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동, 사진의 역사가 되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지난 7월 24일, 이명동 선생(1920-2019)의 부음을 듣는 순간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이 떠올랐다. 한 세기를 살면서 한국 사진의 중심에 섰던 그분이 마침내 떠나셨다는 슬픔과 함께 폭풍처럼 살아온 선생님의 일생이 차례대로 머릿속을 스쳤다. 한국전쟁 종군사진가, 4·19혁명을 취재한 동아일보 사진기자, 동아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사진살롱 창설, 사진평론가, 대학교 포토저널리즘 강의, 그리고 1989년 월간 「사진예술」 창간 등 한사람의 업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폭넓고 열정적인 활동을 벌인 이명동 선생. 그분의 삶은 한국사진 그 자체였다.
 
 

경교장에서 촬영한 백범 선생 최후의 사진. 1949. 6. 23.  ⓒ이명동


사진가의 일생
1920년, 일제강점기에 경북 성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 소년 시절에 이미 카메라를 소유했다. 당시에 부잣집이 아니면 결코 가질 수 없던 카메라를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탐했다. 학교 오가는 길에 일본인 카메라 상점 유리창 앞에서 넋을 잃고 카메라를 바라보던 보통학교 4학년 어린 소년은 결국 아버지의 소 판 돈을 훔쳐 카메라를 사고 말았다. 노발대발한 아버지는 카메라를 물리러 가자고 다그쳤지만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고 끝내 할머니의 손자 역성에 효심 깊은 아버지가 물러서고 말았다.
집안 형편상 어림도 없던 카메라를 손에 쥔 그의 사진인생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사진에 흠뻑 빠져 일본 ‘「아사히 카메라」 독자사진콘테스트’에 출품하여 입선하는 등 아마추어 사진가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에도 성균관대학 정치학과에 다니면서 열심히 사진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종군사진가로 자원하여 치열한 전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신문사 사진기자가 된 그는 1955년에 동아일보에 스카우트 되면서 날개를 달았다. 부패한 자유당 정권과 맞서 테러 위협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취재현장을 누볐으며 1960년 4월,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을 목숨 걸고 촬영해 4·19를 대표하는 사진을 남겼다.

무엇보다 동아일보 사진기자로만 머물지 않고 한국사진문화발전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그의 진가가 드러난다. 1950년대 중반부터 동아일보 지면에 사진 관련 기사를 쓰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진평론가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고, 당시 사진에 무지하던 타 예술분야에 맞서 일당백으로 사진의 가치와 미래를 역설했다. 그 일환으로 1949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사진 부문을 넣어야 한다는 운동에 앞장섰는데 쉽게 관철되지 않자 1963년에 ‘국전 대신 민전’으로 대항하자며 동아일보에서 주최하는 동아사진콘테스트 창설을 주도했다. 그러자 그 이듬해 국전에 사진 부문이 신설되었다.

사진의 위상을 확립하려는 그의 치열한 노력은 다각도로 전개되었다. 신문사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사진평론과 사진교육을 통해 사진가를 키우고 규합했으며, 사진을 새로운 예술로서 인정하지 않는 세력에 대해서는 최전선 공격수로 나섰다. 동시에 당시 중견사진가 임응식 선생과 함께 리얼리즘 사진의 발전에 앞장섰다. 그리고 동아일보에서 퇴직한 1980년 이후에는 사진가들의 국제무대 진출에 관심을 갖는 한편, 리얼리즘 사진만이 아니라 예술사진의 가능성을 감지하고 1989년 칠순의 나이로 월간 「사진예술」을 창간하는 결단을 내렸다. 전문지가 살아남기 어려운 현실적 고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에도 볼만한 사진잡지가 한 권쯤은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돌이켜보면 평생 그는 도전했고,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심고자 노력했다.



한국전쟁 중동부전선. 1951. ⓒ이명동


보병 제7사단의 한국전쟁 중동부전선. 1952. ⓒ이명동


‘호국의 꽃’, 한국전쟁 3주년 기념 전육군사진 콘테스트에서 1등 수상작. 1953. ⓒ이명동


한국사진을 일으켜 세우다
“이명동이라는 이름을 빼고 1960년대와 70년대의 한국사진을 말할 수 없다. 모든 일이 이명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는 한국사진사를 연구했고 50년간 이명동 선생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사진가 육명심 교수의 증언이다. 육 교수는 당시 한국사진이라는 무대의 총감독은 이명동이었다고 강조한다. 시시각각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한국사진을 진단했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현명하게 전략적으로 접근했으며, 행동으로 옮길 때는 단호하고 민첩했다.

