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 이후의 프레임 : 한국 사진의 르네상스를 조명하다 ②

프레임의 경쟁, 메이킹 포토와 테이킹 포토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사진계는 ‘사진은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찍는 것인가’를 둘러싼 열띤 공방이 지속적으로 이어진 시기였다. ‘만드는 사진’은 ‘메이킹 포토(making photo)’, ‘찍는 사진’은 ‘테이킹 포토(taking photo)’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물론 ‘만드는 사진’이나 ‘찍는 사진’과 같은 말로 90년대 전후 사진계의 지각 변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지만, 한국 사진의 역사 이래 처음으로 시도된 매체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이 프레임 논쟁은 전시라는 구체적인 제도와 미술관이라는 공공기관을 통해 전개되었으며, 예술사진의 미학적 평가와 규범을 논하는 최초의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주용_유예된 시간의 풍경_1985 ~ 1987_vandyke brown process_40×50cm



최금화_Thursday Afternoon_1992 (printed in 2018)_ink-jet print_76x300cm (38x61x(10)cm)


한국사진의 현대성과 메이킹 포토의 등장 및 확산
‘만드는 사진’이라는 말을 누가 처음 사용했는지, 뚜렷한 개념은 무엇인지,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드는 사진’은 낯설지만 거부할 수 없는 존재로 등장했다. 새롭지만 불순하며 실험적이지만 혼탁하고 유행을 선도하지만 경계해야 할 대상이 마치 그럴듯한 이국의 타자처럼 출현한 것이다. 개념적으로 모호하고 혼란스러웠지만 ‘만드는 사진’이 어떤 작업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필름의 중첩, 서로 다른 재료들의 콜라주, 비은염 재료를 사용한 인화, 한지와 같은 다른 지지체의 활용 등 ‘만드는 사진’은 기존의 사진적 관행 밖의 재료를 사용하거나 공정을 거친 작업을 의미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설치나 조각 등의 다른 매체와 혼합을 꽤하는 이른바 혼성 매체적인 작업을 가리켰다. 또한 필름이나 인화지에 드로잉적인 요소를 가미해 회화와 수공예가 개입된 작업을 뜻하기도 했고, 기존의 단사진 중심에서 벗어난 전시와 설치의 방식을 포함하기도 했다.

이러한 ‘만드는 사진’의 경향을 잘 보여주는 전시는 1988년 5월 워커힐미술관에서 열린 <새 시좌> 전이다. 한국현대사진의 시발점인 이 전시에는 기획자인 구본창 작가를 비롯해 김대수, 이규철, 이주용, 임영균, 최광호 하봉호, 한옥란 작가가 참여했다. 이들은 흘려 찍거나 사진 위에 페인팅을 하거나 조형물을 만들어 그 위에 사진을 붙여 입체로 만들었다. 또, 공간으로 확장하거나 형상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사진 이미지를 여러 번 합성하는 등 과거 사진의 양식을 부정하는 형태로 작품화했다. 이러한 다양한 경향을 보여준 이 전시는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사진 계열의 첫 기획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새 시좌>전의 흐름에 이어 파장을 일으킨 전시는 1991년 <11월 한국 사진의 수평전(이하 수평전)이다. 이 전시는 1991년부터 3년간 개최된 <한국사진의 수평전> 3부작 중 첫번재 전시를 의미한다. 1990년대 전반 한국 사진계에 메이킹 포토를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수평전’은 소수 엘리트 중심의 소규모 그룹전이었던 <새 시좌>전과 달리 다수의 젊은 사진가들이 동등한 선상에서 한국사진의 현주소에 문제의식을 갖고 수평적 접근을 시도했다. 사진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유롭게 표현하고 논의의 마당으로 나서서 그들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새로운 표현 양식을 생생하게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이것은 사진계의 인맥과 한연의 수직적 풍토를 해체하고 새로운 수평을 여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수평전>에서 ‘수평’은 모든 권력관계에서 벗어나 모든 작가들이 동등한 관계로 참여하여 자유롭게 매체를 사유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이 같은 의도는 전시에서 성공적으로 실현됐다. 1991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치러진 이 전시는 현대미술에서 사진이 차지하는 위상과 그 역할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침묵하고 있던 미술계를 향해 집단적 목소리를 내고자 했다. 이후에도 ‘만드는 사진’은 다양한 재료와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얻는 새로운 표현에 몰두했다. ‘만드는 사진’에 대한 여러 가지 논쟁과 비판이 있었다는 점, 90년대 후반에 들어 ‘만드는 사진’과 ‘찍는 사진’의 대립적인 논의가 급속히 종결되어 어떤 비평적 언어나 사유로도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만드는 사진’은 그 당시 현대미술과 연동하여 진행된 의미 있는 실험이자 가능성임은 분명했다.

 
 


최온성_Awakening_1995(printed in 2018)_ink-jet print_50x67cm
 


최온성_Awakening_1995(printed in 2018)_ink-jet print_50x67cm

 

테이킹 포토, 사진의 본질과 정체성을 되묻다
<사진·새시좌>전 이후 ‘만드는 사진’이 사진계에 큰 반향과 유행을 일으키자, 사진의 본질을 ‘찍는 사진’에 둔 전시가 기획되었다. 1993년 6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관점과 중재>전과 1996년 3월 삼성포토갤러리에서 개최된 <사진은 사진이다>전이 바로 그것이다. 두 전시는 ‘스트레이트(straight) 사진론’에 근거하여 ‘찍는 사진’의 예술적 성과와 현대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중에서 <관점과 중재> 전은 ‘찍는 사진’ 또는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 개념을 공론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사진매체의 본질적이고 순수한 가치가 재검토된 이 전시는 찍는 사진의 현대적 의미의 예술성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관점과 중재>전의 도록에서 한정식 교수는 ‘찍는 사진’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찍는 사진’은 다른 일체의 인위적 행위를 가하지 않은 순수한 사진, 사진술 이외의 다른 방법은 사용하지 않는 사진을 말한다. ‘찍는 사진’은 ‘스트레이트 포토’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스트레이트 포토란 어떠한 인위적 가공도 배제한 사진을 가리킨다.

