이 된 조세현 작가. 잡지 사진기자로 출발하여 상업사진가, 인물사진가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얻은 여러 가지 직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하고 있는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로 40년을 달려왔다. 유행에 가장 빠르고 민감한 상업사진분야에서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고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그는 한편으로는 사진을 시작하던 초심으로 돌아가 다큐멘터리 작업에도 열중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얼굴을 기록하고자 하는 “한국인의 얼굴”이 그 작업이다.


 
 

한복패션 - 이영애, 금강산 귀면암 ⓒ조세현


운명을 줍다
조세현(1958~ )과 사진의 첫 만남은 길에서 우연히 주운 필름이었다. 1971년 여름, 길을 걷는데 뭔가 발목에 감겼다. 주워서 살펴보았지만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부잣집 친구로부터 그것이 필름이란 걸 알게 되자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사진관에 찾아갔다. 그러나 사진관 주인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뭐가 찍힌 것인지 확실히 알 수도 없었지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어떤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소년에게 사진은 그렇게 다가왔다. 생전 처음 본 필름을 무심코 발로 차버리지 않고 손으로 주워든 순간, 사진은 그의 운명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마침 아버지가 카메라를 사오시자 사진에 대한 호기심은 좀 더 구체적으로 피어올랐다. 궁금증을 견딜 수가 없었던 소년은 아버지를 졸라 필름을 현상해보는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은 고등학교 진학 후 사진반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때 사진반에 카메라 한 대가 있었는데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그 카메라로 촬영도 해보고 암실기술자로 알려지면서 선배들의 촬영 뒤처리를 도맡다보니 진짜 암실기술자가 되어 갔다. 그러다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사진공모전에서 그의 작품 세 점이 나란히 1, 2, 3등을 휩쓰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3학년 선배에게 빌려준 사진이 1, 2등을 차지했고 자신의 이름으로 응모한 사진이 3등상을 받은 것. 이는 고등학생 조세현이 사진과를 지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법대를 희망했던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의 실망과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그의 고집도 만만치 않아서 겨울방학이 되자 중앙대학교를 찾아갔다. 사진과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에 방문했다가 또 한 번 운명적인 만남과 조우했다. 혹시 조교라도 만나 사진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까 찾아간 학교에서 당대 최고의 사진가인 임응식 교수와 마주쳤고, 임 교수는 사진과를 지망하는 학생에게 사진의 가치와 미래를 역설했던 것. 결심을 굳힌 그는 학비를 대주지 않겠다는 부모님의 위협에도 기어이 사진과에 입학했고 그때부터 그의 특별한 사진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배우 전지현 ⓒ조세현



배우 김민희 ⓒ조세현



배우 이미연 ⓒ조세현


별을 따다
대학에 다니면서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를 꿈꾸었다. 졸업 후 「주부생활」 기자가 된 것도 당시에는 여성지에도 사회문제를 다루는 페이지가 있어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작업한 다큐멘터리 사진이 “청량리 588”, “형제원”, “태백 탄광촌” 시리즈와 같은 사진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오래 두지 않았다. 3년차가 되었을 무렵, 표지와 화보촬영을 맡은 선배에게 사정이 생겨 갑자기 그에게 화보촬영 일이 떨어졌다. 적어도 10년 차는 되어야 맡을 일이 주어지자 그는 모델들과 진행하는 첫 화보촬영을 불과 반나절 만에 해치웠다.

“더 찍을 게 없어서 후다닥 마치고나니 모델들이 오히려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거예요. 저는 선배들과 다른 방법으로, 말하자면 모델스러운 포즈를 취하게 하지 않고 모델이 뛰어간다든가 걸어간다든가 하는 식으로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찍었거든요.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듯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요즘 말로 대박이 나버렸다. 신선하다는 반응이 일면서 조세현이란 이름이 뜨기 시작한 것. 그 후 그에게 촬영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침 80년대 경제호황으로 인한 광고시장의 팽창이 그를 더욱 필요로 했고 그는 마침내 패션사진가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시대적인 요구와 맞아떨어진 그의 사진은 단숨에 그를 독보적인 사진가로 만들었고 그의 몸값은 기록갱신을 이어갔다.

