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헌 군산의 백년가옥과 흑백사진


오래된 폐가를 구입하여 가능한 원형 그대로 되살린 군산의 민병헌 작업실. 작가가 정성들여 가꾼 식물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다. 


한눈에 반한 오래된 집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재미있고 놀랍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개의 경우 처음엔 우연이었어도 그것을 필연으로 만드는 것은 우연을 맞닥뜨린 사람의 철학이고 취향이다. 서울사람으로 살아온 민병헌 작가(1955~)가 만 60세가 되던 2015년에 아무 연고도 없는 전북 군산에 작업실을 정한 것은 우연성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은 한번 꽂히면 기어이 이루고야 마는 그의 고집스런 성격이 빚어낸 결과였다. 군산에 오기 전 경기도 양평 작업실을 결정할 때도 그러했다. 강남 신사동에 작업실을 갖고 있던 그는 1997년에 안개를 찍기 위해 북한강변에 갔다가 서종 골짜기의 안개에 반해서 느닷없이 그곳으로 작업실을 옮겨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17, 8년 동안 안개에 묻혀 홀로 치열하게 작업을 해나갔다.

“양평의 작업실은 늘 습기가 많았어요. 강변에서 가까운 골짜기에 있으니 당연했죠. 그러려니 했는데 군산에 와서 지내다보니 그곳이 얼마나 습한 곳이었는지 알겠어요.”

민병헌 작가는 2014년에 군산에 왔다가 우연히 지금의 오래된 집을 발견했다. 양평으로 옮길 때 그러했던 것처럼 첫눈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13년간 사람이 살지 않아서 폐가가 된 낡은 집에 넋을 빼앗긴 그를 보고 주변에서 ‘이상한 사람’이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결국 지붕에 구멍이 숭숭 뚫려 하늘이 보이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그 집을 손에 넣고 말았다. 그 후 동네 목수 한 명의 도움을 받으며 직접 집을 수리해나갔다.

이 집의 등기부 기록은 1929년부터라니 100년이 다 되어가는 셈이다. 처음엔 일본인이 지은 일본식 가옥이었지만 해방 후 전북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이 집을 인수해 살면서 한국적 정서와 서양식 건축이 가미, 지금은 딱 부러지게 건축양식을 규정할 수 없는 혼합형이 되었다.

“내가 이 집에 반한 것도 그러한 오래된 세월의 흐름이 보인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각 시대가 섞여있는 모습이 아름다웠어요.”

따라서 최대한 원형을 살리며 손을 보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마당의 시멘트도 확 걷어내고 싶었지만 일부분만을, 촌스러운 알루미늄 현관문도 페인트만 다시, 심지어 켜지지도 않는 세월에 찌든 거실의 샹들리에마저 녹을 베껴내고 전구를 갈아서 그대로 달자고 했더니 일을 봐주던 목수 할아버지가 소리를 냅다 지르더라고 했다. “아니, 이거 10만 원이면 깨끗하고 멀쩡한 새 걸 살 수 있는데 뭐 하러 이 녹을 다 베껴내고 쩐 때도 다 닦으란 말이요?” 그러나 녹슨 것은 닦고 부서진 것은 보수하여 페인트칠하고, 말 그대로 쓸고 닦으니 드디어 원래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 집이 오랜 벗처럼 정답게 다가왔다.

“처음에 집을 지은 일본인, 그리고 이 집을 사들인 군산의 갑부에 이어 제가 이 집의 세 번째 주인이란 게 신기하지 않아요? 서울에선 집주인이 수시로 바뀌는데 100년이 다 되도록 세 번밖에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 참 좋아요.”

 


오로지 직접 프린트한 흑백사진만을 고수해온 민병헌 작가의 작품이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13년간 방치되었던 폐가를 수리하여 멋진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내부 공간. 일본식 건축양식과 양식이 섞여 있다.
 