스트레이트 포토는 본질적인 사진의 특질, 다시 말해 기록성을 골자로 삼는 ‘사진성’을 구현한다. ‘찍는 사진’의 핵심은 기록성에 있으므로 시대가 변해도 이 사진의 고유한 가치는 살아있다. 그는 스트레이트 포토가 품위를 유지하는 길은 사진의 존재 이유를 재확인하는 것, 다시 말해 ‘사진성’ 또는 ‘기록성’의 수호라고 주장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찍는 사진’뿐이다. 왜냐하면 ‘만드는 사진’은 회화에 속하기에 근본적으로는 ‘사진성’의 구현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 그의 말처럼 ‘사진의 진정한 가치’가 기록성에 있고 이를 담보하는 유일한 양식은 스트레이트 포토뿐이라면, 굳이 스트레이트 포토라 정의할 필요 없이 그것은 그대로 ‘사진’이 된다. 스트레이트 포토는 생명을 다한 낡은 양식이 아니다. 스트레이트 포토는 사진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추구되고 개발되어야 할 사진의 생명이지, 시대와 함께 나타나고 사라지는 한 개의 양식일 수는 없다. 이 같은 주장은 <사진은 사진이다> 전시에서 잘 나타난다.

도록의 다른 필자인 육명심 교수는 ‘스트레이트 포토’가 사진의 본질이며, 사진의 존재가치는 기록성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재처럼 ‘마구 흐트러진 역사의 새로운 실마리’를 찾는 길은 일단 ‘역사의 원점으로 회귀하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 원점은 모더니즘 사진이 아니라 리얼리즘적 재현, 또는 사회적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스트레이트 포토는 예술로서의 사진, 모더니즘 사진론, 리얼리즘적 재현, 사회적 다큐멘터리를 포함하는 초월적 개념으로 확장한다. 그것은 ‘만드는 사진’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흡수한 것이기 때문에 ‘사진’ 그 자체가 된다.

 



차용부_미로_gelatin silver print_23x30cm



강용석_매향리 풍경_1995_gelatin silver print_27.9×35.5cm



이갑철_선돌을 들어 올리는 사내, 남원_1990_gelatin silver print_51×40.5cm


프레임 너머…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상의 담론에서 ‘찍는 사진’은 공정으로부터 태도와 인식의 문제로, 나아가 실천과 의지의 문제로 확장되며 예술로서의 사진을 정의하는 규범으로 자리한다. 그것이 의지가 된 이상 개인의 취향이나 자의적 선택만이 아닌 지켜야 할 규율로서 힘을 가진다. 그래서 ‘스트레이트 포토’는 90년대 중후반 한국 사진계를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가장 견고하고도 위태로운 프레임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배워야 할 사진의 역사 속에,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매혹 속에, 그리고 기록의 사회성과 창작의 윤리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찍는 사진’의 외부를 상상하는 것은 곧 사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므로 매체를 탈피하여 다른 영역으로 이전해 버리는 것은 가장 도발적인 대안이다. 이 오래된 장르구분의 질서는 언제까지 작가들에게 부담과 구속으로 남을까? 그것은 분명 ‘미술’ 성립 이후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던 장르 간의 위계로부터 비롯되었지만, 동시에 주어진 질서에 맞서거나 미세한 균열을 남기며 권위를 상대화시켜왔다. 이 또한 미술의 역사이며 사진으로 가능해진 역사이기도 하다. ‘만드는 사진’이냐 ‘찍는 사진’이냐는 본질론을 벗어남과 더불어 사진이 무엇인지 끈질기게 붙들어 매는 것. 그리고 매체의 무한한 개념적, 정치적, 미학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들 또한 90년대 한국사진의 역사를 당당히 구성한다. 그렇기에 개별 작업이 보여주는 또렷한 가능성을 뒤로한 채 다시 한국 사진계의 흐름을 살펴보고, 사진에 대한 다양한 논쟁들을 정리하는 것은 아직도 의미가 있다. 프레임의 절대성을 믿어서가 아니라, 무엇이 창작의 전제이자 조건으로 상상되었는지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다. 또, 그것이 다음 세기 한국사진에서 어떤 의미를 생산하는 담론이 되었는지 돌이켜보며 선명하게 그 흐름을 읽어내기 위해서다.


 

*이 글은 이번 전시 도록에 수록된 김계원 교수의 「만드는 사진, 찍는 사진: 1990년대 한국사진을 바라보는 두 프레임」과 이기명 월간 ‘사진예술’ 발행인의 「한국현대사진의 맥락에서 본 ‘젊은 사진가 모임’展」에서 요약 발췌해 정리했으며, 진동선 사진평론가의 저서 『한국현대사진의 흐름 1980-2000』(아카이브북스, 2005)을 참조했습니다.

글 김수은 기자, 이미지 제공 대구미술관
해당 기사는 2018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