사실,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한국사진은 아마추어리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사진가라고 해봐야 손에 꼽을 정도였고, 신문과 잡지의 사진기자, 사진관 사진기사 등이 ‘사진’의 영역 안에 있는 전부였다. 그런 와중에 이명동이라는 인물은 단연 돋보였다. 1957년 4월 서울에서 〈인간가족〉전시를 개관하면서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대대적인 사진 붐을 일으키자 이런 호재를 놓칠 리 없는 그는 동아일보 문화면에 관련 기사를 제안했다. 그러나 원로 사진가 중에서 글을 써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사진을 위한 지면을 반납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할 수 없이 사진기자인 본인이 기사를 썼고 이를 계기로 그는 사진 관련 기사를 떠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사진평론가로 등장하였다. 그 이후 동아일보와 월간 신동아의 지면에 정기적으로 사진평론을 쓰면서 그에게 사진가들의 시선과 기대가 쏠렸다. 더구나 1963년과 66년에 한국사진가의 등용문이라 일컬어졌던 동아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사진살롱을 창설하면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이 사진의 길이 이명동에게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에 이르렀다.

그것은 영광이기도 했지만 고난의 길이기도 했다. 5·16혁명정부가 들어서며 조직한 한국예술인총연합회(예총)에 사진작가협회(사협)가 빠진 것을 안 그는 담당 장교와 막후교섭을 통하여 한국예총에 사협을 넣는 작업을 했다. 육명심 교수의 증언처럼 사실 60년대 한국사진에 관한 대부분의 일은 모두 이런 식으로 그가 수면 위 혹은 수면 아래에서 움직인 결과였다. 특히 엘리트 양성에 관심이 컸던 그는 1973년부터 1995년까지 중앙대 상명대 등에 출강하면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이명동 선생은 당시에 사진가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신문사 근무를 마친 후 밤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가 대구의 사진가들과 밤을 새며 어울리고 새벽차로 상경하여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각 지방지 사진기자를 거점으로 또는 동아사진콘테스트 수상자를 매개로 각 지방의 사진가를 결합해 결속을 다지며 한국사진을 세력화 하는 데에 힘을 기울인 것이다. 그런 움직임으로 예술의 변방에 있던 사진을 차츰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을 했는데,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 유학 1세대가 돌아오면서 더욱 힘을 받아 사진의 영역을 확고하게 구축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4·19민주혁명, 탱크 위에 올라서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과 학생. 1960. ⓒ이명동


4·19민주혁명. 종로 거리의 고대생 시위. 이 사진은 4·19민주혁명 기념 우표로 발행되었다. 1960. ⓒ이명동


4월 19일 경무대 앞 발포현장. 1960. ⓒ이명동


백범 선생과 백범동지청년들, 맨 왼쪽이 이명동 선생. 1949.


사진의 그랜드슬램 달성
이명동 선생은 수십 년간 한국사진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지만 정작 자신의 개인전은 한 번도 열지 못했다. 따라서 사진가보다 『보도사진의 이론과 실제』, 『사진은 사진이어야 한다』 등의 저자로 더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론적인 면과 더불어 사진가로서 그가 남긴 역사적인 사진도 적지 않다. 그 중 사진기자가 되기 전인 1949년에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되기 3일 전 경교장에서 촬영한 인물사진은 널리 알려진 사진이다. 동그란 안경테,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당당하고 소탈한 백범 선생의 모습은 이명동 선생이 ‘백범동지회’의 일원으로 경교장을 들락거리며 쌓은 신뢰 때문에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명동 선생의 대표적인 사진은 한국전쟁, 자유당 정권 고발, 그리고 4·19혁명 관련 사진이다. 50년대는 자유당에서 대놓고 부정선거를 하던 시대였다. 그가 촬영한 영일만 민의원 재선거에서의 ‘표 도둑’ 사진과 장충단공원에서 벌어진 야당 유세현장에 난입하는 유지광을 비롯한 정치깡패들을 바로 눈앞에서 촬영하여 결국 유지광이 검거되게 만든 특종사진 등은 지금도 회자된다. 포토저널리스트로서 정확한 판단과 민첩하고 과감한 행동력으로 그는 권력의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정신은 4·19혁명 취재로 이어져 경무대 앞 발포사건 특종기사를 작성했고 동아일보 사진부에서 취재한 4·19사진을 모아 1960년에 『승리의 기록』이란 사진집을 발간했다. 그리고 이 공로로 1961년에 제10회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다. 또한 사진은 4·19기념우표로도 발행되었다.