군산 작업실 이전과 이후
민병헌 작가의 첫 전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올해로 38년째다. 1984년과 85년에 풍경사진을 전시했던 그는 1987년에 <<별거 아닌 풍경>>을 발표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민병헌 작가의 특색을 드러냈다. 그는 말 그대로 별거 아닌 것들, 잡초나 들풀 같은 것들에 시선을 주었고 사진을 배운 이후 줄곧 흑백 암실작업을 고수했다.

“남의 손을 빌리는 게 싫어서요. 혼자 작업하는 게 좋아서 사진을 시작했거든요. 특히 암실에 혼자 있는 시간이 내겐 정말 편안하고 좋았어요.”

그는 유복한 집안, 공부를 몹시 잘하는 형제들 틈에서 돌연변이(?)였다. 체질적으로 단체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학교에 가는 게 너무나 싫었다고 한다. 공상으로 가득한 머리에 책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다른 형제들이 1등을 도맡아 하는 동안 그는 태연하게 뒤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러다가 딱 한 번, 초등학교 3학년 때 진짜 1등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하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을 엄마의 닦달이 짐작이 간다.

“전에는 내가 그저 사진이 좋아서 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고 뒤돌아 생각하니 내가 열심히 사진의 길을 걸은 원동력은 가족과 학교와 사회에 대한 지독한 열등감이었던 것 같아요.”

공부에서 멀어져 사진을 시작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었다. 혼자 카메라를 들고 시외버스를 타고 나가 자신의 시선을 빼앗는 풍경을 찾아내는 일, 사진을 찍은 뒤에 설렘을 안고 돌아와 암실에 들어서면 언제나 반겨주는 암실의 붉은 등, 암실에서 홀로 밤을 새우며 비로소 느끼는 평안과 자유. 암실은 그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안식처였다.

“30대에 신사동에서 작업할 땐 뭘 몰랐고 양평에서 작업하던 4, 50대 시절엔 정말 열심히 했어요. 오히려 지금 군산에서는 그때보다 덜해요. 나를 몰아세우지 않게 되었다고 할까,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사진에 접근하는 마음이 달라졌다고 하는데 여기엔 60대라는 나이와 환경적 요인이 큰 것 같다고 말한다.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은 해가 나는 날에 사진을 찍게 되었다는 점이다. 안개, 비와 눈, 새벽 아니면 저녁에만 촬영했던 그는 태양 아래에서 사진을 찍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랐다고 말한다.

“또 하나 놀란 것은 식물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 식물 키우는 거였는데 군산에서 처음으로 정원을 직접 가꾸면서 풀 한 포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았어요. 봄에는 아침부터 종일 정원에서 일한다니까요.”

스스로도 자신의 변화에 어이없어하는 민병헌 작가지만 그러나 그의 입가엔 미소가 감돈다. 이미 사랑에 푹 빠진 연인의 모습이다. 그의 성격대로 조경전문가를 부르지 않고 혼자서 이리저리, 이거저거 심어보며 정원을 만들어간다고 했다. 양지 바른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땅을 파며 식물을 심고 보살피다 보니 문득 햇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게 되었는데 이 마음이 사진에서도 나타나더라는 것. 극도로 흐릿하고 모호했던 사진에서 최근 한층 밝아지고 콘트라스트도 분명해지는 것이 군산으로 온 이후의 변화다. 작가와 작업실의 상관관계를 느끼게 한다.

 


자신이 프린트한 롤지 사이즈의 작품을 보여주며 흐뭇해하는 작가.



기술과 예술의 합일
이제까지 살아오던 중 가장 남쪽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는 민병헌 작가는 군산에 와서 햇살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군산에 있다 보니 자꾸 더 따뜻한 남녘으로 발길이 향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남녘이라는 게 단지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였음도 알게 되었어요. 양평에 있을 적에 주로 경기도와 강원도를 다녔는데, 만약 지금 그곳에 다시 간다고 해도 남녘의 햇살이 느껴지는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대상을 보는 나의 시각이 따뜻해졌기 때문이겠죠.”