“전성기에 제가 받았던 촬영비가 지금까지 깨지지 않았다고 해요. 많은 돈을 버는 것도 즐거웠지만 사진가의 가치를 알아준다는 점에서 더욱 신바람 나게 일을 했지요.”

그의 카메라 앞에 선 유명인들은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우리 시대의 유명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인, 기업인을 비롯하여 법정스님의 다비식에 쓰인 영정사진도 그의 작품이다. 그의 인물사진은 한마디로 아름답다. 그 사람의 내면을 가장 진솔하고 맑게 길어 올리기 때문인지 모른다. 고요한 아름다움이 감도는 자연스러운 모습은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는 항상 톱모델들과 일을 했지만 그가 직접 톱모델을 발굴해내기도 했다. 당시 배우 전지현은 한강 고수부지에서 우연히 그의 눈에 띈 중학생이었고, 김민희는 그가 이화여대 골목길 옷가게에 놀러갔다가 발견한 중학생으로 쇼 윈도우의 마네킹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이가 어리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에너지가 솟아나오더군요. 명함을 주고 스튜디오로 찾아오라고 했어요. 다음날 스튜디오에 온 그들의 사진을 찍으면서 큰 배우가 될 것이라는 ‘감’이 확 오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그의 눈에 들어와서 스타가 된 배우들은 한둘이 아니다. 오랫동안 상업사진가로 살아온 그는 그의 뮤즈로서 고소영, 김민희, 김혜수, 김혜자, 김희선, 손혜진, 오수미, 이미연, 이영애, 전지현, 황신혜 등을 꼽는다. 그에게 영감을 준 스타들인데, 조세현 작가 또한 90년대 이후 그 스타들처럼 가장 잘 나가는 스타 사진가로 군림해오고 있다.


 
 


법정 스님 ⓒ조세현



만신 김금화 ⓒ조세현



가수 신중현 ⓒ조세현



배우 윤정희 ⓒ조세현



천사들의 편지 - 방탄소년단 ⓒ조세현

 
한국인의 얼굴
사실 조세현 작가에게 인물사진은 그의 사진의 처음이고 끝이다. 돌이켜보면 그가 열네 살 소년이었을 적에 사진과 첫 만남인, 우연히 길에서 주운 필름 속 사진도 인물사진이었다. 젊은 날에 그가 찍고자 했던 다큐멘터리 사진도 역시 사람 이야기였고, 상업사진가의 길로 들어서서 열정적으로 작업한 사진 역시 인물사진이었다. 그리고 그가 나눔의 실천으로 시작한 “천사들의 편지” 시리즈와 아직 발표하지 않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물사진, 지금 작업 중인 “한국인의 얼굴”에서 어머니 시리즈 등, 문자 그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잘생긴 스타의 얼굴에서부터 주름 자글자글한 촌부, 장애인, 다문화 가족, 고아 등에 이르기까지 그는 이 땅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진정한 한국인의 얼굴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인의 얼굴” 시리즈를 찍기 시작했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그는 주로 시골장터에서 만나는 어머니들의 얼굴에 관심을 갖는다. 가족을 위해 인내하고 헌신한 어머니들의 얼굴을 찾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한 달에 40~50명을 찍어도 한평생 진심과 열성을 다하여 살아온 깊이 있는 얼굴을 만나기란 한두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제 작업이 너무 늦은 거죠. 더 일찍 시작했어야 했는데… 이젠 우리의 어머니 세대 얼굴을 만나기가 어려워졌어요. 그만큼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니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달라진 겁니다. 사람구경이 가장 재미있다는 말이 있는데 인물사진은 사람구경이에요. 시골장터에서 만나는 할머니들이 조세현이 누군지 알 바 아니니 그냥 맞상대를 해주시잖아요. 그게 좋아요. 그분들과 격의 없이 이야기하고 사진을 찍어드리고 하면서 내 사진이야말로 사람구경이다 싶어요.”