한편, 그가 1950년부터 3년 동안 7사단 소속으로 많은 전투에 참여해 남긴 한국전쟁 사진들이 2014년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그해 한미사진미술관 초대로 〈먼 역사 또렷한 기억〉이란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95세에 작가로서 전시장에 선 이명동 선생은 “내가 수십 년 동안 남의 전시에 가서 격려사를 하고 또한 평론을 쓰면서도 이 나이에 나의 사진전을 하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면서 감회에 젖었다. 사진평론가, 사진기자, 사진선생, 사진이론가, 사진운동가, 사진잡지 발행인 등 사진에 관련한 모든 분야에 직함을 갖고 있던 이명동 선생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진 셈이다.


국립 서울 현충원 안장식. 2019. 7. 26.


추모식. 2019. 7. 25.


인촌상 수상 후 기념사진. 2010.


3대 발행인 이·취임식. 2015.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지난 7월 25일, 이명동 선생의 빈소에서 한국사진학회(회장 양종훈)가 주관한 이명동 선생 추모식이 열렸다. 이때 사진가들이 이명동 선생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는 순서가 있었다. 한국사진의 평론 부재를 안타까워한 이명동 선생이 1990년대 중반에 평론을 공부하는 진동선 씨에게 오로지 한길로만 진력하라며 매달 보조금을 건네준 이야기부터 미국에서 학교를 마치고 시카고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양종훈 씨의 아들을 위해 시카고병원 영아과 의사인 사위를 통해 1년간 기저귀와 분유를 대주었다는 이야기, 신문사 후배 유재력 씨가 기억하는 따뜻한 선배로서 이명동 선생, 황규태 선생이 20대일 때 이명동 선생이 배려하고 격려해주던 일화 등이 가슴 뭉클하게 이어졌다. 너무나 일화가 많아서 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발표할 기회를 갖지 못한 천경우 교수(중앙대)는 내게 독일유학 시절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생님을 만난 일화를 전해주었다. “밥 굶고 다니지 말라.”며 용돈을 쥐어주시고는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딸과 사위의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어려운 일 있으면 꼭 전화하라.’고 당부하셨다는 이야기다. 그때 전화번호를 적어주신 주황색 쪽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참으로 많은 분야에서 열성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한국사진의 구석구석을 챙기고 발전시키고자 노력한 것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그분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다. 어쩌면 그런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면모 때문에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그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면서도 전혀 사심이 없었다. 선생은 1989년에 창간한 월간 「사진예술」을 2001년에 제자이자 신문사 후배인 김녕만 씨에게 아낌없이 넘겨주었고, 2대 발행인인 김녕만 씨는 2015년에 사진학과 후배인 이기명 씨에게 물려줌으로써 아름다운 전통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선생에 대한 사진가들의 뜨거운 사랑으로 탄생한 것이 “이명동 사진상”이다. 선생의 팔순을 기념하여 1999년에 수백 명의 사진가가 7천만 원의 성금을 걷어 ‘이명동사진상’을 제정했다. 제1회 수상자 김희중(에드워드 김)을 시작으로 구본창, 김기찬, 김아타, 김승곤, 이갑철 양종훈과 특별상 김영갑 등이 상을 받고 7회까지 이어졌다. 사진가들의 순수한 성금으로 그분을 기리는 상을 제정한 것은 그분에 대한 사진가들의 애정을 말해준다. 지금은 중단되어 아쉽지만 그 아쉬움이 남아 있는 한 언젠가 다시 이어지리라 생각한다.

앞으로 이명동 선생보다 더 훌륭한 사진가, 날카롭고 박식한 평론가, 유능한 사진기자는 나올 수 있겠지만 이명동 선생처럼 종합적으로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한 시대를 이끈 인물은 21세기 디지털시대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서울시문화상, 인촌상, 대한민국문화훈장과 더불어 두 개의 화랑무공훈장과 4·19 건국포장 등은 선생이 살아서 무엇을 했는지를 명료하게 설명해준다. 이런 찬란한 공적은 빛나는 영광이지만 한편으로는 고단했을 삶의 뒷면을 투영하는 것 같아서 자랑스러우면서도 애잔하다. 마지막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장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님의 침묵」의 뒷부분을 되뇌었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시인이 왜 이런 표현을 했는지 진정 가슴이 먼저 알아듣는다. 이 글에서 차마 고인(故人)이라는 단어를 쓰기 싫어서 계속 선생이라는 호칭을 썼지만 앞으로도 고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것 같다. 백년에 이르는 무거웠던 삶을 벗어버리고 몸은 떠나셨지만 한국사진에 대한 염려와 기대, 희망을 우리의 가슴에 남기고 가셨기 때문이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19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