그는 2021년 서울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린 <<황홀지경-민병헌, 사진하다>> 전시에서 ‘남녘유람’ 시리즈를 발표했다. 소풍 다니듯이 가볍게 다니며 대상을 바라보고, 맑은 날 흐린 날 가리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촬영을 한다는 의미에서 유람이란 단어가 어울리는데, 그런 작가의 마음이 사진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5월말에 프랑스에 다녀와 6월 20일부터 성수동 구조갤러리에서 대규모 전시를 여는데, 신작 ‘남녘유람’과 ‘flower’, ‘몸’ 시리즈가 전시된다고 한다. 특히 이번에 발표하는 몸 사진은 ‘조금 센 사진’이라고 귀띔하는데 로버트 매플소프(Robert Mapplethorpe)나 일본의 아라키 노부요시(Araki Nobuyoshi) 같은 작가와 어떻게 다를지 기대된다.

민병헌 작가가 그동안 발표한 시리즈는 ‘남녘유람’ ‘고군산군도’ 같은 최신작을 비롯하여 ‘flower’ ‘새’ ‘이끼’ ‘물가’ ‘강’ ‘폭포’ ‘snow’ ‘안개’ ‘sky’ ‘잡초’ ’누드‘ 등 다양한데 그는 소재에 관계없이 민병헌 만의 고유한 톤을 구현함으로써 그의 독특한 사진영역을 확보했다. ‘민병헌 그레이‘라고도 부르는 극도로 콘트라스트를 억제한 그의 사진은 쉽게 볼 수 없지만 존재하는 어떤 것을 찾게 하는 아주 시적(詩的)인 사진인데 그 바탕에는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고도의 암실기법이 자리한다.

“극단적인 흰색과 그레이, 블랙 등을, 내가 표현해 낼 수 있는 최고의 지점까지 몰아가는 것, 그 세밀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의 극에 달하는 것을 추구했어요. 어떻게 보면 도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보자는 심리였을까요?”

그가 어둠 속에서 건져내는 빛의 흔적은 끊임없이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가 그 끝을 보려는 집착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군산에 내려온 이후 조금씩 바뀌었다. 프린트 작업의 완성도가 흑백사진의 모든 것은 아니므로, 결코 재주의 극으로 마무리되어선 안 될 것이므로, 그동안 추구했던 갈 데까지는 가보자는 욕심을 내려놓은 것이다. 즉 예술이 기술의 완성으로만 그쳐선 안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사진을 시작한지 40년인데 그 긴 세월이 느껴지는 나의 근원적인 작품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봅니다. 비록 5×7사이즈의 작은 사진 한 장이라도 그 사진에서 민병헌이라는 사진가의 긴 세월이 느껴지는 그런 사진을 하고 싶어요.”

 


최근 작업인 ‘남녘유람’ 시리즈. 군산 작업실에 오기 전에 작업했던 사진보다 밝아졌음을 느낄 수 있다.




‘몸’ 시리즈. 하얀 여백까지 작품에 포함된다.



아름다운 변화
봄의 끝자락에서 여러 식물들이 어우러진 그의 정원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는 원래 있던 회양목이나 촌스러운 철쭉을 밀어내지 않고 다른 식물과 서로 어울리지 않아도 그냥 두는 여유를 부린다. 마구잡이로 섞여 있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꽃이 아니어도 마당을 허용하는 그의 마음이 예전의 까다로움을 넘어 그를 편안케 하는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이젠 전에 촬영한 필름도 꺼내 들춰보곤 해요. 예전의 사진을 보면 그때의 내 마음이 보이거든요. 좋아서 사진을 했고 지금까지 하고 싶은 걸 계속 하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죠. 오랜 시간을 천천히 작업하며 하나하나 쌓여가고 있다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민병헌 작가가 30대의 나이였을 때 처음 만나 인터뷰한 이래 몇 년 단위로 계속 취재해왔지만 작가로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지금 그의 모습이 가장 빛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래서인지 군산을 출발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먼 길 오는 내내 가슴 속에 따뜻한 여운이 남는다. 그가 군산으로 작업실을 옮긴 것이 그의 창작의 여정을 의미 있게 마무리해주리라는 예감 때문이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22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