그의 인물사진은 거의 다 예쁘고 따뜻하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희로애락 속에서 그는 그 사람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면을 끌어낸다. 기술적으로는 조세현 만의 ‘조명’ 노하우 덕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사람과 교감을 좋아하는 그의 심성이다. 먼저 대상과 눈을 맞추고 교감하는 것이 조세현 인물사진의 비결인데, 그는 특히 사람의 눈, 눈빛에 주목한다. 사람의 눈빛에서 그 사람의 마음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위안부 할머니의 얼굴을 찍을 때도 그분들의 얼굴에서 분노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나눔의 집에 아예 스튜디오처럼 배경과 조명을 설치하고 핫셀 카메라로 모공의 피지까지 보이게 찍었어요. 그분들의 얼굴에 담겨 있는 그 기나긴 세월의 흔적을 놓치지 않고 샅샅이 표현하고 싶었거든요.”

그는 우리 사회의 유명인들을 가장 많이 찍은 사진가인 반면에 개인적인 사진작업으로는 장애인, 고아, 다문화 가정 등 이 사회의 마이너리티를 대상으로 하는 사진이 많다. 이를 두고 그는 “내 사진의 기본이 다큐였으므로 지금 내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2003년부터 계속해오고 있는 “천사들의 편지” 시리즈는 유명 배우들이 고아를 안고 찍은 사진들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잘 생기고 아름다운 배우의 품에 안긴 아기들의 천진무구한 모습이 오히려 유명 배우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사진을 통하여 원래 사람은 아름다운 것이고 우리가 이 아름다움을 지켜줘야 한다는 깨달음을 준다. 특히 다문화 가정의 외갓집 방문 프로젝트는 가슴 뭉클하다. 베트남, 태국, 필리핀 등에서 한국으로 시집와서 친정에 가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친정에 가도록 주선해주고 그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한 10년 간의 프로젝트이다. 몇 년 만에 친정에 가는 엄마를 따라 외가에 가는 아이들,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사진을 통하여 공감할 수 있다. 한 세기 전 우리도 쿠바, 멕시코, 브라질, 파라과이 같은 나라로 이주하여 이방인으로서 참담한 세월을 이겨내야 했던 역사를 가진 만큼 그는 우리에게로 온 이방인들을 더 따뜻한 관심으로 품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나도 한국인 - 남해사람 ⓒ조세현



위안부 할머니 박옥선 ⓒ조세현



김연아를 촬영하는 조세현 작가


조세현의 희망프레임
그의 개인전은 벌써 50회를 넘어섰고 2012년 대통령 표창을 비롯하여 그가 받은 사회봉사상도 예닐곱 개에 이른다. 또한 ‘조세현의 희망프레임’ 이사장을 비롯하여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석좌교수, 국가인권위원회 자문위원, 유엔난민기구 자문위원, 대한장애인체육회 이사, 평창올림픽 홍보대사 공식사진작가, 서울시 홍보대사 등등의 이력은 그의 활동 범위를 짐작케 한다. 상업사진가로 돈 버는 일을 하고 개인 사진작업을 하면서 책과 전시를 하고 재능기부를 하고 사진교육을 하고… 이런 끝없는 에너지는 사진을 좋아하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힘들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게 오는 일을 피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다 받아들이다보니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존재하게 한 것 같아요.”

그가 애착을 갖고 있는 ‘조세현의 희망프레임’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재능기부를 통하여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려는 프로그램으로 장애인, 노숙자들에게 사진교육을 시킨다. 그들을 사진가로 만들고 사진을 직업으로 갖게 하겠다는 목적에 앞서 그들이 사진을 통하여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자기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려는 것인데, 벌써 네 사람이나 희망사진관을 차렸다고 귀띔한다.
그를 성공한 사진가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에게 주어지는 일을 ‘피하지 않은’ 적극성, 상대를 받아들이는 긍정 마인드, 그리고 왕성한 호기심과 창작력이 뒷받침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생 사진을 해왔지만 60대에 접어든 지금도 사진이 너무 재미있고 사진으로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그는 올 여름에 김영사에서 출판한 『조세현의 사진의 모험』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40년 동안 200곳이 넘는 해외 곳곳을 다녔고 사진은 만나고 싶은 사람은 물론, 만나기 힘든 사람, 그리고 만나기 싫은 사람까지 만나게 했다. 세상에 어떤 직업이 이렇게 드라마틱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사진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있는 조세현 작가의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참 행복한 시간일 것 같다. 따라서 그가 찾아낸 한국인의 얼굴, 매우 궁금하고 기대된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19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